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은 분명 좋음이 아니며, 모든 쾌락이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어떤 쾌락들은 그 종류나 출처가 더 우월하기에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제10권 쾌락」, 『니코마코스 윤리학』
쾌락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고 주장한 철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쾌락을 즐기는 향락은 우리가 충족해야 하는 여러 동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번 장에서는 쾌락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와 아무런 공부 없이 쾌락 추구를 하면 왜 문제가 생기는지 살펴보겠다.
쾌락을 좇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존과 번식, 혹은 다른 동기를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진화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에 쾌락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쾌락은 특정 행동을 계속하거나 특정 환경을 찾도록 만드는 유인이 된다. 반대로 고통은 특정 행동이나 특정 환경을 기피하도록 하는 유인이 된다. 그렇다면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에서 쾌락을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당연히 훨씬 쉽게 번식했을 것이다. 배고플 때 음식을 먹으면 쾌락을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다음애도 음식을 찾아 먹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거꾸로 음식을 먹으면 고통을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굶어죽어 도태되었을 것이다. 성관계에서 쾌락을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더욱 번식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반대로 성관계를 하면 고통을 느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유전자풀에서 제거되어 도태되었을 것이다. 즉, 쾌락은 일반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쾌락이 항상 생존과 번식, 다른 동기들의 충족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과거 환경과 현대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화하는 속도는 현대 환경이 변화하는 속도보다 매우 느리다. 즉, 인간은 아직 30만 년 전에 초원에서 생활하던 때 적응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이때는 겨우 과일을 발견해 끼니를 때우거나, 다른 동물이 사냥하고 남은 뼈에 붙어있는 살점을 겨우 발라먹던 시기이다. 그래서 과거 환경에서는 생존에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행동이 현재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기름진 음식과 단 음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환경은 언제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사 문제가 해결된 것도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칼로리가 높은 단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인간은 큰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에는 과잉 영양으로 인한 비만이나 당뇨병, 각종 심혈관 문제들, 새로운 질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쾌락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에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환경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불쾌한 감정도 마땅히 감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신체를 다치는 것에서 고통을 느끼면 다시는 안 그렇게 되려고 조심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통은 일반적으로 과거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위협이 되는 행동이나 환경을 피하는 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고통 등의 불쾌한 감정을 피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어도, 현대에는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불쾌한 감정도 감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첫 번째 이유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이유와 구분하는 이유는 쾌락과 불쾌의 독립성 때문이다. 쾌락과 불쾌는 반대가 아니다. 서로 독립적인 감정임이 증명되었다. 기쁜 동시에 슬플 수 있다. 행복한 동시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이는 중용을 벗어난 생각이다. 행복의 특성에 대해 많은 베일이 벗겨진 현대에는 어떤 고통은 감내해야 하고, 어떤 쾌락은 멀리해야 하는지 지식을 통해 분간할 수 있다.
불쾌한 감정도 마땅히 감내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불쾌한 감정이 현대에는 아무런 해가 될 일이 없는 경우이다. 사회에서 배제되는 경험은 과거에는 곧 죽음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생존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동물이다. 이는 ‘관계’ 동기 장에서 자세히 보자. 과거에는 사회적 고립이 곧 죽음이었으므로 인간에게 사회적 고립은 신체적 죽음과 같은 수준의 고통이 밀려온다. 이것은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하는 유인이 된다. 그 정도가 심할 경우 우울증이나 자살 등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은 포괄적합도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친족 자본’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현대 환경에서는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있다. 언제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냥 다른 사회로 떠나버리면 될 일도 사람에게는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수반하게 된다. 즉, 과거에는 큰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이나 환경이 현대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현대 환경에서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지연된 보상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 등이 있다. 과거 환경에서는 지연된 보상을 감내하는 것이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언제 먹을 것을 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 큰 먹이를 인내하며 찾는 것보다 당장 눈 앞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각 분야의 전문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현대에는 눈앞의 쾌락만 좇다가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때로는 보상을 지연하고 참으면서 공부하거나, 사업을 일궈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통은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
향락 동기의 충족 관점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다. ‘몰입’에 대한 권위 있는 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쾌의 감정만 100% 있는 것보다 불쾌의 감정이 어느 정도 섞여있을 때 인간이 가장 몰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향락 동기의 여러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참고)
예를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신맛이나 쓴맛은 부정적인 감정적 경험이다. 신맛이나 쓴맛은 음식에 독이 있는지 알려주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과하게 산성이거나 염기성이어서 우리 몸의 항상성을 깨뜨리거나 신체를 해할 수 있는 독이 들어있는 경우 신맛이나 쓴맛을 느끼게 된다. 우리 조상들은 살기 위해 이것저것 다 먹어보다가 신맛이나 쓴맛이 있는 음식은 상했거나 먹을 게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뱉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달콤한 맛만 있는 것보다 어느정도 신맛이나 쓴맛이 조금 섞여있을 때 가장 맛있다고 느낀다. ‘새콤달콤’이나 ‘달콤쌉싸름’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쾌락이라는 감정 위에 불쾌가 조금 섞여있을 때 인간이 느끼는 쾌락은 가장 절정이 된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을 이해하기 쉬운 것이 쾌락, 난해한 것이 불쾌라고 한다면 인간은 자신이 듣기에 적당히 이해할 수 있지만 종종 변주가 있는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 너무 쉬운 음악은 금방 질리고, 너무 어려운 음악은 불쾌해서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복잡한 음악일수록 한 번 빠지면 질리지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어떤 음악도 처음 듣는 것보다 자꾸 듣는 것이 좋아지고, 그러다가 너무 많이 들으면 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랑만 있는 소설보다 약간의 배신이 섞여있는 이야기에서 최고의 쾌락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조히스트, 고어틱한 영화나 공포 영화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큰 불쾌감이 섞여있는 경우 충분히 즐기려면 큰 쾌락을 동반하고 자신에게 난해함이 있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장르들은 매니악한 측면이 있다. (폴 블룸,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참고)
쾌락을 좇는 것이 생존이나 번식, 기타 다른 동기를 충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도 있다. 현대 환경에서 쾌락을 얻게 해주는 활동이 부산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체당에는 (일반적으로 안 좋다고 알려진) 아스파탐, 수크랄로스를 비롯하여 (해가 없다고 알려진) 에리스리톨, 스테비아 등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물질들이 달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분자 구조가 우연히 인간의 미각에서 단맛을 느끼게 하는 기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부산물로 인한 쾌락 중 ‘초정상자극’에 해당하는 쾌락들은 우리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재갈매기 부리에는 작은 빨간 점이 있다. 이 빨간 점은 갈매기가 다 자라면 생긴다. 새끼들은 어미 부리의 이 빨간 점을 쪼아대고, 그러면 어미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준다. 틴베르헌은 부리에 작은 빨간 점이 있는 갈매기 모형을 새끼가 있는 둥지에 갖다 두었다. 그랬더니 새끼들은 어미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형에 있는 빨간 점을 쪼아댔다. 틴베르헌은 거대한 빨간 점이 세 개나 있는 모형으로 바꾸어서 실험해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새끼들이 ‘미친듯이’ 빨간 점을 쪼아댔다. 이렇게 빨간 점이 크고 많을수록 신나게 쪼아대는 행위 자체는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빨간 점을 쪼아서 어미가 주는 먹이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저 특수한 상황에서 그것이 제일 생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고, 그것이 유전자의 본능에 각인된 것이다.
틴베르헌은 후속 실험에서 회색 기러기를 대상으로도 실험을 했다. 이 기러기는 땅에 둥지를 짓기 때문에 종종 알이 둥지 밖으로 굴러나왔다. 그러면 기러기는 굴러나온 알을 목으로 잡아 다시 둥지로 갖다놓는다. 이는 자식의 생존에 도움이 되므로 번식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기러기는 둥지 주변에 있는 ‘알’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둥근 물체면 뭐든 가져왔다. 틴베르헌은 회색 기러기 둥지 주변에 당구공, 전구 등 둥근 물건을 놓았다. 그러자 기러기는 둥근 물체이기만 하면 뭐든지 둥지로 가져왔다. 배구공을 놓아도 낑낑 거리며 갖다 놓았다. 둥근 물체를 가져오는 행위 자체는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둥근 물체 중 알을 가져오는 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는 일단 작동되기만 하면 그 방향대로 간다.
재갈매기 새끼들에게 거대한 붉은 점이나, 회색 기러기에게 거대한 둥근 물체는 큰 자극이 된다. 이런 큰 자극들을 초정상 자극이라고 한다. 달콤하고 짠맛이 적절하게 배합된 치즈케이크를 먹는 행위 자체는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달콤한 것 중 당분, 즉 탄수화물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짠 것들 중 나트륨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 중 수컷들은 골반이 넓은 여자를 선호했다. 그런 여자들이 출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허리 대 골반 비율(WHR)이 0.68–0.75 부근인 여성들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에는 이 수치보다 과도하게 수치가 낮은, 즉 허리는 잘록하고 골반은 넓은 여자 모델들이 나온다. 또한 과도하게 허리가 잘록하고 골반이 넓은 마네킹이 사방 천지에 깔려있다. 이런 낮은 비율을 가진 모델이나 마네킹을 보고 더욱 흥분 상태가 되는 것은 번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초정상 자극이다.
치즈케이크나 포르노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현대 환경에 부적합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저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이정표로 인간이 짠맛, 단맛, 감칠맛, 고소한맛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첫 번째 이유와 구분된다. 포르노도 마찬가지이다. 실제 여성과 만나 사랑을 나누는 남자가 번식에 유리하지만, 우리 뇌는 진화 과정에서 그저 시각 정보를 이정표로 선택했다. 실제로 살결이 닿고 페로몬을 맡는 것을 이정표로 선택했다면 포르노에 흥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더욱 효율적이었겠지만, 진화는 효율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작동하면 그대로 간다. 이런 ‘경로 의존성’ 때문에 우리 몸은 완벽하지 않다. (경로 의존성에 대한 내용은 개리 마커스, 『클루지』 참고)
이상의 이유들로 쾌락은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어떤 쾌락은 피하는 것이 좋다. 어떤 고통은 마땅히 감내해야 할 때가 있다. 쾌락은 삶의 여러 목적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쾌락을 추구할 때에는 다른 동기나 자본을 지나치게 훼손하지 않을 정도로 추구해야 한다. 쾌락의 특성에 대해 알고서 추구하는 것이 더 높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