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숲, 2009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숲, 2009

스포일러 있음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순서

『여인들 목록』은 그냥 ‘목록’으로 불리기도 하고, ‘에호이아이’로 불리기도 한다. 고대에는 헤시오도스의 저작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기원전 6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여인들 목록』의 「단편 215 MW」에는 퀴레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퀴레네는 아프리카의 리뷔에(리비아)에 있는 땅 이름이다. 그런데 이 땅에 퀴레네라는 도시가 세워진 것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이기 때문이다. 반면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8–7세기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가필되었거나, 혹은 『여인들 목록』의 저자가 헤시오도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들의 계보』의 맨 마지막 구절들이 『여인들 목록』의 맨 첫 번째 구절인 만큼 두 작품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여인들 목록』의 저자가 헤시오도스라고 명백히 믿었던만큼 아직 진위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그리스 신화의 소중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여인들 목록』에는 신과 교합하여 영웅들을 낳은 어머니들의 이름이나, 다른 작품에서 소홀히 다뤄지는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내용이 너무 소실되어 알아보기가 어렵다. 『여인들 목록』의 구성 방식은 후에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에서 비슷하게 이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비블리오테케』를 이미 읽은 상태에서 이 책을 접해서 읽기 한결 쉬웠다.

소실된 내용 중 조금 내용이 많이 남아있는 건 트로이 전쟁 전후의 이야기나 아탈란테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여인들 목록』의 개별 사례들은 다른 그리스 비극 작품들이나, 나중에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을 때 참고 자료로써 활용하겠다. 몇 가지 들었던 생각만 짧게 정리하고 넘어가자.

그리스 신화에서 예쁜 여자를 묘사할 때에는 3가지 중 하나 이상의 수식이 따라다닌다. 바로 ‘머릿결이 고운’, ‘볼이 예쁜’, ‘복사뼈가 아름다운’이다. 하나씩 분석해보자.

미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일 수도 있고, 본능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은 거의 없으며 개인적인 취향도 이미 프로그래밍된 본능이 환경에 의해 발현될 뿐이다. 문화적인 미의 기준은 본능적으로 인식하는 미의 기준 위에 덧쓰이는 것이며, 그래서 본능적인 미의 기준과 크게 관련이 없는 문화적 미의 기준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본능적인 미의 기준은 어떤 문화든지 일관성이 있다. 본능적인 미에 대한 기준은 생후 2–3개월의 아기들의 미적 선호에서도 발견된다(심리학자 주디스 랑루아의 실험 참고). 이는 기존에 미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학습되므로 3–4세 이후에 미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기존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연구였다. 나중 연구에서는 서양 매체에 노출된 정도가 미의 기준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심리학자 마이클 커닝햄 연구 참고).

머릿결이 고운 건 왜 미의 기준이었을까? 여성의 머릿결은 여성의 건강을 나타낸다. 실제로 남성들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통계 조사에서도 머릿결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나온다. 심지어 때때로(혹은 거의) 피부의 질보다 머릿결이 미의 기준에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남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의 머릿결을 두 가지로 판단한다. 하나는 모발의 질이고, 하나는 모발의 길이이다. 머리카락이 긴데도 머릿결이 좋은 것은 아주 좋은 건강 상태라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젊음에 대한 신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모발의 질이 안 좋아지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에 이런 미적 선호를 반영한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다.

볼이 예쁜 것은 왜 미의 기준이었을까? 이것은 여성의 배란 주기 중 남성이 특히 배란기의 여성을 선호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배란기에는 피부색이 좀 더 밝아지고, 혈관이 확장되어 홍조가 돈다. 입술도 더욱 빨갛게 된다. 또한, 눈 위는 짙어진다. 화장법은 본능적인 미의 기준이나, 배란기의 여성을 흉내내는 것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 중 수컷들은 당연히 배란기의 암컷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렸던 수컷들이 훨씬 잘 번식했을 것이다. 기회 비용 차원에서 보자면 배란기가 아닌 여성을 따라다니면, 물질적 자원도 잃을 수 있고 번식 기회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볼이 예쁘다는 것은 배란기의 징후가 나타나는 붉은 볼(홍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선호일 수 있고, 여기에 더해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피부 질에 대한 선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복사뼈가 아름다운 것은 왜 미의 기준인지 잘 모르겠다. 이것을 진화심리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상체에 비해 긴 다리의 여성이 선호된다는 것을 엮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다리가 날씬한’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정확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일관되게 복사뼈나 발에 대한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이는 그렇다면 문화적인 것일 수 있고, 혹은 관념적인 것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복사뼈를 하얗게 칠하면 고아라는 표식이었다.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릴 때에도 발목을 뚫고 버렸다(『비블리오테케』 참고). 그렇다면 복사뼈가 아름답다는 것은 집안 내력의 표시였을까? 풍족한 집안 내력은 배우자에 대한 선호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것으로 해석하자면 발은 영혼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복사뼈가 아름답거나, 발이 날씬하다는 것은 순수한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무엇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리스 신화의 문화적인 미의 기준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여인들 목록』은 여인들에 대한 묘사가 많은 만큼 이런 집단 무의식 중 하나인 미적 선호 기준도 반영되어 있다. 그것의 이유를 추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트로이 전쟁에 대한 관념론적인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관념론적으로 바라보면 영웅들의 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트로이 전쟁이라는 대재앙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파리스와 헬레네로부터 시작한 트로이 전쟁은 신성한 초의식과 물질 세계에의 욕망과의 조화를 져버리고, 세속적 욕망을 추구한 결과이다.

헬레네의 구혼자들과 헬레네가 구혼자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자. 구혼자들은 헬레네의 미모만을 보고 온갖 재물을 바친다. 그러면서 헬레네의 육체적 아버지 튄다레오스는 구혼자들에게 신을 증인으로 다음과 같이 맹세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구혼자들에게 그는 믿음직한 맹세를 요구하며
헌주로써 맹세하고 서약하라고 명령했다.
앞으로는 그를 배제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팔이 예쁜
소녀의 결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남자들 가운데
누군가 응보와 염치를 던져버리고 힘으로 그녀를
데려가면 모두 힘을 모아 그자를 추격하여 벌금을 물리라고
튄다레오스는 명령했다. 그러자 구혼자들이 지체 없이 복종했다.
모두들 종국에는 자신이 결혼하게 되기를 바라며 (…)
—헤시오도스, 『여인들 목록』, 「단편 204」, 40–47행

구혼자들은 모두 자신이 결혼하게 되기를 바라며 온갖 재물을 바친다. 영혼의 결합은 상관 없고, 오로지 미모만을 보고 물질로 헬레네를 유혹하는 것이다. 이때 구혼하는 장면은 더욱 가관이다.

머릿결이 고운 헬레네의 남편이 되기를 열망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지는 못해도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
그들은 많은 구혼 선물을 주었으니, 여인의 명성이 컸기 때문이다.
—헤시오도스, 『여인들 목록』, 「단편 199」, 2–9행

이것들을 구혼 선물을 주되 가장 많이 줌으로써 아내를 얻도록
그의 마음이 그를 부추겼으니, 그는 모든 영웅들 중에서
누구도 재산과 선물에서 자기를 능가하지 못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헤시오도스, 『여인들 목록』, 「단편 200」, 7–9행

그들은 헬레네의 미모에 대해 직접 보지도 않고, 남들이 하는 말만을 듣고 재물로 헬레네를 유혹한다. 그들은 영혼의 결합이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정 생활이 아닌, 그저 자신의 우승 트로피로써 헬레네를 원한 것이다. 결국 헬레네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러나 그들 모두를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이겼으니 그가 가장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헤시오도스, 『여인들 목록』, 「단편 204」, 48–49행

구혼자들은 누구도 재산과 선물에서 자기를 능가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재물로써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삶의 가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진부화에 빠진 것이다. 구혼자들은 그렇다면 진부화의 상징이다.

특히 메넬라오스는 티탄적 진부화이다. 아레스 신은 살육을 좋아하는 파괴의 신이다. 그의 형제 아가멤논은 헬레네의 누이인 클뤼타이메스트라를 강제로 취했다. 그녀의 남편과 가족들을 살해하고서 말이다. 둘은 폭군이다. 티탄적 진부화는 지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

헬레네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이다. 그녀는 결국 물질적인 것에 굴복했다. 메넬라오스가 가장 많이 줬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사랑이나 다른 가치는 보지도 않은 것이다. 헬레네는 이브이자, 판도라와 같은 다른 팜므파탈처럼 세속적 욕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헬레네와 메넬라오스의 결혼은 세속적 욕망과 진부화의 결혼이다. 튀폰과 에키드나가 교합하여 온갖 재앙인 괴물들을 낳은 것처럼, 헬레네와 메넬라오스는 큰 재앙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세속적 욕망의 상징인 헬레네는 관습적 진부화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사명이나 삶에 대한 고뇌, 캐물음이 없다. 그저 미모를 통해 원하는 것은 모두 갖고 싶은 욕망이다. 그래서 그녀는 파리스와 함께 도망간다. 파리스의 다른 이름은 알렉산드로스이다. 파리스는 무엇을 의미할까? 『여인들 목록』에 나오진 않지만 다음 일화를 보자.

불화의 여신(에리스)이 헤라와 아테네와 아프로디테 앞에 가장 아름다운 이를 위한 상으로 사과 하나를 던진다. (…) 여신들은 저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헤라는 자기가 모든 여자들보다 선호된다면 만인을 다스리는 왕권을 주겠다고 하였고, 아테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헬레네와의 결혼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는 아프로디테에게 유리하게 판정을 내리고는 페레클로스가 건조한 함선들을 타고 스파르테로 출항했다.
—(가)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4.3.2 중

헤라는 영혼의 결합과 가정의 수호신으로써 승화를 상징한다. 욕망과의 올바른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으로써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상징한다. 둘 다 영적 상승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에 반해 아프로디테는 성욕과 사랑의 여신으로써 육체적 쾌락을 상징한다. 파리스는 육체적 쾌락을 선택한 것이다.

이번엔 파리스에게 제시한 여신들의 선물을 보자. 헤라는 왕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헤라의 선물은 티탄적 진부화를 상징한다. 티탄적 진부화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겠다고 했다. 이는 관습적 진부화를 상징한다. 관습적 진부화는 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는 정신적 긴장 상태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티탄적 진부화를 상징할 수도 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결국 명예이고,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 헬레네를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삶에서 강렬한 경험을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적 진부화이다. 디오니소스적 진부화는 특히 육체적 쾌락에 끌리게 되어있다. 파리스에게 다른 가치는 필요 없다. 육욕을 위해서라면 이미 사랑하고 있던 여자, 요정 오이오네까지 바로 버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파리스는 디오니소스적 진부화이다. 세속적 욕망인 헬레네는 티탄적 진부화도 택하고 싶고, 육체적 쾌락인 디오니소스적 진부화도 택하고 싶어한다. 재물이나 명예, 육욕 모두 갖고 싶어하는 욕망의 덩어리인 것이다. 그런 헬레네와 주변 사람들이 재앙을 가져오는 것은 운명이다.

이전에는 파리스와 헬레네를 마냥 비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결국 진정한 사랑 때문에 도망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서 그들이 최고로 치는 가치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영혼의 사랑, 진정한 사랑이라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물질 세계로 모든 것이 환원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초의식, 도덕 의식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다음 번에는 그런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