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 모델에서 설정한 욕구의 위계는 타당한가?
욕구에는 확실히 위계가 있어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예쁜꼬마선충도 욕구에 위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쁜꼬마선충이 배가 고플 때에는 성욕보다 허기를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해보인다. 그러나 매슬로가 지적한 것처럼(Maslow, 1987), 그런 욕구가 100% 충족되어야만 다음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배가 적당히 고픈 상태에서는 성욕을 채우려는 욕구가 더욱 강력할 수도 있다.
인간의 욕구에도 더 강한 욕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맛있는 열매 한 보따리와 매력적인 잠재적 배우자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배부른 상황에서는 매력적인 잠재적 배우자를 유혹하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극심한 허기인 상황에서는 열매 한 보따리를 고를 것이다. 죽고 나면 현재와 미래의 소중한 번식 기회는 모두 사라진다. 아마 그래서 인간은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로 허기가 질 때에는 생존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생존의 욕구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실제로 이뤄진 실험이 있다. 안셀 키스(Ancel Benjamin Keys)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1년이 넘는 기간(56주)동안 실험 참가자들의 칼로리 섭취를 제한하는, 즉 참가자들에게 음식을 적게 먹이는 실험을 했다(Keys, 1950). 이 실험의 이름은 ‘미네소타 기아 실험’이었다. 당시에는 제2차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젊은 남자들은 징집되었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키스의 실험에 참가하면 병역의 의무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키스의 실험에는 2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으며, 총 36명의 남성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선별되어 참가하게 된다. 전쟁 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구호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들이 매우 많게 된다. 그러므로 키스의 실험은 당시에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었다. 굶주림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연구였으며, 전쟁으로 인한 기근 상황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연구였다(Tucker, 2006).
참가자들은 처음 12주 동안은 하루에 약 3,200칼로리를 먹었다. 이것은 건장한 남성이 활동적인 신체 상태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 이후 24주 동안은 참가자들이 섭취하는 칼로리가 절반 이하로 철저하게 제한되어, 참가자들은 기아 상태에 돌입했다. 이때 참가자들에게는 1,560칼로리의 음식이 제공되었으며, 이외에는 커피와 차, 껌이 허용되었다. 그러면서 일주일에 러닝머신으로 35㎞ 이상을 걸어야 했다. 참가자들은 이후 12주 동안 8개 그룹으로 나눠져 서로 다른 제한된 칼로리를 섭취하게 되었다. 이는 기근 상황에서 어떻게 먹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알기 위한 실험이었다. 대부분 참가자 그룹은 이때까지도 섭취 칼로리가 여전히 부족한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마지막 8주 동안은 재활 기간으로 자신이 먹고 싶은 만큼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었다.
24주의 기아 상태와 12주의 제한적 회복 상태에 돌입했을 때 참가자들의 행동을 보자. 식욕을 충족할 수 없게 된 참가자들은 이상 징후를 점점 보였다. 먼저 여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졌다. 웃긴 영화를 봐도, 멜로 영화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성욕이 감소했고, 사회적인 욕구도 사라졌다. 실험 전에 외향적이었던 참가자들조차 사교에 대한 욕구가 사라졌다. 두 명의 무종교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들은 기독교 계열의 교파였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대부분 세계 평화를 지지하고, 세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아 상태에 돌입하자 실험 참가자들은 그런 세계 문제에는 관심이 없게 되었다. 실험 참가자 중 한 명이었던 밥 윌러비(Bob Willoughby)는 이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세계 문제나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이들이 다시 정상적인 수준의 성욕과 사회적인 욕구를 회복하는 데에는 실험 중단 후에도 약 9개월이 걸렸다. 기아 상태 동안 그들의 힘은 매우 감소했다. 제이 가너(Jay Garner)라는 참가자는 심지어 도서관의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어서 다른 꼬마가 와서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우울증이나 히스테리 등 심각한 정서적 고통을 앓았다.
참가자들의 머릿속은 온통 음식 생각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 음식에 대한 백일몽도 꾸었다. 참가자들은 TV를 봐도 음식 관련된 프로그램을 봤다. 가너의 즐거움 중 하나는 카페에 가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음식 절반을 남기고 가는 것을 보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책을 봐도 요리 책을 봤는데, 어떤 참가자는 25권이 넘는 요리 책을 수집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음식이 나온 접시까지 핥아먹었다. 대화도 온통 음식 이야기만 했다. 가너는 하루에 껌을 18통이나 씹었고, 어떤 참가자는 하루에 껌을 50통 이상 씹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구진이 껌 한 통에 4칼로리 정도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자, 껌은 하루에 2통으로 제한되었다. 어떤 참가자는 식료품 가게에 가서 감자, 당근, 양파를 훔쳐 먹어서 실험에서 중도 탈락했다. 어떤 참가자는 식료품 창고에서 과자와 바나나를 훔쳐 먹은 뒤 토해서 실험에서 중도 탈락했다. 어떤 참가자는 쓰레기통을 뒤졌다. 어떤 참가자는 일기를 쓰라고 지급된 연필에서 심을 빼고 나무를 씹어먹었다. 일기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샘 레그(Samuel Legg)는 도끼를 들 힘도 없었지만, 자신의 왼손에 도끼를 올려놓고 손가락 3개를 절단했다. 그는 너무 배고파서 그랬지만, 손가락을 먹진 않았다. 어쨌든 그 이후로 참가자들이 밖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동행자와 함께 나가야 하는 규정이 신설되었다(Tucker, 2006).

그림 1. 《라이프지》 19권 5호 (1945.07.30.) p. 43.에 실린 사진, 미네소타 기아 실험 참가자들인 샘 레그(왼쪽)와 에드워드 코울스(오른쪽)
출처: Wallace Kirkland/Time Life Pictures/게티 이미지
식욕이 해결되지 못했을 때 사회적 욕구나 성적 욕구가 사라지는 것을 보아, 식욕이 성욕이나 사회적 욕구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욕구의 위계는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봐도 맞다. 사회적 욕구의 출현 이후에 지위 추구의 욕구가 생겼을 것이다. 관계 없이 수직적 관계를 먼저 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지위의 기원은 합의적 지위의 관계로부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런 욕구의 위계가 매슬로가 주장한 그런 욕구의 위계의 형태인지는 검토해봐야 한다. 위계가 반드시 직렬로 있어야 하는가? 모든 위계가 일직선상에 있는가? 매슬로의 후기 욕구 이론인 8단계 이론에서 정말로 심미적 욕구나 인지적 욕구가 과연 존경의 욕구보다 위에 있는가?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욕구는 심미적 욕구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적 증거에 의하면, 이런 심미적 욕구는 지위에 대한 추구 이전에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반드시 모든 욕구의 위계를 직렬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욕구들은 병렬로 존재할 수도 있다.
현대에 이뤄진 연구 중에 매슬로의 욕구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대규모로 시행된 연구가 있다. 123개국의 60,865명을 조사한 연구 결과, 인간에게는 문화적 차이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욕구가 존재하지만, 욕구의 위계는 매슬로의 이론처럼 명확하지는 않았다(Tay & Diener, 2011).
네 번째,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상위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가?
하위 욕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이 상상의 사람은 생리적 욕구를 채우고, 조금 나아가 향락적인 욕구만 채우다가 죽었다. 이런 삶을 최고로 잘 산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좋은 삶이라는 것은 인간성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하위 욕구 또한 인간의 욕구이긴 하지만, 이는 동물과도 공유하고 있는 욕구이다. 그렇다면 동물도 살 수 있는 삶은 인간적으로 가장 잘 산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매슬로의 주장처럼 상위 욕구로 가는 것이 좋은 삶에 가까운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매슬로의 상위 욕구로 나아가는 방식에는 한 번 의문을 품어볼만 하다.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상위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까? 사회적 욕구 위에 존경의 욕구가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관계보다 지위 추구의 욕구를 먼저 달성하려고 한다. 사람들에게 친화적으로 다가가기 전에 군림하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미네소타 기아 실험을 살펴보자. 참가자들 중 연구원의 눈에 띠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맥스 캄펠만(Max Kampelman)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허기로 인해 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을 때, 그는 여전히 세계 평화에 관심이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연구원들이 대학에 나가서 수업도 들으라고 격려해야 했지만, 캄펠만은 달랐다. 그는 실험 기간 동안 로스쿨을 마치고, 정치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그해 9월 2일 일본 제국은 항복 조인식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식된다. 미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라디오로 이 소식을 들으며 매우 기뻐했다. 어떤 수병은 이성을 잃고, 할머니며, 젊은 여자며 할 것 없이 거리의 모든 여자와 키스하고 다녔다. 미네소타 기아 실험에 참가자들도 라디오로 식사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잠깐 식사를 멈추었다가 그것과 상관 없이 다시 식사하는 데 열중했다. 제이 가너는 참가자들이 음식에 집중하며 전쟁이 끝났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캄펠만은 달랐다. 그는 그해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에도, 원자폭탄은 사람들이 희생자의 고통을 보지 않게 한다는 비판을 했다. 실험 종료 이후 그는 정치학 석사, 행정학 석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나중에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으며, 레이건 정부 미국 국무부 고문으로 활약했다. 또한, 미국이 소련과 무기 협상할 때에도 크게 활약했다. 그는 총 13개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렇듯 하위 욕구의 충족이 이뤄지지 않아도 사람들은 상위 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 가난한 예술가들도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면 그것은 좋은 삶과는 약간 거리가 멀어보인다. 자기 초월을 추구하며, 남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용을 베푸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대단한 사람이고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의 가족들이 그것 때문에 평생 고생한다면 어떤가? 이는 논란이 있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이 본받을 만한 좋은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다. 쉽게 살 수 있는 삶은 좋은 삶이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의 좋은 삶은 인간의 삶을 비교함으로써 얻어지는데,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중요한 한 가지 전제가 숨어있다. 바로 좋은 삶이란 다른 제약 조건이 없을 때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발휘하여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냐고 하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좋은 삶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대신, 자신과 가족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고 해보자. 사람들의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이런 삶은 여전히 살기 어려운 삶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원하는 삶은 아니다. 사람들이 추구하지만, 현실의 제약으로 그렇기 어렵다면 그것은 좋은 삶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그렇기 어렵다는 이유로 좋은 삶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좋은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매슬로의 욕구 이론에서 욕구 위계에 대해 검토한 것에 대해 정리해보자. 심리학자들은 욕구가 여러 수준에서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Wahba & Bridwell, 1973). 욕구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반드시 아랫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의 욕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욕구를 위계에 따라 배열할 때 욕구의 강도로 배열 하되, 반드시 직렬로 배열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이러한 배열은 아랫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 욕구의 충족을 추구하는 것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