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런스 맬릭, 〈트리 오브 라이프〉, 2011
스포일러 있음
아버지를 통해 들여다 보는 고통과 죽음의 섭리
영화는 처음에 욥기의 구절로 시작한다. 욥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욥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의로운 자였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과 내기를 하자고 한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풍족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식들도 잃고, 재산도 잃고, 피부병까지 걸려 건강까지 잃는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지은 어떤 죄 때문에 욥이 고통받는 것이라 주장한다. 욥은 자신은 의로우며 결백하니, 차라리 하나님이 나타나서 자신이 지은 죄가 있다면 이야기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짜로 나타나며 욥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욥기 38:4, KJV)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 (욥기 38:7, KJV)
이 영화는 하나의 섭리를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하나는 자연의 혹독함이고, 하나는 종교적 교리이고, 하나는 주인공의 육체적 아버지이다.
이 영화에서나 아니면 다른 대부분 신화나 문학에서는 섭리를 두 가지로 나누어 비유를 한다. 하나는 자비로운 역할이고, 하나는 심판하는 역할이다.
자연은 풍부한 생명의 근원으로 우리에게 모든 풍족한 자원을 가져다준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곡식을 내고, 강과 바다는 물고기를 준다. 하지만 자연은 동시에 인간에게 혹독한 환경이기도 하다. 병이나 장애, 기아, 늙음과 죽음 같은 고통도 주고, 극한의 추위와 황무지, 독이 있는 동물들,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자들 모두 다 자연이다.
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는 자비로운 구원자의 역할로 생명의 씨를 뿌리고 잘 자라도록 인도한다. 슬픈 자에게 위로를, 고통받는 자에게 희망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역할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신약의 역할로 나타난다. 이것은 영성에 속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대접하며,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대고, 인간들을 대신해 죗값을 치룸으로써 인간을 구원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등, 신약은 우리가 해야 할 자비로운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심판자의 역할로 그는 거두어들이는 자이다. 세속적 욕망의 삶을 금지하고, 가혹한 고통을 내리는 역할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구약의 역할로 나타난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유월절에는 누룩 섞인 빵을 먹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우상숭배하지 말고, 살인과 도적질을 하지 말라는 율법이자, 도그마이다.
이 영화는 그런 섭리를 주인공의 부모님으로도 보여준다. 하나는 따듯한 사랑을 주는 어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한 규칙을 가르치며 주인공의 욕망을 억압시키는 아버지이다.
그러나 서로 상반된 이 두 존재는 사실 하나의 존재이다. 하나의 신이며, 하나의 자연이다. 부모님이 둘 다 우리를 사랑하듯이 말이다.
이 영화는 두 존재 중 특히 엄격한 신, 혹독한 자연, 아버지에 대해 다룬 영화이다. 물론 두 존재가 하나이니 자연과 신의 자비로운 측면을 안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행복에는 의문을 갖지 않고, 고통에만 의문을 갖는 법이다. 이 세상은 고통이 가득하고, 악의에 찬 자가 선한 자보다 더 잘 사는 세상이다. 신이 있다면 그럴 수 있는가? 자연은 우리가 경외심을 느낄만큼, 느껴야 할 만큼 그렇게 자비로운가? 그 섭리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영화이다.
영화 초반에는 주인공인 잭의 동생이 죽은 상황이 나온다. 잭은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온다. 어머니는 오열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달랜다. 둘째는 아주 순수했던 아이였다. 주인공인 첫째의 악행에도 불평하지 않고, 형을 항상 믿고 따랐던 아이다. 형과 싸우는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형과 싸우는 것 자체가 싫어서 싸우지 않겠다고 하던 순수한 아이이다. 그랬던 선한 아이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때 내레이션에서는 신 혹은 자연에게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세속적인 삶을 살지 말고, 자비와 은총 아래 있는 삶을 살라고. 그분께서는 치유가 필요한 상처에 구더기를 보내시는 분이라고 나온다. 의문이 든다.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구더기를 보내시는 분이지만, 상처가 나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기도하는 대상이 자연이라면 당연하고, 신이라면 어쨌든 신의 주관 아래에서 상처가 나고, 둘째가 죽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은 방관자인가? 그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묻는 것에서부터 영화는 포문을 연다.
이때부터 영화는 주인공의 탄생부터 이야기를 전개한다. 별과 은하, 태양, 화산과 유황, 미생물과 바다의 해파리, 사막, 해변의 자연들을 계속 오버랩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랑으로 주인공을 잉태했다. 주인공이 물 속의 방에서 나가는 것으로 출산이 표현된다. 사랑스러운 아이 잭은 어머니의 사랑 아래 동생과 함께 무럭무럭 자란다. 걸음마를 배우고,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화단에 잭을 위한 나무를 심는다.
아이가 좀 더 자란 뒤에는 아버지로부터 규칙을 배우기 시작한다. 식탁에는 팔꿈치를 올리면 안 되고, 아버지의 말끝을 잘라서는 안 된다. 이웃집 마당을 넘어가도 안 되고, 맥그리거 씨의 채소밭에도 들어가면 안 된다. 잔디를 예쁘게 잘 깎아야 한다. 해야 할 의무와 하지 말아야 할 금지에 대해 배운다. 강하게 커야 한다고 엄하게 교육하며, 한 길만 팔 것을 이야기한다. 자녀들에게 하기 싫은 복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한다.
잭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늘 억압하는 존재인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아버지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머니에게 아빠는 왜 태어났냐고 묻는다.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건 다 금지라고, 그래서 자기는 하기 싫은 걸 한다는 잭의 독백은 잭이 얼마나 억압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비로운 사랑을 주는 어머니도 아버지를 이해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좀 더 사랑으로 대해줬으면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식탁에서 혼내는 것에 폭발해 아버지에게 당신도 당해보라며, 더러운 행주로 복수를 한다. 그러나 곧 저지를 당한다.
잭은 점점 커가면서 신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 뒤로 선한 자에게도 죽음이 닥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친구는 이유 없이 화상을 입었다. 화상 입은 아이는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걸어다니는 것도 본다. 어머니와 함께 봉사하러 가서 범죄자들이 고통 받는 것도 본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묻는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냐고? 그들은 어떤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세상이 너무 비합리적이다. 신은 고통이 넘치는 세상을 왜 방관하고 있는가? 신은 왜 선한 자에게도 고통을 내리는가?
그러나 주인공에게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아버지가 먼 곳으로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잭은 이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 동생과 문 쾅 닫지 말라고 혼내는 아버지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기도 한다. 어머니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개구리를 폭죽 로켓에 묶어 날려보낸다. 어머니에게 들켰지만, 어머니가 두렵진 않다. 잭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아버지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건지 묻는다. 잭은 아버지가 없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빈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부수기도 한다. 친구는 잭에게 말한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다 한다고 말이다. 잭은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말을 따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만 없다면 잭은 두려울 게 없다. 잭은 아버지를 죽일 것 같은 충동에까지 휩싸인다. 아버지가 차 밑에 들어가 수리를 하고 있을 때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지지대를 발로 차면 바로 아버지는 차에 깔려 죽는다. 그러면 자신은 완전한 해방이다. 자신을 억압하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잭은 상상만 하지만, 한순간 잭은 어렸을 때 봤던 고통받는 범죄자들처럼 될 뻔했다.
잭의 행위는 점점 과감해지고, 좋아하던 여자애의 속옷을 훔친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고통스러워 한다. 훔친 속옷을 나무 밑에 숨겨보지만, 근처 지나가는 배가 혹시 봤을까 두려워 흘러가는 강물에 잽싸게 버린다. 이제 죄책감은 잭을 따라다닌다. 어머니에게 말할 수도 없다.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다.
잭의 악행은 점점 더 심해져 자신을 믿고 따르던 동생에게 총구에 손을 갖다대보라고 한다. 동생은 형을 믿기 때문에 총구에 손을 대지만, 잭은 격발한다. 동생은 잭과 달리 순수하다. 잭은 동생에게 사과를 하고, 자신을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된다고 한다. 동생은 금새 웃으며 때리는 시늉만 하고 형과 장난을 친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억압 받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한 것도 동생이다. 동생의 반항은 친구의 속삭임과는 달리 어리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표현하지 못하는 반항의 표현에 통쾌해하며 동생과 더욱 유대감을 쌓았던 것이다.
다시 영화 처음으로 돌아가면 그랬던 동생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섭리에 대한 합리성에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출장에서 돌아온 뒤 잭은 아버지와 화해한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잭에게 이유를 말한다.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런 강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너무 엄격하게 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한다. 잭은 자신도 못되게 굴었다면서 아버지에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 자기는 아버지를 더 닮은 것 같다고 한다. 아직 갈길이 멀지만, 아버지 덕분에 남자로 거듭났다는 뜻일 것이다.
잭의 회상으로부터 현재로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보자. 동료는 옛 애인이 다시 결합하자는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잭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동료는 즐기며 살 것이라고 한다. 잭은 세상이 탐욕에 눈 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쫓겨 살다가 당신을 잊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신은 필시 거두는 자를 의미할 것이다. 어릴 때의 잭이 아버지가 출장 갔을 때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처럼, 거두는 자를 잊으면 탐욕에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단련한다. 욥기는 선한 자에게만 고통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자에게도 고통이 올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고통은 신실한 자를 더욱 강하게 단련한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어찌 알겠냐고 책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도 의미가 있다.
지켜주는 신은 거두시는 신이도 하다. 나무 뿌리 뽑듯이 거두어 가신다. 잭을 기념해서 아버지가 나무를 심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나무이다. 방울토마토를 키운 적이 있는데, 방울토마토는 실내에서 아무 바람 없이 있는 것보다 바람에 흔들리며 자랄 때 더 빨리 자라고 줄기도 튼튼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며 자란 나무가 더욱 튼튼하게 자라듯이 우리의 고통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나무도 언젠가 뽑혀 사라진다. 나무가 바람의 의미나 심은 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도 신과 자연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순 없다.
이제 자연에 눈을 돌려보자. 부모님을 통해, 신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했으니, 신의 섭리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이해해보자.
자연의 모습은 영화에서 계속 오버랩되어 나왔다. 자연에 의지가 있는가? 그냥 그 모습으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자연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자연이 우리에게 고통을 선사한다면 혹독한 환경이나, 신을 원망한다. 의미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자연은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다. 공룡, 귀상어, 가오리, 알 속의 생명, 토성과 목성, 소행성 모두 자연이다. 인간도 나무도 자연이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자연이고, 섭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 행복과 고통 모두 자연이고, 섭리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어머니는 하늘과 나무를 통해서 말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자연을 통해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 씨를 뿌리고, 지켜주고 거두는 것 모두 자연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잭이 꿈에서 죽음의 관문을 넘었을 때, 가족들과 동생들과 인사를 나눈다. 삶도 자연이고, 죽음도 자연이고, 죽음 이후도 자연이라면 죽음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는 다시 바다로 간다. 탄생을 준비하는 곳은 어디였는가? 물 속의 방이었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은 탄생인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생명의 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생명의 나무에 대한 뜻을 이해하진 못했다. 오히려 감독의 다른 영화 〈보이지 오브 타임〉을 보고 나서 생명의 나무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나는 〈트리 오브 라이프〉와 〈보이지 오브 타임〉이 완전히 이어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고통에 대한 섭리를 피력하느라, 죽음에 대한 섭리나 자아의 경계를 넓히고 나면 보이는 ‘생명의 나무’에 대해서는 마음껏 표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아마 그런 주제가 전부 다 들어갔으면 영화를 보는 내 머리가 혼돈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으니, 다행인 것 같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내용부터는 마지막에 몰아친다고 느껴졌다. 그 아쉬움이 다른 작품인 〈보이지 오브 타임〉에서 마음껏 표현된다. 그래서 이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는 주제곡도 죽음의 본질에 다가간 음악이 쓰이진 않는다. 그냥 죽음을 표현한 음악만 있을 뿐이다. 장송행진곡인 말러 1번 4악장이나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등이 쓰인 것이다. 참고로 내가 완전히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다음 영화 〈보이지 오브 타임〉에서의 주제곡은 《말러 2번 “부활”》이다.
죽음의 섭리를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영성이 호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 말라는 것의 이유를 이해했고, 고통과 죽음의 섭리를 이해했고,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자연의 섭리가 하늘과 나무를 통해 대답한다. 나뭇잎 하나, 햇살까지 사랑하며 살아라. 순수한 사랑을 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