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스포일러 있음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순서

자신의 하루살이들을 사랑하여 앞을 내다보고도 사탄을 자처한, 창조주 프로메테우스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중 아이스퀼로스 작품만 읽어보지 않았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처음으로 읽은 그의 작품이다. 물론 이 책은 아이스퀼로스가 쓴 것이 아니라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만약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그의 작품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아이스퀼로스는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와는 확연히 다르다.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라인 한 줄 한 줄이 굉장히 유려하고 심금을 울린다. 그에 반해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은 모든 라인이 그렇게 유려하지는 않다(물론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읽어봐야 진짜로 그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인물에 대한 양가 감정이 들게 한다는 점에서 고차원적인 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메테우스는 절대 권력에 대항한 자,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에게 선물을 주었던 자인 동시에 오만하고 교활하며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이전에는 프로메테우스를 절대 권력,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니 그를 숭고하고 멋진 인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그가 저항한 절대 권력이 어떤 권력이었나? 그것은 악이었나? 그는 무엇을 위해 투쟁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의 꺾이지 않는 고집에 경외를 표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의 비합리성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중립적인 시각을 갖게 해준다.

프로메테우스 신화

먼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보자.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아마도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스퀼로스의 대표작인 『오레스테이아』 3부작보다도 더 유명한 주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주다. 그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여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고, 인간들이 더 좋은 고기를 먹게 하려고 그들이 신들을 속이게 만든다. 이에 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카우카소스 산에 쇠사슬로 묶고 독수리가 간을 쪼아먹게 한다. 인간들에게는 판도라라는 재앙을 선물해 고통을 준다. 인간들의 고통은 곧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은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풀려날지도 알고 있었다. 현자 케이론이 그를 대신해서 죽고, 영웅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간을 쪼아먹는 독수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제우스에 관한 예언을 그에게 말해줌으로써 그와 화해하여 결국 쇠사슬에서 풀려난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인 프로메테우스 신화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좀 더 심층적으로 읽으려면, 등장인물들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불,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헤라가 상징하는 것

이 비극의 등장인물은 프로메테우스, 이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힘, 폭력, 오케아노스, 오케아노스의 딸들로 구성된 코로스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의 명을 받아 프로메테우스를 카우카소스 산에 쇠사슬로 묶은 인물이다. 오케아노스는 강의 신으로 프로메테우스에게 동정심을 표하고, 그를 위해 제우스에게 호소하려고 하는 인물이다. 이오는 제우스가 눈독들여 교합하려 했던 여인으로, 헤라의 미움을 사 쇠파리에 쫓기며 방랑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으로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말을 전하러 온다.

그리스 신화에서 불은 지성과 정화를 상징한다. 헤파이스토스는 불의 신이므로 지성을 상징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지성, 그중에서도 교활하고 타락한 지성을 상징한다. 헤르메스 역시 지성을 상징하는 신이다. 등장인물 중 무려 세 명이 지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미움을 받고 있고, 이오는 헤라의 미움을 받고 있다. 올륌포스의 최고신인 제우스는 영(초의식, 도덕의식)을 상징한다. 헤라는 신성한 가정을 수호하는 여신으로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인 영혼의 결합을 지향하는 여신이다. 헤라는 욕망의 정화를 상징한다.

프로메테우스(지성)의 비합리성, 교만

프로메테우스가 타락한 지성을 상징하고 제우스가 영을 상징한다면, 프로메테우스를 그저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 옳은 신념을 위해 고통을 견디는 인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리스 신화는 지성을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는 지성과 영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이상적으로 여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프로메테우스의 비합리성과 교만이 분명하게 보인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허락받고 가져오지 않았다. 그는 신들의 불을 훔쳤고 인간이 신을 속이게 만들었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화를 내는 건 당연지사다. 지성이 올바르게 쓰이지 않고 교만하게 쓰이면 영을 소홀히하게 된다. 영을 상징하는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줌으로써 이를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는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자신이 인간을 더 낫게 만들었다는 자부심, 절대 권력에 홀로 저항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허영심, 제우스의 운명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제우스보다 더 낫다는 교만함을 갖고 있다.

실상은 어떤가. 첫 번째로 자신이 인간을 더 낫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파헤쳐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하루살이들, 즉 인간들에게 불로 상징되는 사고력과 지적 능력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은 전에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소. 아니, 인간들은 꿈속의
형상처럼 긴긴 일생 동안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뒤섞었소
···
전에는 어둠에 가려 있던 불타는 전조들이
눈에 보이게 만들어주었소.

이는 인간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의식의 상태로 끌어올려졌음을 뜻한다.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유인원들이 모놀리스를 만진 후 뼛조각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의식(지성) 덕분에 인간은 ‘문자의 조립’을 찾아냈고 고차원적인 예술을 창조했다. 그러나 지성이 정말로 인간을 더 낫게 했는가? 코로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프로메테우스 님, 이는 그대가 제우스를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인간들을 과분하게 존중한 탓이에요.
···
그대는 보지 못했나요, 허약하고 꿈 같은 무기력이
인간들의 눈먼 종족의 발을 묶고 있음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지적 능력을 선물해주었어도 인간은 발이 묶여 있다. 그가 인간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올렸을지라도, 초의식까지는 끌어올리지 못한다. 그 밧줄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제우스로 상징되는 초의식, 영이다. 지성은 영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밧줄을 풀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하루살이들, 자신의 피조물들의 전지전능한 창조주는 될 수 없다.

두 번째로 절대 권력에 홀로 저항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허영심을 살펴보자. 티탄 신족과 올륌포스 신들의 싸움에서 올륌포스 신족이 이김으로써 제우스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제우스의 권력은 절대 권력이다. 절대 권력에 대한 저항은 통상적으로 숭고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 절대 권력이 곧 악인지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불을 훔치고 신을 속인 자에게 최고신이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프로메테우스가 정말로 인간들을 사랑해서 그랬다면, 제우스에게 진심을 말하고 사후에라도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반골기질에 대한 허영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튀폰을 측은하게 여기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일백 개의 머리를 가진 무시무시한 괴물인 사나운
튀폰이 힘에 의해 제압되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소. 그자는 모든 신들과 맞섰고,

프로메테우스의 허영과 비합리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튀폰은 괴물 중의 괴물로 진부화의 상징이다. 올륌포스의 신들이 도망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지만 제우스는 결국 튀폰을 이겼다. 이는 영이 진부화를 이겨냈음을 상징한다. 그런 튀폰이 모든 신들과 맞섰다는 이유로 그를 측은하게 여겼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저항 자체를 맹목적으로 추구함을 드러낸다. 악에 맞서는 저항은 필요하지만, 악이 아닌 권력에 대한 맹목적 저항은 허영을 불러올 수 있다.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 번째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최고신 제우스보다 더 낫다는 교만한 태도를 갖고 있다. 이는 제우스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제우스를 몰아낼 것이라는, 제우스의 운명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 자신도 모르는 운명을 프로메테우스가 알고 있으니, 교만한 태도를 보일 만도 하다. 그는 이전에 티탄 신족에게 ‘힘이나 폭력에 의해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략이 뛰어난 자들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는 프로메테우스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그에게 제우스는 폭군이며, 자신은 제우스보다 지략이 뛰어난 자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 자신도 모르는 운명을 알고 있으면 무얼 하는가. 결국에 승리하게 되면 무얼 하는가. 적의에 찬 마음으로 뜻을 굽히지 않으며 오랜 세월 고통받은 후 결국 제우스에게 그의 운명을 말해주고 풀려나면, 그게 승리하는 것인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교만이 낳은 고통이었다.

자신의 하루살이들을 사랑한, 창조주 프로메테우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히브리 신화의 사탄,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엔키와 비슷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라는 절대 권력에 저항했고, 사탄은 하나님이라는 절대 권력에 저항했으며, 엔키는 엔릴이라는 절대 권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사탄이 히브리 신화에서 절대악으로 그려지고, 엔키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들의 선한 창조주로 그려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프로메테우스는 절대악도, 선도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양면적으로 그려진다. 허영과 교만을 갖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피조물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앞을 내다보고도 의도적으로 잘못했고, 자신의 불행 때문에 남이 피해를 입길 원하지 않는,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존재였으며, 비록 맹목적이라 해도 고통 앞에서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꺾지 않았다. 이런 인물을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의 뜻은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고 했다. 그는 앞을 내다보고도 의도적으로 잘못했다.

사실 나는 그대가 말한 것을 다 알고 있었소.
나는 의도적으로 잘못했고, 그랬음을 부인하지 않겠소.
인간들을 도와줌으로써 나는 고난을 자초했소.

앞을 내다보고서도 인간을 사랑하여 그 모든 고난을 자초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피조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이오와의 만남에서 잘 드러난다.

이오는 헤라의 미움을 사 쇠파리에 쫓기며 방랑하고 있다. 그러다가 프로메테우스가 묶인 카우카소스 산까지 온다.

이오
그대는 이 쇠뿔 달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세요?

프로메테우스
내 어찌 쇠파리에 쫓기는 소녀인,
이나코스의 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겠소?

너무 가슴 아픈 대목이다. 창조주가 어찌 피조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겠는가. 창조주가 어찌 피조물의 고통을 모를 수 있겠는가. 피조물의 고통은 곧 창조주의 고통이다.

오케아노스의 딸들이 이오에게 그녀의 불행을 말해달라고 했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듣는 이들로부터 동정의 눈물을 거둬들일 수 있는
장소에서 자신의 불행을 실컷 울고 슬퍼하는 것은
역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겠소.

동정의 눈물을 거둬들이는 것은 고통받는 인간의 창조주다. 그는 자신의 딸에게 너의 고통을 모두 말하라고,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학교 갔다 와서 울고 있으면 무슨 일 있었냐고, 다 말해보라는 아버지의 모습 같다.

이오가 자신에게 있었던 불행을 모두 말하자 코로스가 이렇게 말한다. ‘아아, 그만두세요. 슬프도다! 내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이런 망측한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리리라고는.’ 이오의 이야기는 ‘망측한’ 이야기다. 제우스가 그녀에게 욕정을 품었고, 그녀 자신도 밤마다 제우스와 교합하라는 목소리를 듣고 환영을 본다. 이는 그녀 역시 세속적 욕망에 의해 타락했음을 뜻한다. 그러니 욕망의 정화를 상징하는 헤라 여신이 이오에게 벌을 주는 건 당연하고, 이오의 이야기가 망측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그렇지 않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적의를 품고 있고 헤라는 이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 이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안타까운 딸이며, 둘은 동지이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딸에게 선물을 주려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이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희망이다. 이 고통에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는 희망.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에게 앞으로도 많은 고통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코로스장
아니, 이 여인이 당해야 할 고통이 아직도 남았단 말예요?

프로메테우스
파멸과 고통의 겨울 바다가 아직 남아 있소.

이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지요?
왜 나는 어서 이 가파른 바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땅바닥에 박살난 채 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날마다 고통당하며 평생을 사느니
단번에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낫잖아요.

자식이 부모에게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 제게 남은 것이 고통뿐인 삶이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나요?’ 이 말을 듣는 부모의 가슴이 어찌 미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고 배우자와 토론할 때 배우자가 말해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었다고.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에게 제우스가 권좌에서 축출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이오의 자손들 중 한 명(헤라클레스)이 프로메테우스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오가 무가치하지 않음을 알려주었고, 이오가 가야 할 길을 상세하게 알려줌으로써 그녀에게 목적의식을 심어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이 작품이 진정 가슴 아리는 비극으로 다가왔다. 삶이 고통뿐이라면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자식에게 너는 무가치하지 않다고 말하며 희망을 주는 아버지의 모습. 자신의 피조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창조주의 모습이다.

인간을 이토록 사랑해서 불을 훔치고 신을 속이게 한 창조주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프로메테우스는 또한 자신의 불행 때문에 다른 이가 피해 입기를 원하지 않았다. 강의 신인 오케아노스는 프로메테우스 대신 제우스에게 호소하려고 한다. 그러자 프로메테우스는 그를 만류하며 말한다.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그 때문에 되도록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결국 그의 희망대로 오케아노스는 뜻을 굽힌다.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선택과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비록 맹목적이라고 해도 고통 앞에서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꺾지 않았다. 그게 아집이라고 해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슬에서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기는커녕 자신은 ‘지금의 이 불행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인물도 없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러한 점이 곧 인간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절대악도 아니고 절대선도 아닌 이 프로메테우스는 오만하고 교활하지만 동시에 인간적이고 숭고한 면이 있다. 그래서 그를 동정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인간성의 상징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빚었다. 그러니 인간은 프로메테우스를 닮았을 수밖에 없다.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지성을 가졌다는 데서 오는 허영심, 초의식이 결여된 채 교활하게 사용하는 지성, 맹목적 투쟁에 대한 허황된 자부심, 자신이 틀린 걸 알아도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 끝까지 부리고 마는 아집. 이게 프로메테우스를 닮은 우리 인간들의 교만한 모습이다.

동시에 피조물을 창조하고, 누가 뭐래도 그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심어놓은 맹목적 희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누가 틀렸다고 주장한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틀렸다 한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저항하고 그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엔키도, 히브리 신화의 사탄도,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도, 모두 인간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반골 기질이 심한 나는 이들의 저항, 고집 모두 사랑한다. 이러한 고집이 우주 어딘가에서 인간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살아갈 고등 생명체보다,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다. 자신의 불행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라고 말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숭고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