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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숲, 2009
스포일러 있음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순서
남신과 교합하여 영웅을 낳은 여인들과 그들의 자녀들 이야기
그리스 신화에서는 남신이 인간 여자와 교합하기도 하고, 여신이 인간 남자와 교합하기도 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보통 영웅이 된다. 『여인들 목록』은 남신과 교합하여 영웅을 낳았던 여인들, 그 여인들의 자녀들의 이야기다. 남신과 교합한 여인은 아니더라도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아탈란테 같은 여인들의 이야기도 있다.
제우스와 교합하여 그리스 신화에서 아주 유명한 헬레네와 폴뤼데우케스를 낳은 레다, 벨레로폰테스의 어머니 에우뤼노메, 아폴론과 교합하여 아스클레피오스를 잉태한 코로니스, 제우스와 교합하여 미노스, 라다만튀스, 사르페돈을 낳은 에우로페 등 신화 속 쟁쟁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 헤시오도스가 쓴 것이 아니라고 추정되기도 하고 많은 부분이 유실되기도 했지만, 파편적으로 보더라도 재밌게 읽을 만한 내용들이 꽤 있다(『신들의 계보』보다 덜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신들의 계보』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과 그에 대한 내 생각들을 정리했다.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가멤논의 자녀 이피메데(이피게네이아)
아가멤논의 군대가 트로이아로 쳐들어가기 위해 출항했을 때 전염병이 돌아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 이피메데를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아르테미스가 이피메데를 가엾게 여겨 그녀를 구해주었고 그녀의 머리 위에 암브로시아를 떨어뜨려 ‘죽지도 늙지도 않게’ 해주었다.
신화를 읽다 보면 필멸의 존재가 불멸의 존재가 될 때, 죽지 않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꼭 죽지도 ‘늙지도’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인간 남자 티토노스를 사랑하여 제우스에게 그가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을 부탁했고, 제우스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에오스는 티토노스가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만 말했지, 늙지 않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티토노스는 죽지는 않았지만 늙어버렸다.
늙으면서 죽지 않는다는 것, 혹은 늙으면서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늙는다는 것은 주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닳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80살이 되어서도 매일 달릴 수 있고 책 읽고 글 쓸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몸이 되고 정신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얼마나 오래 살든 비극인 것 같다. 몸과 정신이 항상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래야만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될 테니 말이다.
거짓 맹세의 대가
『신들의 계보』 글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맹세를 아주 중시했다고 썼다. 『여인들 목록』과 역주를 보면 여기서도 맹세를 깨뜨리는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에우뤼토스라는 왕은 누구든지 궁술 대회에서 자신을 이기면 딸 이올레를 상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가 대회에서 이기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는 이전에 미쳐서 아내와 자녀들을 죽였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에우뤼토스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결국 그는 맹세를 지키지 않은 대가를 치른다.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쳐들어와 에우뤼토스와 그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이고 딸 이올레를 포로로 잡아간다(참고로 헤라클레스도 자신이 원했던 여자 이올레를 데려감으로써, 즉 육체적 욕망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파멸을 맞이한다).
헤라클레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또 다른 왕도 벌한다. 트로이아의 왕 라오메돈은 제물로 바쳐진 딸을 구해주면 불사의 말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라오메돈은 헤라클레스가 그의 딸을 구해주었는데도 그에게 말을 주지 않았고, 결국 헤라클레스는 12고역이 끝난 후 트로이아로 쳐들어가 라오메돈 왕과 포다르케스(프리아모스)를 제외한 그의 모든 아들들을 죽인다.
거짓 맹세의 대가가 자신과 아들들의 목숨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맹세를 지켰을 것이다.
왕의 잘못으로 고통받는 백성들
시쉬포스와 형제간인 살모네우스는 오만한 왕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노하시어 올륌포스에서 내려오시어 급히 오만불손한 살모네우스의 백성들에게 가셨으니, 이들에게 교만한 왕 때문에 곧 파멸이 닥칠 것이었다. 이들을 그분께서는 천둥과 불타는 번개로 치셨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왕의 못된 짓을 백성들이 갚게 하셨던 것이다.
그의 오만함 때문에 백성들이 신으로부터 고통받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왕 혹은 왕비의 잘못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받는 일이 허다하다. 이를 보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인간의 창조주 엔키가 엔릴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죄인에게 그 죄를 처벌하고, 범죄자에게 그 범죄를 처벌하시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죽지 않도록 관대하고, 사람들이 파멸되지 않도록 인내하시오.
—작자 미상, 『길가메시 서사시』
잘못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해 나라에 역병이 돌게 한다거나, 백성들이 재해로 고생하게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나는 엔키의 말이 마음에 든다. 죄의 처벌은 죄 지은 사람에게서 끝나야 한다.
아탈란테
아탈란테는 결혼을 하면 불행해지리라는 신탁을 들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과의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는 남자가 있다면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고선 남자들을 다 이겼다. 그러나 힙포메네스가 아프로디테에게 받은 황금 사과 세 개를 달리기 시합 때 던지자 그것을 줍느라 시합에서 졌다.
자신의 운명을 이겨보려 했던 이는 결국 황금 사과, 즉 물질에 져버렸다(힙포메네스에 대한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세속적 욕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귀속되었다.
결혼하지 않는 것
역주에 의하면 프로이토스와 스테네보이아의 딸 이피노에, 이피아낫사, 뤼십페는 많은 구혼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그래서 헤라 여신이 ‘가증스런 음탕함 때문에 부드러운 꽃을 없애버렸다.’ 헤라는 그녀들의 머리 위에 끔찍한 옴을 쏟고, 버짐이 그들의 살갗을 덮게 하고, 고운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되게 했다. 얼마나 가혹한 벌인가. 『신들의 계보』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남자는 무정한 노년에 이른다고 하고, 『여인들 목록』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여자가 이토록 벌을 받으니, 과거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에 이런 글을 읽으니 더 흥미로운 것 같다.
텔레포스
아우게가 낳은 텔레포스는 아카이오이족을 물리쳤다. 그가 사람들을 죽인 것을 묘사하는 문학적 대비가 인상깊다.
그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대지 위에 많은 사람들을 뉘었다.
헬레네의 구혼자들
헬레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되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구혼했는데 이중에는 메넬라오스, 오뒷세우스, 아이아스 같은 장수들도 포함된다. 결국 메넬라오스가 그녀의 남편이 된다.
이타케에서는 라에르테스의 꾀 많은 아들 오뒷세우스의 신성한 힘이 구혼했다. 그는 복사뼈가 날씬한 소녀 때문에 선물을 보낸 적은 없었으니, 아카이오이족 중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금발의 메넬라오스가 이기게 되리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그들 모두를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이겼으니 그가 가장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과 헌신이다. 여성은 체내 수정, 9개월 이상의 임신 기간, 수유라는 엄청난 성적 투자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자원, 그리고 자원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특질이 매우 중요하다.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메넬라오스가 헬레네의 남편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남자들은 헬레네를 직접 보지도 않고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소문으로만 듣고 구혼하기도 한다. 수많은 이들이 구혼 선물을 보낸다. 책에서는 ‘머릿결이 고운 헬레네 때문에’라고 이야기한다.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남성이 여성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신체적 매력과 정절이다. 남성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적응적 문제는 여성의 번식 가능성을 알아채는 것과 부성불확실성을 해결하는 것이다. 신체적 매력은 번식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정절은 부성불확실성을 해결해주리라는 암시가 된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에게 수많은 남성들이 구혼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헬레네를 향한 쟁쟁한 남성들의 구혼, 그리고 결국 가장 많은 선물을 준 메넬라오스를 선택한 헬레네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다.
디오뉘소스의 포도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포도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디오뉘소스가 인간들에게 환희와 고통이 되도록 준 선물들처럼. 많이 마시는 자에게는 포도주가 미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들로 두 발과 두 손과 혀와 이성을 묶게 된다. 그러면 부드러운 잠이 그를 포옹한다.
술은 인간에게 환희가 되기도 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내일의 행복을 차입해서 쓰는 정도까지 포도주를 마시면 그건 고통이 되고, 인간만이 즐길 수 있는 향락으로서 절제하며 포도주를 마실 때는 술이 디오뉘소스의 좋은 선물이 된다. 포도주가 미쳐서 내 이성을 묶는 건 확실하게 싫다. 한 순간이라도 내가 아닌 존재로는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