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스포일러 있음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순서

아이스퀼로스는 생전 90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7편이다. 7편은 고대에 교과서에 실려 전해질 수 있었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현대까지 전해지는 7편 중 하나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운율이나 문체 등이 아이스퀼로스의 다른 작품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프로메테우스가 절대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이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며, 프로메테우스의 개인적인 주장으로 나타난다. 다른 해석은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벌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고 계속 오만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작품에 드러나는 (오케아노스의 딸들로 구성된) 코로스의 말이나 이오와의 대화에 깃든 상징이 전부 해석 가능하다. 표면적인 이야기만 읽으면 프로메테우스와 이오는 오히려 제우스의 폭거에 의한 피해자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제우스를 사악한 폭군처럼 여겼을 리가 없다. 그것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면적인 해석을 뛰어넘어, 그 아래 숨겨진 상징들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상반되는 두 가지 해석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러고 나면 사탄 숭배와 같은 이해 불가능한 종교도 이해가 될 것이다.

배경지식

프로메테우스는 티탄 족이지만, 티탄 족과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뒤로 물러나 제우스 편을 들었다. 오케아노스나 테미스, 스튁스,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등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 신족에게 이 전쟁은 힘이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략이 뛰어난 자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나 티탄 신족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이름의 뜻인 ‘앞을 내다보는 자’인 만큼 미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동생 에피메테우스를 데리고 제우스의 편에 붙은 것이다.

제우스는 그래서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 티탄 신족을 타르타로스에 가뒀지만,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물을 둘로 나눠 하나는 신을 위해 바치게 하고, 하나는 인간이 취하게 했다. 하나는 뼈와 기름만 있는 것을 잘 포장해서 맛있게 보이도록 했고, 다른 하나는 살코기가 많은 것을 소가죽으로 싸 맛이 없어 보이도록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살코기가 많은 부분이 인간들에게 가길 원했던 것이다. 제우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뼈와 기름이 있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도록 저주를 내리고, 불을 빼앗았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회향풀에 불을 붙여 훔쳐내서 인간들에게 다시 갖다주고, 지혜를 주었다. 제우스는 이에 분노해서 헤파이스토스에게 명령해 프로메테우스를 카우카소스 산(캅카스 산맥,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있는 바위에 매달도록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물과 흙으로 인간들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감춰두었던 불을 인간들에게 주었다. 제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헤파이스토스에게 그의 몸뚱이를 스퀴티스 땅에 있는 카우카소스 산에다 꽁꽁 묶어놓도록 명령했다.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1.7.1 중

프로메테우스는 기꺼이 큰 황소 한 마리를 잘라 나누어 제우스의 마음을 속이려고 그분 앞에 내놓았다. 그분 앞에 그는 살코기와 기름기 많은 내장을 소의 위로 덮은 다음 소가죽에 싸서 내놓았고, 한편 인간들을 위해서는 흰 소뼈들을 쌓은 다음 그것을 반짝반짝 빛나는 기름 조각으로 교묘히 쌌다. 그때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아페토스의 아들이여, 모든 통치자들 가운데 걸출한 자여, 이봐요, 그대는 얼마나 불공평하게 몫을 나누었는가!”
(…)
“제우스여, 영생하는 신들 중에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위대한 분이여, 둘 중 어느 것이든 그대 가슴속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고르십시오!”
이렇게 그는 음흉한 마음에서 말했다. 그러나 불멸의 계략을 알고 계시는 제우스께서는 계략을 알아채셨고 모르지 않으셨다.
(…)
그리고 그 이후로 그분께서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화를 내시며 지상의 집에서 살고 있는 필멸의 인간들을 위해 물푸레나무들에게 지칠 줄 모르는 불의 힘을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아페토스의 빼어난 아들은 그분을 속이고는 속이 빈 회향풀 줄기 속에다 감춰 지칠 줄 모르는 불의 멀리 보는 화광을 훔쳐냈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535–569행

이에 관해서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521–569행,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 47–59행,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1.7.1을 참고하면 좋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이오가 등장한다. 쇠파리에게 쏘이며 도망다니며 방랑하다가 프로메테우스가 있는 카우카소스 산까지 온 것이다. 이오는 원래 요정이자 헤라 신전의 여사제였는데 제우스가 그에게 욕정을 품어 그녀와 교합하려 한다. 그래서 제우스는 검은 먹구름으로 변신해 헤라의 눈을 피해 그녀와 교합하려 한다. 하지만 눈치 빠른 헤라가 먹구름을 보고 수상해 제우스와 이오에게 다가온다. 제우스는 이오를 일단 급한대로 암소로 변신시키지만, 헤라는 이를 알아채고 제우스에게 이 암소를 달라고 한다.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암소로 변한 이오를 헤라에게 준다. 헤라는 눈이 백 개가 달린 괴물 아르고스에게 이오를 묶어두고 감시하게 한다. 하지만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아르고스를 죽이고, 이오를 구해주게 한다. 헤라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아르고스의 눈을 공작새의 깃털에 심어 그를 기리고, 쇠파리를 보내 이오를 쫓아가게 한다. 이오는 그런 연유로 방랑하고 있던 것이다.

어느 날 윱피테르(제우스)가 아버지의 강에서 돌아오는 이오를 보고 말했다.
“윱피테르에게나 어울릴 소녀여, 그대는 자신의 잠자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게 되어 있거늘, 우거진 숲 그늘로 들어가도록 하라.”
(…)
신은 넓은 땅을 먹구름으로 뒤덮은 뒤 도망치는 소녀를 붙잡아 소녀의 정조를 차지했다.
그사이 유노(헤라)는 들판 한가운데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구름이 밝은 대낮에 밤의 어둠을 자아내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다.
(…)
유노는 당장 분노에 불탔고 복수를 뒤로 미루지 않았으니, 아르고스 출신 시앗(*남편의 후첩)의 눈과 마음 앞에다 공포를 안겨주는 복수의 여신을 세우고 가슴속에는 광기의 가시 막대기를 심어 온 세상을 도망 다니게 했던 것이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588–727행 중

제우스는 헤라의 여사제로 있던 이오를 유혹하다가 헤라에게 들키자 이오를 어루만져 흰 암소로 변하게 한 다음 자기는 그녀와 교합한 적이 없다고 맹세했다.
(…)
그래서 헤르메스는 ‘아르고스의 살해자’라고 불렸다. 그 뒤 헤라가 쇠파리를 보내 암소를 괴롭히자 암소는 먼저 그녀의 이름에서 따와 이오니오스 만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갔다.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2.1.3 중

이에 관해서는 아폴로도르스의 『비블리오테케』 2.1.3,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1권 568–746행을 참고하면 좋다.

본작 내용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헤파이스토스가 바위에 묶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형벌을 받고 있는 그의 비탄을 들으러 오케아노스의 딸들(요정들)이 그에게 온다. 오케아노스의 딸들은 코로스로 등장한다. 오케아노스도 프로메테우스를 도우러 오지만, 프로메테우스가 마음만 받겠다고 하고 오케아노스를 돌려보낸다. 그러다가 방랑하던 이오가 도착하고 이오는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누군지 모르지만 도와주러 온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쇠파리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도와주러 오는 이오를 위해 이오의 미래에 대해 말해준다. 그 미래는 이오가 가야 할 곳과, 가서 나라를 세우고 수많은 영웅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후손들 중 한 명(헤라클레스)이 프로메테우스를 풀어줄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리고 제우스가 이전 세대의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될 것이라는 예언도 한다. 이를 제우스가 하늘에서 듣고 그 비밀이 무엇인지 헤르메스에게 알아오라고 한다. 하지만 헤르메스의 회유에도 프로메테우스는 그 비밀에 관해 입을 열지 않고, 결국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벼락이 내리치고 바위가 그를 깔고 앉아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먹히게 되는 형벌이 더해진다.

첫 번째 해석: 인본주의의 핵심은 희망이다.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절대권력에 저항한 자유를 향한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지성의 상징이기도 하며, 인간들을 창조한 창조주이다.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해 제물 중 살코기를 취하게 하고, 불을 훔쳐서 나눠주다가 제우스에게 벌을 받게 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프로메테우스는 인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수많은 예술 작품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저질렀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말고, 살코기를 인간이 취하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제우스가 빼앗아간 불을 나눠줬다. 불은 인간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게 했다. 그러므로 사회화를 이루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또한, 사체의 뼈에 붙은 살점이나 겨우 발라먹던 인간이 고기를 불에 구워먹을 수 있게 됨으로써 단백질이나 지방과 같은 영양분을 훨씬 잘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앞을 내다보는 자, 즉 미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제물을 속여바치고, 불을 훔치면서도 자신이 받게 될 벌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해서 그 모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자신이 벌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인간을 위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는 ‘희생’이라고 부른다.

힘: (…) 그자는 그대의 꽃을,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불의 광채를 훔쳐내 필멸의 인간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오. 그 죗값으로 그자는 신들에게 벌 받아 마땅하오. 그래야만 그자는 제우스의 통치에 순응하여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를 버리는 법을 배우게 될 테니까요.
(…)
헤파이스토스: (…) 이것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는 그대의 태도가 그대에게 가져다준 결실이오. 그대는 자신이 신이면서도 신들의 노여움 앞에 움츠러들지 않고 인간들에게 과분한 명예를 주었소.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6–30행

프로메테우스: 그렇다면 보시구려. 사슬에 묶인 이 불행한 신을,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되고, 제우스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모든 신들에게 미움 받는 이 모습을!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20–123행

헤파이스토스의 특권인 불은 도구를 상징한다. 대장간의 불은 불순물이 섞인 금속을 제련할 수 있게 해주고, 청동과 철을 이용한 각종 도구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인 이 도구들을 이용해 곡식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따지자면 불을 사용할 수 있었던 능력 덕분에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은 불로 쟁기 등을 만들어 동물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농업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힘과 폭력은 헤파이스토스와 함께 다닌다. 힘과 폭력은 왜 헤파이스토스와 함께 다닐까? 청동과 철기를 제련한 인간은 검과 창을 만들어 다른 종족을 정복할 수 있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원시 인간은 도구를 쓸 수 있게 됨으로써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도구의 사용은 곧 힘과 폭력이다. 폭력과 압도적인 힘도 불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헤파이스토스는 왜 프로메테우스를 동정하는 것일까? 헤파이스토스는 도구를 이용할 줄 아는 지성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도 인간을 위한 지성이니 헤파이스토스는 자신과 사실상 같은 존재인 프로메테우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다. 둘의 차이라면 프로메테우스는 절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헤파이스토스는 절대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힘: 자, 자! 그대는 왜 꾸물대며 쓸데없이 동정을 보이는 게요? 그대는 왜 신들에게 미움 받는 신을 미워하지 않는 게요? 그자(프로메테우스)는 그대(헤파이스토스)의 특권을 인간들에게 내주지 않았던가요?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36–38행

프로메테우스: (…) 인간들에게 큰 특권을 선물한 까닭에 나는 이런 고통의 멍에를 지고 있는 거야. 나는 회향풀 줄기에 싸서 불의 원천을 훔쳐냈는데, 인간들에게 그것은 온갖 기술의 교사가 되고 큰 도움이 되었지. 그런 죄를 지은 까닭에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어. 노천에서 사슬에 꽁꽁 묶인 채.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8–113행

프로메테우스: (…) 허풍선이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자면, 인간들의 모든 기술은 프로메테우스가 준 것이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504–506행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인간들에게 온갖 기술을 전파했다고 주장한다. 지각없이 아무 것이나 해치웠던 인간들에게 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천문학, 수학, 문자, 문자를 통한 기억, 기억을 통한 예술의 영감을 전달했다. 또한, 들짐승들을 부릴 수 있는 힘, 항해술, 의학, 점성술, 제련술을 알려주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대사는 이 작품에서 정말 명대사이다. 이 지식들은 모두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불은 원래 신에게 속한 것이었다.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들이 불을 내려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제우스가 벼락을 내려 불을 내려주면, 인간은 신이 준 불을 꺼지지 않도록 소중히 이어와야 했다. 안 그러면 신이 다음 번에 불을 내려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 역사처럼 말이다. 인간은 140만 년 전부터 불을 썼지만, 화로를 써서 불을 스스로 피울 수 있게 된 것은 25만 년 전이다. 그 사이의 115만 년 동안은 번개나 화산, 자연적인 산불을 통해 불이 생기길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줌으로써 인간은 신들처럼 되었다. 인간은 신이 불을 내려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고, 스스로 불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신을 더이상 찾을 필요가 없어졌고, 인간이 신처럼 되기를 꿈꿨다.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절대권력인 제우스에게 항거한 것처럼 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준 것은 사회화, 요리, 도구, 힘을 준 것과도 같다. 또한 온갖 지성을 준 것과도 같다. 단 하나만 빼고 말이다. 바로 자신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미래를 보는 능력 대신 더욱 좋은 것을 준다.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프로메테우스가 준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이다. 힘과 폭력보다 희망이 더 좋은 것이다. 희망은 지성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한다. 또한, 희망 덕분에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절대권력에 대항하게 만든다. 만약 인간이 합리적으로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절대권력에 대한 항거는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에서 주인공이 희망 때문에 폭력에 대항하는 연설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이 프로메테우스의 인본주의,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그 핵심 비결은 바로 희망이다. 희망이 바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프로메테우스: 그래요. 나는 인간들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하게 했지요.
코로스장: 그 병에 대해 그대는 어떤 약을 발견하셨지요?
프로메테우스: 그들의 마음속에 맹목적인 희망을 심어놓았지요.
코로스장: 그대는 인간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네요.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248–251행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지성을 선물해준 은인이자 창조주이고, 절대 권력에 항거하는 자유의 상징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엔키와 같은 존재이다. 엔키도 여신 닌후르쌍과 함께 인간을 만들고,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했다. 그래서 인간을 싫어하는 엔릴이 대홍수를 내릴 때 엔키는 우트나피쉬팀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귀띔을 해준 것이다. 이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아들 데우칼리온에게 대홍수를 피하라고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프로메테우스는 엔키와 같은 존재이다.

아이스퀼로스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제우스가 정의로운 신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제우스가 가혹한 폭군으로 그려진다.

헤파이스토스: (…) 제우스의 마음은 달래기 어려우니까요. 새로 권력을 쥔 자는 누구든 가혹한 법이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34–35행

코로스 (우1): 새로운 키잡이들이 올륌포스를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죠. 제우스는 법도를 무시한 채 새 법에 따라 통치하며, 전에 강력했던 것을 지금 말살하고 있어요.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49–152행

코로스 (좌1): 제우스가 자의적인 법에 따라 이렇듯 아무 제약 없이 통치하며 옛 신들에게 오만한 창끝을 보이다니요.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03–405행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폭군이자, 절대권력에 항거하는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절대 권력에 항거하는 장면들을 보자.

프로메테우스: 그래서 오만한 자에게는 오만하게 대해야 하는 법이지.
(…)
프로메테우스: 간단히 말해, 내 선행을 부당하게도 악으로 갚는 모든 신들을 나는 증오한다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970–976행

프로메테우스: (…) 내가 제우스의 의도에 겁을 먹고는 마음이 약해져 내가 몹시 미워하는 자에게 여자처럼 두 손을 들고 이 사슬에서 나를 풀어달라고 애원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말게. 나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02–1006행

프로메테우스가 절대권력에 항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갖고 있는 희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그가 미래를 봤기 때문이다. 제우스도 우라노스나 크로노스처럼 자식에 의해 축출되는 미래를 봤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그것 때문에 자신이 현재 고통을 겪으면서도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미래는 제우스가 자신과 협력하거나, 협력하지 않아 제우스가 축출되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현재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절대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오: 그는 아내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나요?
프로메테우스: 그래요. 그녀는 아버지보다 더 강한 아들을 낳게될 것이오.
이오: 그에게 이런 운명을 막을 방도는 없나요?
프로메테우스: 없어요, 내가 이 사슬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767–770행

그러면 이 작품에서 이오는 왜 등장하는 것일까? 이오는 프로메테우스와 본질적으로 같은 입장이다. 신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둘 다 신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오는 인간이고, 프로메테우스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신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것 중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희망이었다. 이오는 절대권력 앞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오는 삶이 고통스럽다면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피조물이 신 때문에 자신처럼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있다.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심정 말이다.

이오: (…) 아아, 신들에게 미움 받는 자들 가운데 누가 나처럼 이렇게 고통 받았지요?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602–604행

코로스장: 아니, 이 여인이 당해야 할 고통이 아직도 남았단 말예요?
프로메테우스: 파멸과 고통의 겨울 바다가 아직 남아 있소.
이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지요? 왜 나는 어서 이 가파른 바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땅바닥에 박살난 채 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날마다 고통당하며 평생을 사느니 단번에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낫잖아요.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747–751행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마치 인간에게 희망을 선물했듯이,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세 가지 희망을 준다. 하나는 이오가 싫어하는 남편 제우스가 축출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오: 하지만 제우스가 원치 않는다면 누가 그대를 풀어주겠어요?
프로메테우스: 그대의 자손들 가운데 한 명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소.
이오: 뭐라고요? 내 자식이 그대를 불행에서 구해준다고요?
프로메테우스: 그렇소. 십하고도 삼 세손이.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771–774행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이오에게 주는 두 번째 희망은 그녀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희망이다. 고통 받는 인간 주제라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이야기했던 이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인간이 절대권력에게 억압 받는 신인 존재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신을 구원하다니! 그리고 그녀가 그런 영웅의 조상이 될 것이라니! 그 영웅은 헤라클레스이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영화에 이르러 신들과 같이 된 유일한 인물이자,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남은 고통을 견딜 이유가 충분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여기에 더해 그녀에게 한 가지 희망을 더 선물로 준다.

1-1.-이오-가계도

그림 1. 이오에서부터 헤라클레스까지의 가계도,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2.1–2.4 참고

프로메테우스: 그 강은 네일로스 강의 세모난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줄 것인데, 그곳에서, 이오여, 그대는 자신과 자손들을 위해 머나먼 식민지를 발견하도록 정해져 있소.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813–815행

프로메테우스가 이오에게 주는 세 번째 희망은 방랑하는 그녀가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짚어주는 것이다. 희망은 살아갈 이유이다. 목표 또한 희망 중 하나이다. 방랑의 종말, 목표, 정착 이것들은 모두 희망이며, 살아갈 이유이다.

1-2.-이오-방랑-경로

그림 2. 이오가 방랑하며 이동한 경로, 카우카소스 산에 들른 뒤 아이귑토스로 간다.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에게 선물로 주는 세 가지 희망은 이것이다.

첫째,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폭군은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고, 자유를 찾는 인간은 자유를 찾게 될 것이다. 고통이 삶을 유린하더라도, 고통은 언젠가 반드시 끝날 것이다. 그러니 삶의 투지를 벼리도록 하여라.

둘째,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다. 현재 고통받고 있는 인간이더라도 삶의 의미가 있다. 그 인간은 언젠가 인간들을 구원하고, 신들을 구원하게 될 존재이다. 구원이 필요한 존재는 나중에 다른 존재를 구원하게 된다.

셋째, 목표이다. 방랑을 멈추고 정착해야 할 곳. 그 정확한 목표를 앎으로써 인간은 살아갈 이유가 충분해진다. 목표는 삶의 이유 중 하나이다. 고통받는 삶이더라도 목표가 있다면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므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희망에 대한 노래인 것이다.

코로스 (우1):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확신과 희망을 갖고 명대로 살아가며 밝고 명랑한 가운데 마음을 기른다면!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537–539행

두 번째 해석: 타락한 지성인 프로메테우스는 히브리 신화의 사탄이다.

그리스 신화가 칼 구스타프 융, 조지프 캠벨, 폴 디엘 등이 말한 것처럼 한 인간 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이 상징화된 것이라면, 제우스는 도덕 의식, 즉 초의식이요. 신성한 영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지성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창세 신화는 인간 심리의 발달 과정을 의미한다. 우라노스는 동물적 의식으로써 무의식을 의미한다. 크로노스와 티탄 족은 억압된 세속적 욕망인 잠재의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타르타로스(심연) 깊은 곳에 가둬져 있다. 억압되어 있는 것이다. 제우스는 신성한 초의식을 의미한다.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는 잠재의식인 티탄 족뿐만 아니라 지성으로 상징되는 존재들도 나왔다. 물론 티탄보다 더 이후에 나왔다. 잠재의식 다음에 의식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헤카톤케이레스, 퀴클롭스들이다. 지성은 올바르게 사용될 수도 있고, 잘못 사용될 수도 있다. 초의식이 없이는 지성은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된다. 이것이 타락한 지성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이 세속적 욕망이라면 도둑질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지성이다. 지성은 도덕적 고려는 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반면 지성은 초의식의 명령에 따라 그에 협조함으로써 올바르게 사용될 수도 있다. 퀴클롭스들은 제우스에게 천둥, 벼락, 전광의 무기를 만들어주었다. 헤파이스토스가 대장장이이며, 도구를 만드는 지성의 상징이듯 퀴클롭스도 똑같은 상징인 것이다. 퀴클롭스들은 제우스에게 협조했다. 헤카톤케이레스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티탄 신족과의 전쟁에서 제우스의 편을 들었다. 이후에 헤카톤케이레스들은 타르타로스에서 티탄 신족이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초의식에 협조하며 올바르게 사용되는 지성은 바로 지혜와 이성을 말한다. 이성은 억압된 세속적 욕망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지성은 영리함이고, 이렇게 타락할 수도, 올바르게 사용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영리함’이라 부르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설정한 목표에 이르는 행위를 행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이다. 목표가 고매하면 영리함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목표가 나쁘면 영리함은 악랄함이다. 그런 까닭에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도 악랄한 사람도 영리하다는 말을 듣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44a24–28(제6권 「지적 미덕」 12장)

불도 지성을 상징한다. 제우스가 사용하는 벼락도 불을 동반하므로, 벼락은 올바른 지성을 의미한다. 지성은 초의식에 협조할 때 힘이 된다. 올림포스 신전에 있는 불도 신성한 초의식에 협조하는 지성을 나타낸다. 오래타는 물푸레나무의 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신성한 불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속이 빈 회향풀에 불을 옮겨 인간들에게 전해준다. 속이 빈, 마른 회향풀에 붙은 불은 더 이상 신성한 불이 아니다. 이것은 타락한 불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더 이상 신을 찾지 않게 만든다. 사람들은 풍족하게 살게 되었고, 삶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진부화’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행위는 초의식의 신성한 행위이자 인간 고유의 발전 의지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의미에 대한 고뇌는 세속적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풍족한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탐하기만 하다가 발전 의지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고찰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초의식에 협조하지 않는 프로메테우스는 타락한 지성을 상징한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표면적으로 보면 폭군 제우스에 저항하는 자유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작품이 쓰여진 당대에 제우스는 최고신이었다. 신성모독은 추방이나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죄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작가가 진짜로 제우스를 폭군으로 여겨 제우스를 폭군으로 그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성모독으로 여겨질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그려지는 제우스의 폭군 이미지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의 주장인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와 그에게 공감하는 코로스, 요정들의 주장일 뿐이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세속적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겠다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낸다. 번제는 가장 맛있는 부위, 또는 첫 번째로 수확한 곡물이나 고기를 자신이 취하지 않고 신에게 바치는 행위이다. 그래서 어떤 신화에서는 가장 잘 수확된 곡물이나 고기를 바치고, 어떤 신화에서는 가장 첫 번째로 수확한 곡물이나 첫째 가축을 신에게 바친다. 어느 쪽이든 욕심을 버리겠다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제물 중 신에게는 빈 껍데기만 바치고, 살코기는 인간이 먹게 하였다. 지성이 초의식을 속이고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초의식은 속지 않는다. 죄책감이 지성을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속는 것은 초의식이 속았다고 생각하는 지성 자신이다.

잘못된 지성이 받게 되는 벌을 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쇠사슬로 땅에 묶인다. 땅은 세속적 욕망을 상징한다. 초의식과의 화해 없이는 타락한 지성은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독수리가 매일 와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는다. 독수리는 죄 의식을 의미한다. 타락한 지성은 계속해서 죄책감에 쪼아먹히는 것이다. 죄책감이 멈추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죄를 뉘우치거나, 아니면 그대로 방치해서 영혼의 죽음에 이르거나.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인간에게 속한 것, 인간의 욕망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다음 대사들을 다시 한 번 보자.

힘: (…) 그자는 그대의 꽃을,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불의 광채를 훔쳐내 필멸의 인간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오. 그 죗값으로 그자는 신들에게 벌 받아 마땅하오. 그래야만 그자는 제우스의 통치에 순응하여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를 버리는 법을 배우게 될 테니까요.
(…)
헤파이스토스: (…) 이것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는 그대의 태도가 그대에게 가져다준 결실이오. 그대는 자신이 신이면서도 신들의 노여움 앞에 움츠러들지 않고 인간들에게 과분한 명예를 주었소.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6–30행

이 대사의 ‘인간’들을 ‘인간의 욕망’ 또는 ‘세속적 욕망’으로 바꿔 읽으면 제우스의 신성함과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려지는 처벌이 모두 이해가 간다.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받아서 세속적 욕망을 사랑하는 태도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세속적 욕망을 사랑하는 태도 때문에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

프로메테우스: 그렇다면 보시구려. 사슬에 묶인 이 불행한 신을,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되고, 제우스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모든 신들에게 미움 받는 이 모습을!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20–123행

세속적 욕망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된 것이고, 모든 신들에게 미움 받게 된 것이다. 그가 받은 벌을 좀 더 자세히 보자.

힘: 그렇다면 어서 여기 이자에게 사슬을 두르시오.
(…)
힘: 그자의 손에 그것을 채우고는 망치를 힘껏 휘둘러 바위에 그자를 꽁꽁 붙들어 매시구려!
(…)
힘: 더 세게 치시오. 바짝 죄시오. 한군데도 느슨해서는 아니 되오. 그자는 교활해 어떤 궁지에서도 빠져나갈 길을 찾아낼 테니까요.
(…)
힘: 이번에는 강철 쐐기의 무자비한 이빨을 그자 가슴에 힘껏 두들겨 박으시오.
(…)
힘: (…) 그대는 아래로 내려와 그자의 양다리에 쇠고리를 채우시오.
(…)
힘: 이번에는 구멍 뚫린 족쇄들을 힘껏 쳐서 고정시키시오.
(…)
힘: 이제는 여기서 오만불손하게도 신들의 특권들을 훔쳐내어 그대의 하루살이들에게 줘보시지. 필멸의 인간들이 어떻게 그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까? 신들이 그대를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고 부르는 건 잘못되었소. 이 정교한 그물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그대 스스로 ‘사전 생각’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53–87행

프로메테우스는 세속적 욕망인 땅, 바위에 손과 다리가 꼼짝 못하도록 쇠사슬에 묶인다.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은 그가 더 이상 지혜롭지 않다는 뜻이고, 발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는 한 초의식의 부름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슴에 쐐기가 박힌 것은 중요하게 봐야 한다. 쐐기가 박힌 것은 죄의식을 의미한다. 쐐기가 박힌 채로 오래 있으면 영혼은 죽고 죄의식을 못 느끼게 된다.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신경증적 도착을 의미한다. 한 인간의 심리라면 폭풍이 몰아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도 프로메테우스는 반성하지 않는다. 도둑질은 그가 한 것인데도 그의 오만한 태도는 계속 이어진다. 오히려 신들을 원망한다. 잘못된 지성은 사태의 원인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인은 외부로 돌린다. 신성한 영화의 상징인 헤라클레스가 와서 초의식과 타락한 지성을 화해시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헤라클레스는 진부화를 극복한 인간이다. 그는 신의 무기인 태양의 활로 독수리를 쏘아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구해준다. 진정한 뉘우침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케아노스: (…) 하지만 오만불손하게 큰소리쳤다가 이런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소, 프로메테우스여! 그대는 여전히 고분고분하지 않고, 불행 앞에서 물러서기는커녕 지금의 불행에 다른 불행을 보태려 하고 있소.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318–321행

프로메테우스: (…) 사실 따지고 보면 새 신들에게 특권을 나눠준 것은 내가 아니고 누구란 말이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39–440행

바위에 결박되어 있는 동안에도 그의 오만은 멈출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오는 무엇을 상징할까? 이오는 세속적 욕망을 상징한다. 이오는 타락한 영과 결합하려고 했다. 제우스는 일반적으로 신성한 영이지만, 제우스가 이오를 유혹할 때에는 타락한 영의 형태인 검은 먹구름으로 나타난다. 타락한 영은 허영이며, 허영은 어둠에게서 나온 것이다.

신은 넓은 땅을 먹구름으로 뒤덮은 뒤 도망치는 소녀를 붙잡아 소녀의 정조를 차지했다.
그사이 유노(헤라)는 들판 한가운데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구름이 밝은 대낮에 밤의 어둠을 자아내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588–727행 중

이오는 원래 헤라를 섬기는 여사제이다. 헤라는 무슨 신인가? 성욕이나 육체적 쾌락을 영혼의 결합이나 사랑을 통한 가정의 형성으로 승화시키는 여신이다. 그러므로 헤라는 승화의 상징이다. 욕망을 초의식과 올바르게 조화시켜 승화시키는 상징이다. 그런 승화를 섬기는 이오가 허영과 교만의 속삭임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오는 어떻게 변하는가? 소로 변하면서 머리에서 뿔이 난다. 뿔은 허영의 상징이다. 대부분 신화에서 허영의 속삭임으로 나오는 악의 존재들은 뿔이 있다. 이오는 심리적 갈등, 신경증적 도착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도 땅에 묶이게 된다.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묶인 것처럼 말이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가 그녀를 감시한다. 그것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타락한 영이 보낸 헤르메스가 아르고스를 죽인다. 헤르메스는 여기서 타락한 지성을 의미한다. 헤르메스는 일반적으로 제우스의 전령으로 활동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타락한 지성이다. 그래서 그는 속임수나 도둑의 신이기도 하다. 그가 저승인 타르타로스, 온갖 세속적 욕망이 가둬져 있는 곳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헤르메스는 죄의식인 아르고스를 죽인다. 그러나 영혼이 죽지 않는 한 죄를 뉘우치기 전까지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르고스는 그래서 죽어서도 이오를 계속 감시하는 것이다.

이오: (…) 천 개의 눈을 가진 내 감시자인, 대지가 낳은 아르고스의 환영을 보면 나는 겁이 나요. 그자는 음흉한 눈길로 내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고, 죽었는데도 대지는 그자를 감추지 않아요. 오히려 그자는 저승의 사자들 사이에서 솟아올라 가련한 나를 사냥하며 굶주린 나를 바닷가 모래 위로 몰아대지요.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566–573행

쇠파리 또한 이오의 죄책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쇠파리는 아르고스보다는 존재가 작아졌지만, 여전히 성가신 존재이다. 등에와 쇠파리는 일반적으로 죄책감으로 사람을 올바르게 일깨우는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등에에 비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등에 역할을 하라고 신께서 이 도시에 나를 배정하신 것 같습니다. 어디서나 온종일 여러분에게 내려앉아 여러분을 일일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으라고 말입니다. (…)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도 졸다가 깬 사람처럼 짜증이 나서 아뉘토스의 조언에 따라 철썩 쳐서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죽이겠지요. 그러면 신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여 나를 대신할 누군가를 보내주시지 않는 한, 여러분은 잠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입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30e–31a 중

즉, 헤라가 보낸 쇠파리는 이오를 일깨우는 존재이자, 이오 자신의 죄책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오가 자신의 허영과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다가 저지른 죄를 뉘우침으로써 헤라와 화해하지 않는 한 이오는 쇠파리의 습격과 아르고스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이오: 하지만 제우스의 고삐는 의사에 반해 그런 짓을 하도록 아버지를 강요했어요. 그러자 즉시 내 모습과 마음이 일그러졌어요. 보시다시피, 나는 뿔이 달린 채 따끔하게 물어대는 쇠파리에 찔리며 미친 듯이 겅중겅중 뛰어 케르크네이아의 마실 수 있는 물과 레르나 샘으로 달려갔어요. 그러자 대지에서 태어난, 소치는 목자로 성미가 급한 아르고스가 나와 동행하며 수많은 눈으로 내 발자국을 지켜보았아요. 하지만 뜻밖의 죽음이 갑자기 덮쳐 그자의 목숨을 앗아 갔어요. 하지만 나는 신이 보내신 채찍인 쇠파리에 쫓겨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671–682행

만약 신경증적 도착의 상징인 이오와 프로메테우스가 비슷한 처지라면, 이제 프로메테우스의 정체를 알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에게 뿔이 나게 만든 타락한 영과 같은 존재이다. 검은 먹구름이 된 제우스와 같은 존재이다. 그는 이브에게 사과를 권해 신과 같이 되라고 부추긴 뱀과 같은 존재이다. 히브리 신화에서 절대권력에 대항하여 타락한 존재는 무엇인가? 바로 사탄이다.

실제로 사탄 숭배는 사탄이 절대권력에 대항한 첫 번째 존재라는 점에서 많이 이뤄진다. 사탄이라는 존재를 정말로 숭배하는 것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정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자유는 욕망을 마음껏 추구할 자유를 말한다. 사탄은 끊임없이 욕망에 충실하라고 속삭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성함을 읽어내지 못하고 표면적인 이야기만을 읽으면 프로메테우스와 이오는 신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한 피해자처럼 보일 뿐이다. 이오의 뿔이나 쇠파리, 프로메테우스의 사슬 모두 다른 신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이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가 절대권력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이제 정말로 사탄의 오만처럼 보인다.

프로메테우스: (…) 내가 제우스의 의도에 겁을 먹고는 마음이 약해져 내가 몹시 미워하는 자에게 여자처럼 두 손을 들고 이 사슬에서 나를 풀어달라고 애원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말게. 나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02–1006행

프로메테우스: 자네는 낵 겁먹고 새 신들 앞에 굽실댈 줄 알았나? 천만에.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960–961행

헤르메스: (…) 하지만 그대의 거친 행동은 무익한 작전에서 비롯된 것이오. 지혜가 따르지 않는 고집은 그 자체로는 힘이 허약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11–1013행

그의 오만과 허영으로 인해 이제 그는 죄의식의 고통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이오가 쇠파리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땅에 쇠사슬에 묶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땅에 파묻히게 된다. 완전한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영과의 화해 없이는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독수리가 그에게 와서 그의 간을 쪼아 먹는다. 간은 독을 정화하는 기관이다. 그의 정화 능력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헤르메스: 먼저 아버지께서는 이 들쭉날쭉한 암벽을 천둥과 벼락의 화염으로 부수어 그대를 땅속 깊이 묻으실 것인데, 그러면 바위가 팔을 구부려 그대를 껴안게 될 것이오. 긴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대는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오. 그러면 제우스의 날개 달린 개가, 피투성이가 된 독수리가 게걸스럽게 그대의 몸을 큼직큼직한 고깃덩이리로 갈기갈기 찢게 될 것인데, 이 불청객은 날마다 다가와 그대의 까매진 간을 포식하게 될 것이오.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16–1025행

프로메테우스가 사탄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다음 대사가 쐐기를 박듯이 확실하게 만든다.

프로메테우스: (…) 그리고 킬리키아의 동굴에 사는 대지의 아들로 일백 개의 머리를 가진 무시무시한 괴물인 사나운 튀폰이 힘에 의해 제압되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소. 그자는 모든 신들과 맞섰고, 무서운 턱들에서 쉿쉿 소리를 내며 공포를 내뿜었소. 그리고 눈들에서 사납게 노려보는 광채를 발하며 그자는 제우스의 독재통치를 힘으로 무너뜨리려 했소. 하지만 제우스의 깨어 있는 날아다니는 무기가 그자를 덮쳤소. 아래로 떨어지며 화염을 내뿜는 벼락 말이오. 벼락이 그자를 쳐서 큰소리와 호언장담을 제지했소. 그자는 정통으로 심장을 얻어맞았고, 그자의 힘은 벼락에 타 재가 되어버렸소. (…)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353–362행

프로메테우스는 튀폰을 동정하는 자이다. 튀폰은 진부화의 상징이다. 제우스의 무기는 초의식의 부름에 따르는 지성, 즉 지혜와 이성을 말한다. 그래서 제우스의 무기는 ‘깨어 있는 날아다니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사탄이 레비아탄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지성의 상징인 가브리엘에게 머리가 뭉개질 때 아쉬워하듯이 프로메테우스는 튀폰의 패배를 아쉬워한다. 진부화와 타락한 지성과 신경증적 도착은 어떻게든 엮여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학 작품들에서도 사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현혹하며, 온갖 지혜를 주지만, 사실 인간의 영혼을 욕망에 묶어두고 타락시키는 역할을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지혜를 주며 신을 섬기지 말고 욕망에 충실하라고 하는 존재이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말고 살코기를 인간들이 먹으라고 종용하는 점에서 말이다.

신화를 신성함 없이 읽으면 신들은 폭군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양쪽 의견을 모두 들어봐야 객관성에 좀 더 잘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신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생각해보면서 신화를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표면적인 이야기만 읽는다면 그것은 한쪽 의견만 듣고 사건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사탄의 이야기만을 듣고 물질 세계에 예속되어 저주를 받은 사례는 문학에 이미 많지 않은가? 고대인들이 신에게 전지전능의 권력을 부여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저 복종하기 위해 강력한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독립적으로 발생한 신화에서도 모두 인간 마음 속에 있는 신성함과 자연의 생명력을 섬긴다. 그것의 상징인 존재에게 인간은 절대권력을 주는 것이다. 신과 사탄 양쪽의 입장을 모두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 삶은 놀라운 체험과 풍부한 사유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