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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숲, 2009
스포일러 있음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순서
신들의 계보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영웅의 계보에 대해 상세히 작성되어 있는 책이다. 그리스 신화의 창세 신화부터 오뒷세우스의 아들들까지의 계보를 전부 다루고 있다. 하지만 서사의 성격이 있는 장면은 몇 가지 안 된다. 창세 신화, 우라노스가 집권하던 시절의 신화,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몰아낸 신화,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몰아낸 신화, 판도라 이야기를 포함한 프로메테우스 신화, 티탄 신족과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 신화, 튀폰과의 싸움 신화가 그나마 읽을 장면이 있는 부분이다.
먼저 유물론적 시각으로 이 신화들을 살펴보자. 유물론적 시각이란 모든 현상이 물질 세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시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빅뱅 우주론이나 진화론에 대해 알았을리는 없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채워넣었다. 헤시오도스의 창세 신화에서 카오스는 혼돈이 아니라 공허를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상상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을 낳은 대지 가이아와, 저승 세계인 타르타로스와, 에로스가 생겨났다. 에로스는 우주적 생식력을 나타낸다. 그들이 생각했던 우주의 기원은 모든 것을 낳는 대지와, 죽음과, 생식력이었다. 하늘이니 신이니 동물이니 하는 것들은 그 이후이다. 대지는 모든 탄생이 일어나고, 신들간의 혹은 인간들간의 싸움이 일어나는 우주 전체였다.
이후에 카오스는 낮과 밤을 낳는다. 빛과 어둠이 생긴 것이다. 가이아는 하늘을 상징하는 우라노스를 낳는다. 잠깐 우라노스의 시대가 열렸지만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 의해 쫓겨난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한다. 물질의 탄생이 먼저였지만, 세상은 시간에 의해 흘러간다. 시간이 있음으로써 낮과 밤이 바뀌고, 필멸의 존재들이 태어나고 늙어죽는다. 이전의 왕이었던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게 낫으로 성기를 잘리고, 이 성기의 피에서 복수의 여신들이 태어난다. 우라노스가 피해를 입은 뒤 복수의 여신들이 생긴 것은 의도적으로 준 피해가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라노스의 성기가 빠진 바다에서는 거품이 일더니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성욕의 여신이다. 헤시오도스는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뒤로 에로스는 항상 아프로디테 곁에 있었다고 한다. 처음 우주에서 생식력은 혼자 존재했지만, 이후 생식력은 사랑과 함께 다닌다. 이는 마치 처음에는 무성 생식을 하던 초기 생명이 암수로 분리되고, 유성 생식을 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과학적 역사와도 비슷하다.
카오스에게서 나온 밤은 죽음의 여신, 죽음, 잠, 꿈의 부족을 낳았다고 한다. 잠은 밤에 잔다. 인간은 어둠이 몰려오면 멜라토닌이 분비되고 잠에 빠지는 동물이다. 낮에 자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빛은 세로토닌을 분비시킨다. 낮은 활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면 장애나 수면 부족이 아니라면 낮에 꿈을 꾸진 않는다. 밤에 잘 때 꿈을 꾼다. 그러므로 잠과 꿈은 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왜 밤의 자녀일까? 밤에 활동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야행성 포식 동물에게 먹힐 가능성이 크고, 이외에도 다른 위협적인 장애물을 확인할 수가 없다. 혹은 죽음은 영원한 잠처럼 비춰져서 잠과 죽음이 형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밤은 비난이나 고초, 헤스페리데스들도 낳지만 이는 형이상학적인 상징이므로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쨌든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이 밤에 죽음과 비슷한 잠을 자는 것은 미스테리였을 것이고, 죽음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는 밤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강을 흐르게 하는 원동력과 많은 고기를 품고 있는 강의 생명력도 궁금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신 오케아노스의 자녀들로 표현되었다. 오케아노스의 자녀들 중 나일(네일로스)이나 파시스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흥미롭다. 나일강의 원동력과 생명력은 네일로스 신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강한 자연의 힘은 신의 힘으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제우스가 어떻게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탄생했는지는 명백하다. 거대한 굉음과 태양 같은 빛을 내는 천둥 번개는 인간에게는 물활론적 편향으로 인해 마치 무언가가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물활론적 편향은 애니미즘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런 거대한 자연 현상에 신격을 부여했다.
신비하고 미스테리한 죽음으로부터 하데스가, 바다의 폭풍과 거대한 생명력으로부터 포세이돈이 탄생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깃들길 원하는 가정의 평화로부터 헤라가, 지혜로부터 아테네가, 사랑의 힘으로부터 아프로디테가 탄생했을 것이다. 불도 중요하다. 인간은 약 140만 년 전부터 불을 썼다. 그런데 화로는 약 25만 년 전부터 썼다. 그럼 두 기간의 차이인 약 115만 년 동안 인간은 어떻게 불을 쓴 것인가? 인간은 번개나 산불 등 자연적으로 생긴 불로부터 불을 얻었고,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보존했어야 했다. 불씨가 꺼지면 다음 불을 찾기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러므로 불과 화로의 여신인 헤스티아는 상당히 중요한 여신이었을 것이다. 불을 인간에게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전에는 그런 불을 선사하는 것은 번개, 즉 제우스였다. 그러니 제우스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튀폰과의 싸움에서 제우스가 던진 벼락 때문에 아이드네 산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드네(에트나) 산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 있다. 그런데 이 산은 화산이고, 아직도 활동 중이다. 고대인들에게 대지를 흔들고 주변 모든 생명을 잿더미로 만드는 화산의 힘은 얼마나 무서운 힘이었겠는가? 그것은 엄청난 괴물의 힘이거나 아니면 그런 괴물을 제압하기 위해 신이 던진 불과 같은 것처럼 여겨졌다.
풍요, 행운, 승리의 여신인 헤카베는 농경 시대에 가장 존경 받는 신 중의 하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생존이 위협 받던 수렵채집인 시절에는 천둥, 번개나 폭풍 같은 힘이 잦아들길 원하고, 불을 발견하길 원했다. 그러나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풍요가 도시에 찾아왔을 때, 잉여 생산물이 막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스포츠를 하며 즐기기 시작했다. 헤카베는 그런 풍요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물론적 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신화는 초기에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거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쓰였지만, 이후에 인간의 정신 세계가 담겨 세세하게 다듬어졌다. 그래서 신화의 디테일까지 유물론적 관점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신화에 나오는 디테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의 정신 세계로 신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젠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관념론적으로 해석해보자.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신화가 그렇듯, 어머니는 물질 세계를 상징하고, 아버지는 정신 세계를 상징한다. 아버지의 긍정적 형태는 신성한 영, 즉 도덕적인 초의식의 부름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이다. 아버지의 부정적 형태는 타락한 영으로 자신이 신과 같이 되었다는 교만, 즉 허영이다. 이는 모든 신화에서 마찬가지로 뱀이나 용과 같은 괴물이다.
어머니의 긍정적인 형태는 물질 세계의 풍족한 생명력과 욕망의 승화이다. 예를 들면 육체적 결합을 초월한 영혼의 결합, 즉 사랑이 가정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여신인 헤라가 그런 상징이다. 그래서 헤라는 승화의 상징이다. 어머니의 부정적 형태는 세속적 욕망과 물질 세계에 대한 집착,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팜므파탈 이미지를 가진 여자로 나온다. 판도라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우라노스는 정신이고, 가이아는 물질 세계를 의미한다. 이는 각각 아직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형태로 변화되지 않은 잠재력이 있는 상태의 영과 물질이다. 그런데 『신들의 계보』에 나오는 최초의 갈등은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갈등이다. 우라노스는 가이아가 낳은 각종 괴물들을 전부 타르타로스에 가둔다. 이는 세속적 욕망이나 육체적 쾌락들이 억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서로 조화할 수도 대립할 수도 있다. 영의 지도에 따라 영과 욕망이 조화를 이루면 발전이 일어난다. 하지만, 세속적 욕망과 영이 계속 갈등을 일으키면 퇴화가 일어난다. 이를 신경증적 도착이라고 한다.
영과 욕망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그리스 신화에서, 욕망들을 전부 억압한다고 해서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결국 티탄 신족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베어 우라노스를 몰아낸다. 이때 우라노스는 죽지 않고 바다를 건너 달아난다.
우라노스에서 티탄 족으로 이어지는 통치 체제의 변천은 인간 정신의 발달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라노스는 무의식이고, 티탄 족들은 잠재의식을 의미한다. 우라노스가 무의식이라면 어떻게 우라노스가 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라노스는 초기 정신의 탄생이므로 동물적 의식, 무의식을 뜻한다. 그런데 초의식, 영은 의식, 잠재의식의 영역이 아닌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라노스는 아직 영이지만 아직 무의식에서 분리해나오기 전인, 신성해지기 전의 영이다.
그래서 크로노스가 벤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난다. 사랑과 성욕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남근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깊게 볼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남근이 영과 정신의 상징이었던 우라노스의 것이라는 사실은 심도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 즉 동물적 욕망에서 성욕이 탄생했고, 정신에서 사랑이 탄생했다. 생식력을 상징하는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함께 한다.
또한 우라노스의 피에서 복수의 여신들이 태어난다. 이는 밤에게서 태어난 죄들이 아닌 우라노스, 즉 정신에서 태어난 여신들로, 크로노스의 가족(아버지)에 대한 해악의 행위로부터 복수가 태어난 것이다. 복수의 여신들은 특히 가족 내에서의 범죄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살해는 영에 대한 살해, 영의 죽음이다. 어머니에 대한 살해는 욕망의 억압이다. 영과 욕망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리스 신화에서 영의 죽음이나 욕망의 억압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영의 죽음이나 욕망의 억압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지만, 그런 고통은 다시 영과 욕망의 조화를 추구하게 하기도 한다.
이제 크로노스가 통치하면서 세속적 욕망의 시대가 왔다. 낫은 죽음의 상징이다. 우라노스는 죽진 않았지만, 세속적 욕망의 시대 속에서 영은 죽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다. 시간은 발전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시대는 영을 몰아낸 상태에서 맞이하는 시간에 의존하는 발전이다. 왜 크로노스의 시대를 황금 시대라고 할까? 풍족한 물질 세계 속에서 시간에만 기대는 발전이 무엇이 있을까? 정신의 활동 없이 말이다. 이는 번식이다. 크로노스의 시대는 세속적 욕망의 시대이다. 이는 번식과 번영이 최고 가치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시대는 파괴의 시대이다. 티탄 신족은 파괴적인 세속적 욕망의 상징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이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서 크로노스를 수식하는 말을 보자.
음모를 꾸미는 위대한 크로노스는 용기를 내어 (…)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165행 중
티탄 신족은 잠재의식을 상징하지만, 세속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지성(의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대표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인 것이다. 이는 지성의 올바르지 못한 사용이다. 그래서 크로노스의 수식어는 “음모를 꾸미는 위대한"이다. 크로노스는 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신들을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는다. 세속적 욕망인 크로노스는 신성한 영인 제우스에게 제압당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세속적 욕망은 돌과 영을 구분하지 못한다.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면 세상에 속한 물질과 진정한 삶의 의미가 깃든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다.
결국 크로노스는 돌덩이부터 토한다. 돌덩이는 무지의 상징이다. 이후 자신이 먹었던, 활동하지 못하게 했던 나머지 다섯 신들을 게웠다. 신성한 영인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물리친다. 단순히 시간에 의지하여 발전을 꾀하던 인간은 이제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내면의 영적 외침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잘못된 지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등장 이후 케이론에게서 영생을 얻고, 신들의 만찬에 초대된다는 점에서 올바른 지성으로 탈바꿈하는 입체적인 존재이다. 초기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점에서 잘못된 지성을 상징할까? 그러려면 먼저 제물을 바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곡식이나 짐승을 인간이 취하지 않고 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음식 앞에서 먹고 싶다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권력을 갖고 싶다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장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아니라 가장 처음 난 음식을 바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첫째 소나 첫째 어린양, 혹은 처음 난 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어떻게 했는가? 프로메테우스는 큰 황소를 제물로 바친다. 그런데 이때 황소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뼈를 기름에 싸서 맛있게 보이도록 했고, 다른 하나는 살코기와 기름진 내장을 소의 가죽으로 덮어 먹을 것이 없는 것처럼 내밀었다. 그러면서 제우스에게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인간들에게 바쳐질 것이었다. 제우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뼈와 기름만이 가득한 제물을 고른다. 살코기는 인간이 취한 것이다. 이것은 지성이 세속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제우스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초의식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이러한 행위는 죄책감을 비롯한 신경증적 도착으로 나타났을 것이고, 신화에서는 신들의 분노로 나타났을 것이다. 세속적 욕망에 굴복하는 인간은 처음에는 어떤 죄책감을 갖는다. 그게 무뎌지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가 더 이상 없어지는 것을 진부화라고 하는 것이다. 제우스는 모든 것을 알고 행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은 불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불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퇴화를 의미한다.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다시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으로 퇴화했음을 의미한다.
불도 힘과 지성을 상징한다. 인간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앉아 사회화를 이뤘으며, 불 덕분에 뇌 용적이 커질 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 화광을 훔쳐낸다. 물푸레나무가 아닌 회향풀 줄기 속에다 훔쳐서 준다. 풍부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물푸레나무가 아닌 마른 회향풀에 불을 훔쳐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이 불도 올바른 지성이 아닌 잘못된 지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우스께서는 또 꾀 많은 프로메테우스를 끊을 수 없는
고통스런 사슬을 기둥 한가운데로 집어넣어 결박하시고는
그에게 긴 날개의 독수리 한 마리를 보내셨다. 그리하여 독수리가
그의 불멸의 간을 쪼아 먹었으나, 밤이 되면 그의 간은
긴 날개의 새가 낮 동안 쪼아 먹은 만큼 사방으로 자라났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521–525행
이아페토스의 아들인 교활한 프로메테우스조차
그분의 엄중한 노여움을 피하지 못하고
영리한데도 큰 사슬에 억지로 붙들려 있으니 말이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614–616행
앞을 내다보는 자인 프로메테우스는 쇠사슬에 묶여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당한다. 이 독수리는 죄책감의 상징이다. 영과의 화해 없이는 지성은 물질 세계, 땅에 결박되어 움직일 수 없다. 헤라클레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프로메테우스는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제이다. 행하고 난 뒤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헤시오도스가 여자들의 종족을 묘사한 것을 보면, 현실 세계에서 여자에 대한 해석을 드러낸 것 같다. 하지만 이를 관념론적으로 해석하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온다.
그들은 남자들과 함께 살 때는 인간에게 큰 고통이요, 저주스런
가난에는 적합한 동반자가 아니지만 부에는 그렇기 때문이다.
(…)
제우스께서는 복의 대가로 또 다른 재앙을
만드셨으니, 결혼과 여자들의 수고를 끼치는 행동을 피하여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남자는 노후에 돌봐주는 이도 없이
무정한 노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한편 결혼하게 되어
알뜰하고 곰살가운 아내를 맞는 남자는
평생 동안 늘 화복을 번갈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악처를 만나는 남자는
가슴속에 마음속에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되며, 그것은 치유할 길 없는 재앙이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592–612행
여자가 욕망의 상징이라면, 악처는 욕망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그것은 진부화이고, 치유할 길 없는 재앙이다. 알뜰하고 곰살가운 아내는 영과 조화를 이루는 욕망을 뜻한다. 인간이 흙(세속적 욕망)과 진흙(진부화)로 빚어진 이상 욕망과의 갈등은 벗어날 수가 없지만, 욕망과 조화를 이루는 영은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화복을 번갈아맛보는 것이다.
티탄 신족이 세속적 욕망이나, 잘못된 지성의 상징이라면 올바른 지성의 상징도 있을까? 올바른 지성은 퀴클롭스나 헤카톤케이레스들이다. 퀴클롭스는 신성한 영인 제우스에게 천둥, 벼락, 전광을 만들어준다. 지성은 올바르게 사용될 수도, 잘못 사용될 수도 있다. 지성이 영과 올바르게 조화하여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영은 힘을 얻는다. 헤카톤케이레스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타르타로스에 갇힌 티탄 신족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세속적 욕망이 밖으로 분출되어 신경증적 도착을 겪지 않도록, 이성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올바른 지성의 상징들은 크로노스 시대까지 타르타로스에 갇혀있다가 제우스의 시대가 되고 나서 밖으로 나온다. 올바른 지성은 신성한 영이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과 티탄 신족 사이의 전투는 그럼 명백하다. 영의 부름과 세속적 욕망의 싸움이다. 둘은 균형을 이루며 싸운다. 한 인간의 심리 내에서 벌어지는 욕망에의 순응과 인생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여정 사이의 갈등이다. 인간은 이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우스가 어떻게 이겼는가? 헤카톤케이레스들에게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주고 그들이 세속적 욕망과 싸우게 한다. 신성한 영이 올바른 지성, 즉 이성에게 세속적 욕망을 제압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지만 티탄 신족은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마치 인간인 이상 욕망이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그들을 타르타로스 깊은 곳에 가둔 것이다. 그래서 티탄 신족은 억압된 욕망, 잠재의식이다.
하지만 억압한 욕망이 좋게 끝날리가 없다. 제우스가 티탄 신족을 억압하자마자, 가이아는 타르타로스와 교합하여 튀폰을 낳았다. 가이아는 물질 세계이고, 타르타로스는 잠재의식이다. 물질이 세속적 욕망과 결탁하면 무엇을 낳는가? 진부화이다. 튀폰은 진부화를 상징한다. 부나 권력,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삶의 숭고한 의미를 찾는 과정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다시 튀폰과 싸운다. 억압된 욕망이 자꾸 영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때 올바른 지성의 사용인 지혜인 아테네와 신성한 영인 제우스를 제외한 신은 이집트로 도망갔다. 신경증적 상태에서 다른 긍정적인 승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튀폰이 내뿜는 불은 세속적 욕망에 순응하려는 타락한 지성을 의미하고, 제우스의 천둥과 번개, 빛과 불은 영의 외침을 따라가려는 이성을 의미한다. 돌풍과 불타는 벼락은 신경증적 상태를 의미한다.
마음이 드센 이 신적인 에키드나로 말하자면,
반쪽은 속눈썹을 깜빡이는 볼이 예쁜 소녀고
다른 반쪽은 신성한 대지의 깊숙한 곳에서 반짝이며
게걸스러 먹어 치우는 무섭고 거대한 뱀이다.
(…)
언제까지나 죽음도 나이도 모르는 소녀인 파멸을 가져가주는
에키드나는 아리모이의 지하에 갇혀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곳에서 무섭고 포악한 무법자 튀폰이
속눈썹을 깜빡이는 소녀와 사랑으로 교합했다고 한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297–307행
결국 튀폰은 파멸을 가져다주는 에키드나와 교합했다. 에키드나가 신경증적 도착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에키드나는 반은 아름다운 소녀이고, 반은 사악한 뱀이다. 때때로 분출되는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을 상징한다. 이 신경증적 도착과 진부화가 결합하여 자기인식의 부재인 스핑크스, 세속적 욕망에 갇힌 상태인 오르토스, 억압된 욕망의 케르베로스, 이외에도 휘드라, 키마이라, 네메아의 사자 등 온갖 괴물을 낳는다.
튀폰은 제우스의 벼락과 천둥을 맞고 아이드네 산 밑에 쓰러진다. 영의 부름에 응한 이성의 목소리를 듣고 진부화는 쓰러진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모든 이야기는 이 신경증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반복되는 것이다. 갈등 후에 진부화에 빠져 영혼의 죽음을 맞이하거나, 정화를 받고 불멸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고뇌를 잊지 않고 욕망을 승화시킴으로써 조화로운 삶을 살려고 했던 그리스인들의 바람이 『신들의 계보』의 창세 신화에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