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Zone of Interest (Jonathan Glazer, 2023, Poland-UK-USA, 105m, Col)
스포일러 있음
악의 실재를 오직 텍스트, 수치, 이미지라는 거울에 비춰서만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러면서 담장 안 저들과 선을 긋는 이들에게 보내는 조소
이 영화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홀로코스트(쇼아)라는 악과 유리된 듯이 살아가는 회스 가족을 그린다. 그러나 회스 가족은 주인공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관객이다.
잡초와 꽃
영화는 악에 무뎌진 인간들이 얼마나 평범한 인간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까지 무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회스 가족의 집에 있는 아름다운 꽃들, 온실, 풀장, 미끄럼틀, 편안한 의자, 그리고 담장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구름은 그들의 거주 공간을 지상 낙원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파란 하늘에 연기가 섞인다. 유대인들을 소각함으로써 발생하는 검은 연기다. 회스 가족에게 그 연기는 그저 흰 구름 사이에 섞인 먹구름쯤으로 보이는 듯하다. 총격 소리와 비명 소리도 그들에겐 그저 백색소음일 뿐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는 그 연기를 보면서, 그 비명을 들으면서 어떻게 저 공간에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치 당원으로서 높은 지위를 얻은 이들, 유대인 말살을 당연시 여기는 집단 내부에 있으면 자신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건 안에 속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감독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회스 가족의 역겨운 모습을 점점 더 강하게, 그러나 점점 더 담담하게 그린다. 영화 초반 회스의 가족과 나치 당원들은 가족의 가장인 루돌프 회스의 생일을 축하하고, 루돌프는 술잔을 들고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준 이들에게 축배사를 건넨다. 담장 밖에서는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누군가는 자신의 탄생을 축하받으며 기뻐한다.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는 어느 유대인의 옷이었던 털 코트를, 자신의 민족이 죽인 다른 민족의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루돌프와 아이들은 강에서 놀다가 유대인 시체들의 잔해가 떠내려와 급하게 그곳을 떠난다. 이어지는 신에서는 욕조에서 재 때문에 눈이 따갑다며 “짜증 나”라고 말하는 아이들을 비춘다. 악에 무뎌진 부모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그리고 그 동족의 재를 씻겨낸 것은 유대인 여인이다. 그녀는 아이들이 떠난 후 그 욕조를 한동안 응시한다.
헤트비히는 정원의 잡초를 뽑으며 “이놈의 잡초들”이라고 말하는데, 후에 나오게 될 신의 대사에 유대인을 비슷하게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유대인들은 잡초로, 자신들은 아름다운 꽃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 꽃이 피로 물든 붉은, 악의 꽃인 줄은 모른 채로 말이다.
헤트비히의 엄마가 헤트비히의 집에 찾아와 지내기로 한다. 헤트비히는 집의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에게 자랑한다. 엄마는 딸이 이렇게 멋진 집을 가꾸고 이렇게 잘 사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한다. 헤트비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루돌프는 나보고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래요.” 이 말에 두 모녀는 낄낄대며 웃는다. 그런데 독일인이라는 우월의식에 빠져 있고, 끌려간 유대인들의 물건을 경매로 사려 했던 헤트비히의 어머니가 늦은 밤에 담장 너머에서 발생하는 연기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그제야 악의 실재를 진정으로 마주한다. 자신의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딸의 집을 떠나버린다.
루돌프는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가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아우슈비츠를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떠나야만 했다. 헤트비히는 자신의 일평생 꿈이었던 집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서 그곳에 남겠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이 벌어진 그곳에 말이다. 전근을 간 루돌프는 더욱 열심히 일했고, 다시 아우슈비츠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독일인들만 있던 파티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더 많이 죽일지 고민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돌아오지 못할 곳까지 가버린 루돌프에게 극도로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루돌프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구역질을 한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하지만 관객은 토사물을 볼 수 없다. 마치 지워낼 수 없는 루돌프의 악의 자국을 보여주듯이. 만약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관객은 인간(타인)의 악에 대해 분노하며 영화관을 나왔을 것이다.
관객에게 보내는 조소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구역질을 하던 루돌프는 한 줄기 빛을 응시한다. 그 빛은 현대로 통한다. 수용소 내부를 볼 수 있는 전시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유대인 수감자들의 신발 더미, 그들의 목발, 악기 같은 물건들, 그들의 사진들… 감독은 관객들에게 당신들도 회스 가족과 다르지 않다는 듯이 조소를 보낸다. 전시관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악의 실재를 그저 역사 속 한 사건쯤으로 여기는,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비웃는다.
마지막 신을 보기 전까지는 나도 모르게 루돌프와 헤트비히에게 선을 그었다. 그들의 역겨움에서 나를 유리시켰다. 그러나 악의 실재를 텍스트, 수치, 이미지라는 거울에 비춰서 어스름하게만 보았던 나도 그들과 똑같았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전시관에 있던 유대인들의 수많은 신발들이, 목발이, 악기가 유리창을, 담장을 허물고 내 발 앞에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걸린 사진들이 그저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사진이 아니라 한 명 한 명 다른 인간의 사진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나치의 악행과 유대인의 공포, 절망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나도 지긋지긋하게 역겨운 인간이었다.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가 생각났다.
밖에서 본 화장터는 그림엽서를 보는 듯 아름답다. 오늘날 여행객들이 그곳 앞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사람들은 수용소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고 그곳에 간 자신이 마치 ‘의식 있는 인간’이라도 된 양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린다. 수용소에 온 자신의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은 도대체 어떤 행위인가? 인간은 자신들이 같은 종에게 저지른 악을 너무나도 쉽게 잊고, 너무나도 쉽게 경계를 풀어버린다.
유리창을 허물지 못한 인간은, 루돌프와 헤트비히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감독의 냉기 어린 시선은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이 포스터가 그저 루돌프나 헤트비히도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나타내는,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포스터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얼굴은 우리들의 얼굴이다.

이제 관객은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과 충격, 절망에 휩싸여 극장을 나오게 된다.
집단과 악의 평범성
악의 실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악의 실재를 외면하지 않는 것, 잊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악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차단하는 일일 테다.
역사 속에는 개인이 저지른 악도 수없이 존재했지만, 같은 종을 가장 많이 고통스럽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집단적 악이다. 믿기 힘든 집단적 악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수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아는 사람들은 정말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과 개념을 아는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음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명령을 머리로 이해했던 사람이다. 나는 아이히만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자신이 없다. 집단 속에서 내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어느새 악에 물들어 있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구역질을 하고, 그럼에도 그 구역질을 외면하는 인간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자신이 없다. 아이히만은 강한 신념을 갖고 악을 자행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저 집단 속에서 악에 무뎌졌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했을 뿐이다.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고, 되고 있다.
나는 집단에 소속되기를 혐오해 왔는데, 그런 마음이 더 강해진다. 집단에 속해 있으면 내집단 편향과 동조 효과에 물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경계하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악이 집단적으로 행해지고 있는가. 집단이라는 경계를 허물지 못할수록 악의 평범함은 만연해질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행하는 악이 팽배할 것이다.
조소와 호소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과 같은 수많은 영화들이 떠오르는데, 그중 가장 강하게 이 영화와 연결되었던 건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퍼니 게임>이다. <퍼니 게임>은 무덤덤하게 폭력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거의 농락하는 수준의 영화다. 감독은 선한 가족을 괴롭히던 사이코패스들에게 돌아간 복수를 관객이 가장 통쾌해 할 시점에 리모컨으로 시간을 돌려, 폭력을 기다리고 있던 관객을 보란듯이 비웃는다. 그에 더해 영화가 끝날 때쯤엔 사이코패스 주인공 한 명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대놓고 관객을 희롱한다. “너도 똑같아.”라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역시 관객에게 말한다. “너도 똑같아.”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하네케의 영화와 글레이저의 영화에는 차이가 느껴진다. 두 영화 모두 관객의 폐부를 칼로 찌르지만, 하네케의 영화는 염세적 시선이 담겨 있는 반면 글레이저의 영화는 조소와 호소가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너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냐고 묻는 듯하다.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차갑고 더러운 물은 우리 기억 속의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 이 괴상한 감시탑으로부터 누가 새로운 위협에 대한 메시지를 경고하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들과 다른 모습인가? …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과 짧은 순간만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진정 어린 눈길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 잔해들 속에 잔인한 괴물들이 이 파편들 아래에서 숨어 있다는 생각으로, 이겨내야 한다.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지더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주장을 관철시켜야 한다. 설상 우리가 평화롭더라도, 캠프의 재앙에 대해서라면, 그 시간과 장소에 오직 한 번만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우리는 의식이 있는 맑은 눈으로 우리 주위를 제대로 보고 귀를 열어 인간애의 끊이지 않는 통곡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알랭 레네, <밤과 안개>
“그 시간과 장소에 오직 한 번만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레네는 1956년에 이렇게 말했고, 글레이저는 2023년에 이렇게 외친다. “그 시간과 장소에 오직 한 번만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조소와 호소를 동시에 보낸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수많은 신발들이 유리창을, 혹은 담장을 허물고 당신에게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면, 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라고 말이다.
예술과 프로파간다
수년 전부터 정치적 올바름이 시네마를 장악하고 있다. “이게 메시지야! 이 말을 들어!”라고 귀에 대고 소리 지르는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한 영화들은 예술인가? 나는 노골적으로 메시지를 주입하는 영화는 예술이 아닌 프로파간다로 여긴다. 그렇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파격적이고 예술적인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오직 이런 방식을 통한 외침만이 내 안에 꽁꽁 얼어붙은 것을 깨부수어준다. 프로파간다가 아닌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시네마들이 영화관을 장악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