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천병희 옮김, 숲, 2021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천병희 옮김, 숲, 2021

스포일러 있음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순서

배경지식

에우리피데스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프롤로그를 통해 관객들에게 그 전의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만 읽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좀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세 가지는 알아두는 것이 좋다. 첫 번째는 고대 그리스의 지리와 민족이고, 두 번째는 고대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과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 세 번째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세계이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지리와 민족에 대해 보자. 한 번 정리해놓으면 다른 작품을 볼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방과 도시의 관계부터 알아보자. 앗티케 지방과 아테나이의 관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는 먼저 여러 지방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각 지방에는 여러 도시가 있다. 앗티케 지방에는 가장 큰 도시인 아테나이도 있고, 엘레우시스도 있다. 메가라는 앗티케 지방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보통 코린토스 지협이라고 하는 메가리스 지방으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 위로는 보이오티아 지방이 있는데 여기서 제일 유명한 도시는 테바이이다. 그 바로 위에 포키스 지방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폴론의 델포이 신전이 있고, 바로 옆에 파르낫소스 산이 있다. 이렇게 앗티케 지방을 포함한 그 위쪽 지방을 합친 곳이 앗티케 반도이다. 아폴론의 델포이 신전과 파르낫소스 산은 『이온』의 무대이기도 하니 잘 봐두자.

앗티케 반도 아래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있다. 이곳은 또 7개의 지방으로 분류한다. 여기에는 코린토스, 뮈케네, 아르고스, 스파르테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그리스의 동쪽에는 오늘날의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반도’가 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또다른 이름은 ‘소아시아’이다. 소아시아의 서쪽은 아이올리스 지방, 이오니아 지방, 도리스 지방으로 분류한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몇몇 지방들의 이름은 거기에 살던 주요 민족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고대 그리스의 지방과 주요 도시

그림 1. 고대 그리스의 지방과 주요 도시

고대 그리스에는 4개의 주요 민족이 있었다. 아카이오이족, 이오네스족, 도리에이스족, 아이올레이스족이다. 아카이오이족은 ‘아카이오스’에게서, 이오네스는 ‘이온’에게서, 도리에이스는 ‘도로스’에게서, 아이올레이스는 ‘아이올로스’에게서 유래했다. 이중 이오네스족의 유래인 ‘이온’과 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에우리피데스의 『이온』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도 수도권,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방언이 조금씩 다르듯이 이 4개의 민족도 각각의 방언이 있다.

포키스 지방 바로 윗쪽에는 아주 조그맣게 도리스 지방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도리에이스족은 여기저기 퍼져나갔는데, 그래도 마음의 고향은 이곳 도리스 지방이다. 도리에이스족은 어느순간 펠로폰네소스 반도 쪽으로 내려가 기존에 있던 뮈케네 문명을 멸망시키고, 코린토스나 스파르테 등의 주요 도시를 세운다. 이 도리에이스족이 남하하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침공하니까 나머지 부족이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도리에이스족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살다가 인구가 급증하자, 몇몇은 소아시아쪽으로 건너가 도시를 세우고 연맹을 맺었는데 그곳이 소아시아의 도리스 지방이다. 아래 그림에서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한 것이 도리에이스족의 경로이다.

아카이오이족은 원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쪽과 동쪽인 라코니케 지방과 아르골리스 지방에 살았다. 이들이 뮈케네 문명을 만들었다. 이들은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도 정복했다. 그런데 아카이오이족은 도리에이스족이 남하하면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카이오이족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으로 가서 거기에 이미 살고 있던 이오네스족을 쫓아내고 거기에 살았다. 그래서 그곳이 아카이아 지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아카이오이족이 그리스 진영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오는만큼 아카이오이족은 연맹을 굳건히 하며 크게 확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까지도 세력을 확장한다. 아래 그림에서 녹색 화살표로 표시한 것이 아카이오이족의 이동 경로이다.

그리스 북쪽에는 다뉴브 강(도나우 강)이 있다. 현대 지도로는 북마케도니아나 불가리아보다도 위에 있는 강이다. 아이올레이스족은 이 강 근처에 살다가 남하했다. 텟살리아 지방에 살다가 몇몇은 보이오티아 지방으로도 이동했다. 그러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쪽이나 서쪽으로도 퍼져나가고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도리에이스족이 남하하면서 여기저기 살고 있던 아이올레이스족도 쫓겨나게 된다. 그들은 레스보스 섬이나 소아시아 북쪽에 정착했는데, 그래서 이곳 지방의 이름은 아이올리스 지방이 된다. 아래 그림에서 보라색 화살표로 표시한 것이 아이올레이스족의 이동 경로이다.

마지막 이오네스족의 경로를 보자. 그들은 원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인 아카이아 지방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도리에이스족이 남하하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과 동쪽에 있던 아카이오이족이 쫓겨나고, 쫓겨난 아카이오이족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으로 오게 된다. 쫓겨난 아카이오이족이 이곳에 살고 있던 이오네스족을 또 내쫓는다. 그래서 이오네스족은 앗티케 지방으로 대거 이동하게 된다. 그들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앗티케 지방 아래에 있는 퀴클라데스 제도나 소아시아 중부 쪽으로도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소아시아 중부에는 이오니아 지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는 ‘에페소스’라는 주요 도시가 있다.

이렇게 4개의 부족은 쫓고 쫓기며 그리스와 이탈리아, 아프리카 북부, 소아시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이 4개 부족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가 에우리피데스의 『이온』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4개 주요 부족의 이동 경로

그림 2. 고대 그리스의 4개 주요 부족의 이동 경로

이제 고대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을 볼 차례이다. 악타이오스는 앗티케 지방을 다스리던 사람인데, 그에게서 앗티케의 옛말인 ‘악테’가 유래했다. 악타이오스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 아그라울로스가 있었다. 그래서 케크롭스를 아그라울로스와 결혼시키고, 케크롭스에게 앗티케 지방 일부를 다스리게 한다.

케크롭스는 아테나이의 1대 왕이다. 그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뱀이었다고 한다. 그가 앗티케 지방을 다스리던 시절, 신들은 각 도시의 영유권을 두고 싸웠다고 한다.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이 땅을 두고 싸웠는데, 포세이돈은 이곳에 짠물이 솟아나게 함으로써 이 땅이 먼저 자기가 봐둔 땅이라고 주장했고, 아테네는 케크롭스를 증인으로 삼고 올리브나무를 심어 이 땅이 자신이 먼저 봐둔 땅이라고 주장했다. 두 신이 싸우자 제우스는 12신을 재판관으로 세워 판결하게 했다. 재판에서 케크롭스가 재판에서 아테네가 먼저 올리브나무를 심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이 땅은 아테네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아테네의 이름에서 따와 도시 이름을 아테나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포세이돈은 이 일로 화가 나서 바닷물을 범람시켜 앗티케가 잠기도록 심술을 부렸다고 한다.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3.14.1 참고)

케크롭스는 아들 에뤼식톤이 있었지만, 에뤼식톤은 아들이 없이 죽었다. 그래서 땅에서 태어난 크라나오스가 케크롭스의 왕위를 이어 아테나이의 2대 왕이 된다. 크라나오스가 통치하던 시절에 데우칼리온의 홍수가 일어났다고 한다. 크라나오스에게는 딸 앗티스가 있었다. 그런데 이 딸이 어릴 때 죽자, 딸을 기리기 위해 지방을 ‘앗티스’라고 부르게 되었고 여기서 ‘앗티케’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다.

암픽튀온은 아테나이의 3대 왕으로 크라나오스를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손자이고, 데우칼리온의 아들이다. 데우칼리온과 퓌르라는 두 아들 헬렌과 암픽튀온을 낳았는데, 이 헬렌에게서 『이온』의 주인공 중 하나인 ‘크수토스’가 나온다. 크수토스는 주인공 ‘크레우사’의 남편이다. 또한, 헬렌은 도로스와 아이올로스도 낳는데, 위에서 봤듯이 이들이 도리에이스족과 아이올레이스족의 시조가 된다. 헬렌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그리스 사상과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하고, 나중에는 그리스인들을 헬라스인, 혹은 헬레네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헬렌의 형제가 암픽튀온인 것이다.

암픽튀온이 통치한지 12년이 되었을 때, 에릭토니오스가 그를 추방하고 아테나이의 4대 왕이 된다. 에릭토니오스는 『이온』에서는 크레우사의 할아버지로 나오므로 잘 봐야 한다. 에릭토니오스는 헤파이스토스의 아들이다. 헤파이스토스의 원래 부인은 아프로디테였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 바람을 피고 헤파이스토스를 버리게 된다. 아테네가 무구를 만들기 위해 헤파이스토스에게 왔을 때 헤파이스토스는 아테네를 겁탈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헤파이스토스는 아테네의 다리에다가 사정을 하는 데 그친다. 아테네는 역겨워하며 양털로 헤파이스토스의 정액을 닦아 땅에다가 버린 뒤 달아났다. 헤파이스토스는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아테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테네가 버린 양모에 있던 정액이 땅에 스며들자 거기서 에릭토니오스가 태어났다. 아테네는 에릭토니오스를 불쌍히 여겨 그를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케크롭스의 딸인 판드로소스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에릭토니오스를 상자에 넣어 맡긴다. 아테네는 판드로소스와 자매들에게 상자를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호기심에 못이겨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상자에는 뱀 두 마리가 아이를 지키고 있었다. 아테네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넣어둔 것이다. 그녀들은 뱀에게 물리고, 아테네의 노여움으로 인해 미쳐버려서 투신 자살했다고 한다.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3.14.2–6 참고)

에릭토니오스에게는 판디온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왕위를 이어 아테나이의 5대 왕이 된다. 이때 테바이의 랍다코스와 아테나이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이때 트라케에 있던 아레스의 아들 테레우스를 원군으로 불러들여 랍다코스를 죽이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판디온은 딸 프로크네와 필로멜레가 있었는데, 그래서 프로크네를 테레우스에게 시집보낸다. 이 이야기는 아주 잠깐 『탄원하는 여인들』에서 등장했다. 테레우스는 처제인 필로멜레를 겁탈하고 그녀의 혀를 자른다. 필로멜레는 수를 놓아 언니인 프로크네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고하고, 프로크네는 화가 나서 자신과 테레우스의 아들 이튀스를 죽여 요리를 해서 테레우스에게 내놓는다. 테레우스는 잘 먹다가 자신이 먹은 것이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필로멜레와 프로크네를 추격한다. 필로멜레는 참새목의 나이팅게일(혹은 밤꾀꼬리), 필로멜레는 제비, 테레우스는 매(혹은 오디새)로 변신했다고 한다.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3.14.7–8;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6권 412–674행 참고)

판디온의 아들 에렉테우스가 왕위를 이어 아테나이의 6대 왕이 된다. 에렉테우스는 크레우사의 아버지이므로 잘 봐야 한다. 에렉테우스 시절에는 아테나이 바로 위에 있는 도시인 엘레우시스와 전쟁이 일어난다. 아테나이를 다스리던 에렉테우스는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신탁에 따라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친다. 그런데, 딸들은 한 명이 죽으면 전부 같이 죽기로 맹세했었다. 그래서 딸 한 명이 죽자 나머지도 다 같이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신탁 덕분인지 에렉테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지만, 포세이돈이 지진을 일으켜 그의 집을 박살내고, 그를 대지의 틈 속으로 삼켰다. 에렉테우스의 아들인 케크롭스 2세가 그의 왕위를 잇는다.

고대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3.14–3.15 참고

그림 3. 고대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3.14–3.15 참고

『이온』의 주인공인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를 보자. 크레우사는 에릭토니오스 → 판디온 → 에렉테우스로 이어지는 아테나이의 왕가이다. 크수토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증손자이자, 데우칼리온의 손자이다. 그런데 아테나이가 에우보이아 지방의 사람들과 전쟁이 났을 때 크수토스가 아테나이에 지원을 와서 전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크수토스는 아테나이의 왕 에렉테우스의 딸인 크레우사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크수토스의 형제들은 도로스와 아이올로스로 이들도 그리스 주요 4개 민족의 각각의 시조가 된다. 크수토스와 크레우사 사이에서 나온 자녀인 이온과 아카이오스도 각각 4개 민족의 시조가 된다.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1.7.3, 3.14.1–15.5 참고

그림 4.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1.7.3, 3.14.1–15.5 참고

그런데 에우리피데스의 『이온』에는 몇 가지 설정 오류가 있다. 그래서 어느정도 오류들과 타협하며 읽는 수밖에 없다. 에렉테우스는 크레우사의 아버지로 나오고, 에릭토니오스는 크레우사의 할아버지로 나온다. 판디온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판디온 1세와 판디온 2세는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 사이에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채워진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판디온 1세의 존재를 지우는 것으로 타협하자.

또한, 에렉테우스 다음에는 케크롭스 2세가 왕위를 잇는데, 에우리피데스의 『이온』에서는 크수토스가 왕위를 잇는다. 이것은 크수토스가 잠깐 왕위를 받은 뒤 케크롭스 2세에게 왕위를 주었다는 해석이면 깔끔해진다.

그리고 크수토스가 헬렌의 자녀가 아닌 아이올로스의 자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온』 작품에서만 크수토스는 헬렌의 자녀가 아니라 손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오류가 있는데, 도로스는 원래 크수토스와 형제이다. 하지만 『이온』 작품에서는 크수토스의 아들로 나온다. 이온은 크레우사와 아폴론의 아들이며, 크수토스는 이온을 입양한 것으로 나온다. 작품의 극적인 결말을 위해 도리스의 가계 배치를 이렇게 바꾼 것 같으니 참고하고 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다른 문헌에 나오는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을 『이온』을 읽기 위해 조금 타협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온』 버전의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 『이온』 버전의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

그림 5. 『이온』 버전의 크레우사와 크수토스의 가계도, 『이온』 버전의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

지금까지 첫 번째로 고대 그리스의 민족과 지리를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이온』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계도와 고대 아테나이의 역대 왕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에는 주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을 알고 작품을 읽으면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정리하자면, 첫 번째로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갈등의 원인이 사건보다 인물에게 있으며, 세 번째는 신성 해체의 과도기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에우리피데스 작품 세계의 특징은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는 사건을 직접 보여주기 보다는 인물을 통해서 설명하는 방법을 많이 택했다. 특히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프롤로그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다른 작가들의 비극 작품은 신화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상영되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프롤로그를 통해 작품 이해에 필요한 정보들을 관객들에게 미리 전달해준다. 『이온』에서는 헤르메스가 등장해 작품 이해에 필요한 정보들을 미리 전달해준다. 즉, 작품은 작품 안에서 끝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이 녹아있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갈등의 원인이 사건보다 인물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집중했던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사건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그저 등장인물의 말로써 넘기는 것이 많다. 그의 작품들은 비극의 원인도 대부분 특정한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위나 사건에 대한 대처 방법에 있다. 그는 행복이나 고통이 절대적인 사건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이나 행동을 통해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의 내적인 고뇌나 사람들 간의 갈등에 주목했다.

세 번째 특징이 가장 중요한데, 에우리피데스는 신성 해체의 과도기에 있었던 인물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마지막 비극 작가로 여겨진다. 에우리피데스의 이전 시대에는 절대적이고 정의로운 신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다가 점점 신성은 해체되어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되는 합리주의로 넘어간다. 그는 그 과도기에 있었던 사람으로 신성 모독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도 대부분 신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신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체하기 시작한 작가로 큰 의의가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왜 신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을까? 당대 사람들은 신화를 심리적 고뇌에 대한 원형이 상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절대적인 이야기로 여겼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신화의 이야기가 표면적으로 이해된다면 괴물과 신은 실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신들의 횡포를 당하기만 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는 문제가 많다. 거기에다 당대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 더욱 고통을 받는 현실을 보며 신들이 정말 인간 세계의 질서를 위해 노력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신들이 인간 세계의 질서를 위해 노력한다면, 경배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행동은 방관이자, 횡포이다. 신들이 인간 위에 군림할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성의 완전한 해체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저 합리주의의 포문만을 열었다. 그 근거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작품에서 갈등이 절정에 이른 상황을, 운이나 그동안 묘사되지 않았던 작품 외부의 요인이 간단하게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그의 대부분 작품에서는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마지막에 신이 갑자기 등장해 질서 있게 정리한다. 신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질서를 정리하는 신의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이는 신성 모독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신성 모독은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중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는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 신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이런 갈등들이 신의 섭리를 모르는 인간에 의한 것이었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에우리피데스는 신성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심리적 고뇌의 원형이 신성에 대한 묘사를 통해 녹아드는 것이라면, 신성을 해체하는 그의 작품에는 그런 심리적 고뇌가 상징으로써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해체하고자 하는 신성이 무엇이고, 그렇게 됨으로써 그가 바라는 세상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을 유념하고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즐긴다면 더욱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줄거리 및 작품 해석

아폴론은 크레우사를 겁탈한다. 크레우사는 아이 ‘이온’을 갖게 되고, 아버지 몰래 아이를 낳아 자신이 겁탈당한 동굴에 버린다. 헤르메스는 아폴론의 부탁에 따라 아이를 아폴론 신전 앞에 갖다 두고, 아이는 신전 지기로 자라게 된다. 나중에 크레우사는 크수토스와 결혼하지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신탁을 받으러 아폴론 신전에 온다. 크레우사가 먼저 아폴론 신전에 와 신전 지기와 마주한다. 아들을 잃어버린 크레우사와,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는 이온은 동질감을 느낀다.

크수토스는 아폴론 신전에 들어갔는데, 신전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보는 자가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래서 크수토스는 이온을 보고 자신이 젊을 적 이름 모를 여인과 동침하여 나은 아들이라 생각하고 아들로 삼는다. 하지만 크레우사는 자신은 자식도 없는데 남편 크수토스는 아들이 생긴 것에 분노하여 이온을 죽이려고 한다. 이온이 사실 크레우사의 친아들인데도 말이다. 그동안 크레우사는 아폴론에게 불의를 당한 것을 숨기고 살았지만,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 크레우사는 아폴론의 불의를 폭로한다. 크레우사는 아버지의 가정 교사였던 노인에게 부탁해 이온을 독살하기로 한다.

노인은 행사에서 이온에게 독이 든 포도주를 준다. 하지만 이온은 불길한 징조를 읽어 독이 든 포도주 잔을 바닥에 버린다. 바닥에 흐른 포도주를 비둘기가 먹고 죽자, 이온은 자신이 독살 당할 뻔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온은 사람들과 함께 크레우사를 사형하려고 쫓는다. 크레우사는 신전의 제단으로 대피한다. 제단에서는 자신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아폴론 신전의 예언녀이자 이온을 길렀던 퓌티온이 이온에게 이온이 아기일 때 담겨있던 광주리를 준다. 크레우사는 그것을 보고 이온이 자신의 자녀임을 알아채고, 이온은 믿지 않지만 아테나가 그들 앞에 나타나 진실을 말해준다. 둘은 화해를 하고 크수토스에겐 비밀로 한 뒤 아테나이로 돌아간다.

아폴론은 태양, 예언, 의술, 음악의 신이다. 그가 상징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그동안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올바른 지혜를 상징했다. 그래서 그는 의술의 신이며, 그런 올바른 지혜로부터 떠오르는 신성한 예술(음악)을 상징한다. 아폴론의 뤼라는 그래서 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르고 호에서 뤼라를 연주해서 세이렌들의 유혹을 물리쳤듯이 말이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은 세속적 욕망의 도구로써의 예술일 것이다. 그런 상징은 아테네가 버린 목적(시링크스, 나무 피리)이 있다. 이런 나무 피리의 관악기는 세속적 욕망을 위한 예술의 상징으로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박코스 여신도들이 많이 연주한다. 아폴론은 인간이 알기 어려운 신의 섭리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예언이나 태양의 신일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이 작품에서 신의 섭리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신의 섭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함께 비난한다. 그의 합리주의는 작품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미 신이 처음에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몇 가지 근거를 찾아보자.

첫째, 에우리피데스는 권력을 공고히 하거나, 미혼모에게서 출생했거나 고아로 자란 것이 창피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신의 자녀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이미 파악했다. 아테나이의 왕가가 땅에서 태어난 왕가임에도 크수토스는 땅에서 사람이 태어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또한, 이온이 신전 지기로 있을 때 크레우사를 만난 장면을 보자. 에우리피데스의 논리에서 신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이온: 그렇다면 대지가 내 어머니일까요?
크수토스: 땅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날 수 없어.
—에우리피데스, 『이온』, 542행

크레우사: 그리고 그녀는 신에게 아이를 낳아 주었어요, 그녀의 아버지 몰래.
이온: 말도 안 돼요. 그녀는 인간에게 겁탈당했는데, 그것이 창피한 거예요.
—에우리피데스, 『이온』, 340–341행

이온은 이미 신전 지기로 신을 섬기는 데에도 이 이야기를 듣자 마자 신의 자식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것은 에우리피데스 자신의 생각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신의 자녀가 진짜로 신의 자식이라면 신은 비합리적이고 악한 존재인 것이 틀림 없다.

이온: (…) 하지만 나는 포이보스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어. 그게 무슨 짓이람? 처녀를 겁탈하고 나서 버리시다니! 몰래 아이를 낳고 나서 무정하게도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두시다니! 그러지 마십시오. (…)
—에우리피데스, 『이온』, 436–439행

여기서 이온은 무려 신에게 권고를 하고 있다! 만약 신이 처녀의 아이를 거둬가서 기른다면 신은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온: 포이보스께서 아이를 데려가 몰래 기르시지 않았을까요?
크레우사: 그렇다면 그분은 공유물을 혼자 즐기니 잘못하시는 거죠.
이온: 그렇다면 신께서 그녀에게 잘못하시는 거죠. 어머니가 안됐군요.
—에우리피데스, 『이온』, 357, 358, 355행

신의 악행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에우리피데스는 “정말 이래도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크레우사와 이온이 처음 만나 이야기를 할 때 크레우사는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하나 같이 비합리적이다. 아테나가 아기 에릭토니오스를 상자에 담아 케크롭스의 딸들에게 맡겼다. 케크롭스의 딸들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봤다가 아테나의 분노로 인해 미쳐서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합리적인가? 신들은 선한가? 에렉테우스는 신탁에 따라 자신의 딸들을 제물로 바쳤다. 합리적인가? 신들은 선한가? 포세이돈은 갑자기 에렉테우스에게 지진을 일으켜 그를 죽였다. 그는 신탁에 따라 딸을 제물로 바쳤을 뿐이다. 합리적인가? 신들은 선한가? 아폴론은 크레우사를 겁탈했다. 합리적인가? 신들은 선한가?

헤르메스: (…) 신은 자기 아들을 그의 아들이라며 떠넘길 요량인데, (…) 그녀를 겁탈한 일은 비밀로 묻힐 테니 말이야. (…)
—에우리피데스, 『이온』, 69–73행

크레우사: (…) 신들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우리가 우리 주인들의 불의로 망한다면 어디 가서 정의를 구하지요?
—에우리피데스, 『이온』, 252–254행

신의 섭리를 상징하는 아폴론이 무려 인간에게 악행을 행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신의 섭리라는 이유로 그저 견뎌야 한다. 악행처럼 보이는 신의 행동이 어쩌면 신의 섭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이제 인간은 신의 섭리를 견뎌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과 신은 동등한 위치로 신에게 권고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신에게 사과를 받아낼 수도 있다.

크레우사: 암 그렇게 되고 말고요. 그리고 록시아스께서 이제 마침내 이전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신다면, 설령 그분과 완전히 화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래요. 그분은 신이시니까요.
—에우리피데스, 『이온』, 425–428행

『이온』에서의 비극은 어머니가 친자식을 죽이려 하고, 자식이 친어머니를 죽이려 하는 상황이다. 둘은 한때 동질감을 느끼기까지 했지만, 서로 죽이려고 하는 원수 지간이 되었다. 이것은 절대적인 상황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의 씨앗은 사실 신의 불의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폴론이 크레우사를 겁탈하고, 그것을 덮으려고 하면서 인간들이 이런 비극을 겪는 것이다.

코로스: (…) 나는 베를 짤 때도, 이야기할 때도 듣지 못했네, 여인들이 신들에게 낳아 준 자식들이 행복하다는 말을.
—에우리피데스, 『이온』, 505–508행

결국 아테나가 나타나 상황을 정리하지만, 아폴론은 끝까지 떳떳하지 못하다.

아테나: (…) 아폴론은 혹시 이전의 과오 때문에 공공연한 비난을 받을까 봐 너희 면전에 나타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기고, 나를 보내 너희에게 말을 전하게 했느니라.
—에우리피데스, 『이온』, 1556–1559행

아테나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갑자기 나타나 모든 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은 어느정도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의 대사들을 보면 계속해서 신성에 의문을 갖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 급작스럽게 신이 나타나 질서를 정리한다. 그렇다고 에우리피데스가 ‘사실 인간이 신성에 의문을 갖는 것은 신의 거대한 섭리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신성모독 죄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에 이런 장치를 넣었다. 그래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으레 그렇듯, 마지막 장면에서는 세세한 묘사보다는 맥 빠지게 급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코로스: 집안에 변고를 당한 자는 낙담하지 말고 신을 경배해야 하오. 착한 사람은 결국에는 정당한 보답을 받지만, 악한 사람은 그 본성상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에우리피데스, 『이온』, 1620–1622행

어쨌든 이제 모든 갈등은 잘 해결되었다. 그런데 미심 쩍은 부분이 있다. 아직 피해자가 남아있다. 바로 크레우사의 남편 크수토스이다. 크수토스는 이온이 자신의 진짜 아들인줄 알고 열심히 입양해 키울 것이다. 크수토스는 아폴론으로 인해 오쟁이를 진 것이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여기며 모든 재산을 넘겨주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다. 이야기의 최대 피해자는 크수토스인 것이다.

그렇다면 에우리피데스는 크수토스를 왜 작품에 심어놓았을까? 크수토스가 맞이하는 비극은 무엇을 의미할까? 신의 섭리를 의심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독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의 저의가 불경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일차적으로 신성을 해체했다. 그의 비판은 이제 맹목적으로 신의 섭리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이어진다. 그 대상이 크수토스라는 인물로 표현되는 것이다.

크수토스는 예언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고, 이온을 보자마자 자신의 아이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신전 지기로 있던 이온은 의심하지만 말이다. 크수토스는 신탁에 대한 그의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크수토스가 ‘나는 당연히 이렇게 말을 시작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맹목적인 순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사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그런 도그마로 똘똘 뭉친 사람들까지 비난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멍청하다고 직접적으로 주장을 하진 않지만, 그들이 권력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하고 있다.

크수토스: 내 아들아, 잘 있느냐? 나는 당연히 이렇게 말을 시작해야 해.
—에우리피데스, 『이온』, 517행

크수토스: 나는 네 아버지이고, 너는 내 아들이야.
이온: 누가 그렇게 말했지요?
크수토스: 너를 내 아들로 길러 주신 록시아스께서.
이온: 다른 증인은 없잖아요?
크수토스: 신탁이 그렇다고 가르쳐 주었어.
이온: 모호한 말씀을 듣고 오해하신 거겠죠.
크수토스: 아니야. 내가 듣지 못한다면 몰라도.
—에우리피데스, 『이온』, 530–533행

반면 이온은 신전 지기임에도 불구하고 신탁에 대한 의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납득이 갈만한 설명을 계속 요구한다. 오히려 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자가 신탁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온: 이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검토해 보도록 해요.
크수토스: 그게 더 낫겠구나, 내 아들아.
—에우리피데스, 『이온』, 542–543행

에우리피데스는 『이온』에서 신성을 해체하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걸까? 그는 이미 신성이 기득권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데 쓰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권력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와 같다. 권력자들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람들에게 신의 명령이라며 이러쿵 저러쿵 하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그런 명령 위에 있었다. 신의 명령은 자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를 하면서, 정작 권력자들은 그런 지시를 공공연하게 어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신성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권력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들에게, 아니 권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온: 그러지 마십시오. 그대는 권세가 있으니 미덕을 추구하십시오. 신들은 사악한 인간은 누구든 벌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법을 정해주신 그대들 신들께서 스스로 그 법을 어기신다면 어찌 정당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대들은 무턱대고 쾌락만 좇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대체 누가 나쁘다는 말을 듣는 게 옳을까요? 신들께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흉내내는 우리 인간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신 분들이 아닐까요?
—에우리피데스, 『이온』, 439–451행

문구 보관

내가 생각하는 『이온』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명대사는 바로 위의 대사이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 작품에는 핵심적인 메시지 외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주옥 같은 대사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일종의 아카이브로 마음에 드는 문구를 이유 없이 여기에다 써놓으려고 한다.

코로스장: 사람들도 많지만, 사람들이 당하는 운명도 많고 각양각색이지요. 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내기가 어려워요. (381–383행) 크레우사: (…) 남자는 여자에게 가혹해요. 남자들은 나쁜 여자든 착한 여자든 싸잡아 미워하니까요. 우리 여자들은 이렇듯 불행하게 태어났다니까요. (399–400행)
코로스 (우): 자식은 어려울 때는 울이 되고, 행복할 때는 낙이 되며, 전시에는 조국을 구원하는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라네. 아무튼 나는 믿음직한 자식들을 정성껏 기르는 일을, 부나 왕궁보다 더 높이 평가해요. 나는 자식 없는 삶이 싫고, 그런 삶이 마음에 드는 자도 싫어요. 나는 살림은 넉넉지 않아도 자식이 많은 삶을 살고 싶어요. (481–491행)
이온: (…) 제가 도시의 키를 잡는 높은 자리로 밀고 올라가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면, 힘없는 자들의 미움을 사게 될 거예요. 사람들은 더 힘있는 자들을 싫어하는 법이니까요. (595–598행)
이온: 왕권에 대한 찬양은 근거 없는 거예요. 왕권은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근심으로 가득차 있지요. 암살당할까 봐 평생을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에게 무슨 만족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겠어요? 저는 왕이 되느니 차라리 평범하지만 행복한 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요. 왕이란 악당을 친구로 사귀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자기를 죽일까 봐 착한 사람은 미워하지요. (…) 제가 바라는 것은 적당한 재산에 근심 없는 삶이에요. (621–632행)
크수토스: 혼자서 행운을 누림으로써 자식 없는 내 아내를 속상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니 말이다. (657–658행)
이온: 가겠어요. 하지만 내 행복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요. 낳아 준 어머니를 찾지 못한다면 제 인생은 살 가치가 없어요, (668–669행)
코로스장: 저는 더 영리하되 사악한 자보다는 평범하되 정직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어요. (834–835행)
크레우사: 하지만 무엇이 나를 막는단 말인가? 대체 누구와 내가 미덕을 다툰단 말인가? (…) 나는 더이상 그 교합을 숨기지 않으리라. 가슴에서 짐을 들어내면 더 편안해질 테니까. 내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하고, 인간들과 신들의 사악한 짓거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구나.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내 사랑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자들임을 밝히리라. (…) 그대의 허물을 나는 햇빛에 대고 밝힐래요. (862–886행)
크레우사: 따로요. 좋은 것은 나쁜 것과 섞일 수 없으니까요. (1017행)
코로스장: (…) 우리는 이웃에 해를 입히려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자신이 해를 입는 것인가요? (1247–1249행)
이온: 불의의 희생자들은 마땅히 신전에서 보호를 받되, 똑같은 피난처를 찾는다고 해서 선인과 악인이 신들에게서 똑같은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지. (1317–1319행)
크레우사: 희망이라면 나는 멀리멀리 내팽겨쳤으니까. (1453행)
크레우사: 너는 비 오듯 하는 눈물 속에서 태어나 비탄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품을 떠났지. 하지만 지금 나는 네 볼에 내 볼을 대고 숨쉬며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있구나. (1458–1461행)
크레우사: 우리는 그때 이후로 불운에, 그리고 또 행운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구나, 바람 부는 대로. 이제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지 말기를. 고생이라면 우리는 전에 원도 한도 없이 했으니까. 내 아들아, 이제는 고생 끝에 순풍이 불어왔으면! (1504–1508행)
—에우리피데스, 『이온』, 발췌

이온: 어머니의 품에 안겨 응석이나 부리며 재미나게 살았어야 할 때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으니까. 불쌍하기는 나를 낳은 여인도 마찬가지야. 자식 재미를 잃었으니 그녀도 고통받기는 매일반이니까. 이제 이 광주리를 신에게 바쳐야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지 않기 위해. 나를 낳아 준 여인이 노예라면, 어머니를 찾는 것이 말없이 내버려 두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으니까. (…) 아니, 내가 왜 이러지? 이건 나를 위해 어머니를 찾을 단서를 보존해 주신 신의 뜻을 거역하는 짓이 아닌가? 용기를 내어 이 광주리를 열어야 해. 어차피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에우리피데스, 『이온』, 1375–1388행

이온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진리를 외면하려다가, 불편한 진실이더라도 그것을 마주하려는 장면이다. 나도 그런 순간에 용기를 내어 광주리를 열 수 있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