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철학자들을 살펴보자.

플라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던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에우독소스부터 보자. 그는 원뿔의 부피가 원기둥의 부피의 3분의 1임을 증명했다. 또한, 천동설을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영향을 받아 천동설을 체계화했다. 그는 몹시 가난해서 플라톤의 강의를 들으러 매일 11km 의 거리를 왕복했다고 한다.

에우독소스는 쾌락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동물은 쾌락에 끌리는데 그것은 쾌락이 모두에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쾌락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거꾸로 고통은 모두에게 기피대상이 되므로 모두에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제10권: 쾌락」, 『니코마코스 윤리학』 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독소스가 그렇게 주장하고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쾌락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우독소스의 논리는 과학적으로 봤을 때 부분적으로 맞는 것 같다. 모든 동물들이 쾌락에 끌리는 이유는 쾌락이 좋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생존과 번식에 좋기 때문이다.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에 좋은 행동들에서 쾌락을 느끼는 유전자는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 논파했듯이, 과거 환경에서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현대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좋은 행동이나 환경을 추적하는 쾌락이 엉뚱하게 다른 행동이나 환경을 추적해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대체당 같은 부산물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쾌락이 좋기 때문에 끌린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현대 환경에서 어떤 쾌락은 좋고, 어떤 쾌락은 나쁘기도 하다.

쾌락주의 철학자로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에피쿠로스일 것이다. 쾌락주의였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 당시 금욕주의였던 스토아 학파와 많이 대립했다. 주류는 스토아 학파였으므로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서술도 왜곡된 것이 많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 외에도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을 계승했으며, 공포심을 통해 인간 세계에 간섭하는 종교를 나쁜 것으로 봤다. 그는 죽음 뒤에 육체가 원자 단위로 분해되고 나면 감각이 없고, 감각이 없는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기는 고난의 시대였기 때문에 죽음을 오히려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쾌락을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으로 구분했다. 동적인 쾌락은 바라는 욕망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얻는 쾌락이고, 정적인 쾌락은 욕망이 충족된 이후에 연속해서 존재하는 쾌락이다. 예를 들면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을 때 얻는 쾌락은 동적 쾌락이고, 배가 부른 뒤에 만족하는 것은 정적 쾌락이라고 했다.

그는 동적 쾌락보다 정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적 쾌락을 추구하면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에는 계속 고통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이후에 오히려 고통이 온다고 생각했다. 식욕을 채우느라 음식을 먹는 것에서만 쾌락을 느끼고 배부를 때의 만족감을 못 느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다들 너무 많이 먹어 오히려 괴로워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동적 쾌락을 추구하면 오히려 고통스러워지고, 자기파괴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욕망하고 있는 상태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동적 쾌락을 추구하면 욕망을 만족할 때는 잠깐 좋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나 고통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정적 쾌락을 추구했다. 그 덕분에 오히려 생활은 검소했다. 빵 한 조각과 물만 먹으면서도 만족했다. 식욕을 채우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아니라 배가 찬 느낌에 대한 만족감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뒤따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쾌락주의는 상당히 인기가 있어서 그의 공동체는 점점 커졌다. 그는 우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서 의리를 통해 관계 동기를 채우는 데 달인이었다. 그는 일찍 죽은 친구들의 자녀들까지 부족한 형편으로 길러주었다. 제자들, 친구들, 친구들의 자녀들, 노예들, 헤타이라(문예와 미모를 겸비한 고급 창녀)들까지 모두 들어와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언제든지 에피쿠로스의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쾌락주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문란한 성욕 추구에 대한 생각과는 달리,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성욕은 멀리했는데, 성욕을 동적 쾌락 중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쾌락의 쳇바퀴 실험에서 그래프를 보면 실제로 쾌락이 큰 상태로 가면 자극이 사라졌을 때 쾌락이 사라지다 못해 불쾌의 수준까지 떨어진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만족할 때 오는 쾌락 뿐만 아니라 이후에 찾아올 고통 또한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에서 쾌락주의에 대해 상당히 진보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행복에 시간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후의 고통이 올 쾌락(동적 쾌락)이라면 조금 쾌락 지수가 낮더라도 오래 가는 만족감(정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에 와서 봐도 일리가 있다.

이후에는 한동안 금욕주의 철학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대한 고찰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다시 쾌락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진정한 쾌락주의자들인 ‘공리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이익이란 곧 쾌락이었다. 또한, 행복은 쾌락과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의 기본 원리라고 했다. 그들에게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었다. 그래서 사회 전체의 쾌락이 고통보다 증가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고, 사회 전체의 고통이 쾌락보다 증가한다면 그것은 악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므로, 사회 전체의 쾌락과 상충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학과 경제학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존 로크는 공리주의의 시초이다. 사실 공리주의자가 벤담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처럼 제러미 벤담이 공리주의의 시초로 여겨진다. 하지만, 벤담 이전에 로크의 사상에도 공리주의가 있었다.

존 로크는 『인간오성론』에서 선한 것은 우리 안의 쾌락을 야기하고 증가시키거나 고통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을 좌우하는 것은 오직 행복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고에 이른 행복은 가능한 최대의 쾌락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선과 악은 신이 부여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은 사익, 즉 각자의 쾌락을 추구한다. 그래서 로크는 공익과 사익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정치학의 관심사인 것으로 여겼다. 로크는 자기 이익과 전체 이익은 길게 보았을 때 일치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단기적인 쾌락을 더 추구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을 행동경제학 용어로는 ‘할인 쌍곡선 편향’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을 미래의 이익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쾌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뇌는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단기적인 쾌락을 더 추구한다.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핵심 원리 중 하나는 최대 행복의 원리이다. 그것은 선이란 쾌락이거나 행복이고 악은 고통이라는 원리이다. 그는 쾌락과 행복을 동의어로 썼다. 그가 주장한 것도 로크의 주장과 비슷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선은 일반의 행복이고, 개인은 각자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입법자는 공익과 사익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 그의 이론은 그가 지원했던 제임스 밀에 의해 강화되었고, 제임스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를 질적으로 완성시켰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흔히 ‘양적 공리주의’로 많이 불린다. 벤담은 최대 다수의 행복이 선이라는 논리를 많이 폈으며, 모든 쾌락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임스 밀은 쾌락 중에서도 온건한 쾌락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지적 즐거움이나 절제에서 오는 쾌락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생각을 발전시켜 ‘질적 공리주의’를 완성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에서는 모든 쾌락이 같지 않다. 만약의 쾌락의 양이 같거나 더 적어도, 선호되는 쾌락이 있다면 그것은 더 바람직하고 질적으로 우월한 쾌락이다. 그러면서 감각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이 더 우수한 것이라고 했다.

버트란드 러셀은 공리주의의 논리에 대해 몇 가지로 반박했다. 공리주의자들은 욕구하는 것이 곧 바람직한 것이라고 했다. 첫째, 욕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바람직한 대상은 욕구되어야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욕구의 대상으로부터는 바람직한 것을 알 수 없다. 대상이 욕구될 때에만 바람직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욕구가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은 맞지만, 어떤 것이든 쾌락 때문에 욕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배고플 때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배고플 때 쾌락 때문에 음식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쾌락을 직접적으로 욕구하는 경우가 있지만, 모든 욕구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Russell, 1946).

이제 공리주의자들의 관점을 검토해보자. 로크가 자기 이익과 전체 이익은 길게 보았을 때 일치된다고 한 주장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할인 쌍곡선 편향에 의해 단기적인 쾌락을 과대평가하므로 쾌락을 추구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단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인 큰 쾌락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쾌락을 위해 단기적인 쾌락을 무조건적으로 마다하는 것도 공리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옳지 않다. 미래의 쾌락이라는 것은 늘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쾌락을 해치지 않으면서, 단기적인 쾌락도 해치지 않는 그런 쾌락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우월한 쾌락일 것이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이자,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 심리의 제1시스템과 제2시스템에 관해 이야기했다. 제1시스템은 반사 체계로, 근시안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제2시스템은 숙고 체계로, 장기적인 쾌락을 고려할 수 있다. 카너먼은 제일 좋은 것은 제1시스템과 제2시스템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Kahneman, 2011). 건강에 나쁘지만 맛있는 정크 푸드를 먹는 것은 제2시스템을 어기고, 제1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다. 맛잇는 정크 푸드를 참고 건강을 챙기는 것은 제2시스템을 위해 제1시스템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합치시킬 수 있다. 건강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된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건강한 음식으로도 정크 푸드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정크 푸드가 나쁜 이유는 그 맛 때문이 아니라, 그런 맛있는 맛을 내는 음식을 싸고 빠르게 만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도 쾌락을 느낄 수 있고, 건강하게 먹는 것에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쾌락들은 미래의 쾌락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요리하는 것도 귀찮다면, 돈으로 사면 된다. 자본을 더 많이 사용하면 건강함, 맛, 간편함 등의 모든 옵션을 만족하는 음식을 얻을 수 있다.

두 번째로 볼 것은 러셀의 공리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이다. 그는 쾌락은 그 자체로 욕구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쾌락은 욕구의 귀결로 나타날 뿐이다. 그의 말은 아주 합당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되기도 한다. 쾌락은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경우도 분명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욕구하는 것을 잘 달성하고 있는지, 잘 획득하고 있는지에 대한 증표로써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쾌락 자체를 추구하는 향락 동기에 속하는 욕구들의 경우, 그 자체를 추구해야겠지만, 다른 동기들에서 나타나는 쾌락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욕구가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위에서 살펴본 단기적 쾌락과 장기적 쾌락의 조화 속에서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도 일치한다. 예를 들어, 지위 동기에서 오는 쾌락은 지위를 획득했을 때 오는 자부심과 기쁨 등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을 때의 쾌락 자체 때문에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지위의 본질을 고려하여 추구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랑 동기에서 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고려하여 추구해야 한다. 각 동기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각 동기에 대해 다룬 권에서 설명하겠지만 말이다. 쾌락 자체 때문에 추구하는 것은 ‘향락’ 동기에 속하는 것들에 한하며, 그것도 장기적 쾌락과 단기적 쾌락을 조화시켜서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기적 쾌락을 더 잘 추구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