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감상에서 빠져나오자. 인간이 저마다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해서, 보편적인 삶의 목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저마다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합리화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결점이라는 아름다움에 취해 인간이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다시 논리를 전개해보자. 인간이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은 모든 삶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목적이 존재하고, 그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의 심리는 전부 알고리즘이다. 그런데 이런 알고리즘에는 개인적인 다양성이 허용된 것도 있고, 허용되지 않은 것도 있다.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는 지는 개인적 다양성이 허용된 편에 속한다. 어떤 사람은 빨간색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파란색을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첫째, 특정 색깔을 좋아하는 성향은 유전적으로 각인된 알고리즘일 수 있다. 그렇다면 특정 발달 시기에 유전자가 발현되어 특정 색깔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런 성향은 유전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둘째, 특정 색깔을 좋아하는 성향은 자신이 속하는 사회의 문화적 압력에 의해 생성된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런 성향은 문화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화적 압력에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유전적으로 각인된 알고리즘일 수 있다. 셋째, 특정 색깔을 좋아하는 성향은 개인적 경험 등에 의해 습득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 지 처음으로 질문을 받아봤을 때 답한 경험이나, 특정 색의 물체에 집착을 갖는 경험을 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일상 생활에서 우연히 특정 색의 아름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한 문화 내에서도 그런 선호는 개인에 따라 전부 다를 것이다. 그러나 특정 색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화되거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등은 유전적으로 각인된 알고리즘일 수 있다. 어쨌든 색상에 대한 기호는 사람들마다 다양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개인적인 다양성이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색상에 대한 선호에서 개인적 다양성이 완전히 허용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연의 붉은 색의 화려한 줄무늬나 점박무늬는 독이 있는 경우가 흔하므로 그런 색상과 무늬를 싫어하는 경향은 강화됐을 수도 있다. 혹은 꽃은 열매가 열리기 전의 신호를 나타냈으므로 꽃의 화려한 색상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화됐을 수도 있다. 그런 경향은 사냥보다 채집을 주로 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났을 것이다. 이런 색상 선호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쩄든 조사를 하면 특정 색깔에 대한 선호나 기피가 정규분포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색상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무작위적인 것이라면 정규분포를 따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을 예상하는 것은 어떤 예시든 가능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색상에 대한 선호를 무작위적이고, 개인적 다양성이 완전히 허용된 예시로 가정하자.)

그런데 사춘기 이후 이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은 편에 속한다. (동성애의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사랑’ 장에서 다룰 것이다. 만약 내 후손들 중 동성애자가 있어 이 문단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면 미리 사과하겠다. 만약 후손들 중 그런 자녀가 있다면 나는 오히려 기쁠 것이다. 자녀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 사실을 기뻐할 타당한 이유도 분명히 있다. 궁금하다면 ‘사랑’ 장까지 잘 읽어보자.) 거의 모든 사람은 사춘기 이후 이성에 대한 애욕을 느낀다. 한 문화 내에서 이런 알고리즘은 거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문화의 압력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문화에 따라서 이런 성향은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알고리즘은 문화에 상관 없이 모든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성향이다. 그렇다면 이런 성향은 대부분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알고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어떤 알고리즘은 개인적 다양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고, 어떤 알고리즘은 허용되지 않을까? 개인적 다양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부분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알고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그런 다양성을 허용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다양성을 허용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특히 자연의 원리 중 자연 선택과 성선택에 의한 것이다. 알고리즘은 변이를 통해 다양하게 생긴다. 변이를 통해 어떤 개체는 검정색을 좋아하고, 다른 어떤 개체는 흰색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런 알고리즘이 개체의 생존이나 번식의 유불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이런 다양성은 허용된다. 그러나 이런 알고리즘이 개체의 생존이나 번식의 유불리에 영향을 미친다면, 자연은 선택압과 도태압으로 다양성을 제거한다. 알고리즘이 생존과 번식의 유불리에 더욱 깊게 관여할수록 이런 다양성은 강하게 제한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알고리즘은 도태되고, 유리한 알고리즘만 남게 된다. 이것이 진화이고, 그래서 진화의 핵심 원리는 변이, 유전, 선택인 것이다.

생물체가 진화를 통해 생겨났다는 사실은 재현가능성에 의존하는 사실은 아니다. 진화는 한 생명의 생존 주기보다는 훨씬 길기 때문에 재현하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생물학적, 고고학적 증거들이 진화론을 귀납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또한, 추론으로 생각해봐도 합리적이다. 만약 어떤 알고리즘들이 변이를 통해 다소 무작위적으로 생기고, 그런 알고리즘들이 유전된다고 해보자. 그런 알고리즘 중 생존에 유리한 알고리즘은 점점 선별될 것이고, 생존에 불리한 알고리즘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어떤 알고리즘이 번식 전까지 생존하는 데에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면 그런 알고리즘을 가진 개체는 번식 전에 죽어서, 그런 알고리즘이 후대에 퍼지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거꾸로 어떤 알고리즘이 번식 전까지 생존하는 데에 유리한 영향을 끼쳤다면 그런 알고리즘을 가진 개체는 성공적으로 번식 적령기에 이르고, 번식을 통해 그런 알고리즘이 퍼지게 되었을 것이다.

변이를 통해 A라는 개체는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고, B라는 개체는 음식을 먹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런데 음식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A는 계속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번식할 때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번식을 해서 음식을 좋아하는 A의 성향은 자손들에게 퍼졌다. 반면에 B는 음식을 먹는 것을 혐오하므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굶어죽었다. 이 개체의 음식을 혐오하는 알고리즘, 성향은 B가 죽을 때 함께 사라진다. 번식을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어떤 알고리즘이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존과 죽음 두 가지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알고리즘이 생존과 번식에 1%만 도움이 되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A가 음식을 좋아하는 성향은 생존과 번식에 1% 도움이 된다고 해보자. B가 음식을 좋아하는 성향은 생존과 번식에 1% 불리하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런 성향이 완전히 유전되었다고 가정해보자. 100세대 이후에 A의 자손들은 음식을 좋아하는 알고리즘이 없는 개체보다 270%나 더 많이 살아남았다. 1.01의 100제곱은 약 2.7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100세대 이후 B의 자손들은 음식을 혐오하는 알고리즘이 없는 개체보다 63%가 더 죽었다. 0.99의 100제곱은 약 0.37이기 때문이다. 이는 약 270% 더 불리해진 것과 같다(0.37의 역수). 그러므로 유전자 풀에서 A와 B의 자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A의 자손들이 B의 자손들보다 7.4배 정도 더 많은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100세대는 시간으로 환산하면 (20–30살 사이에 자녀를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2천–3천 년으로 긴 시간이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이런 시간은 아주 우스운 작은 시간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출현했으니, 이는 인간에게는 약 1만 세대를 의미한다. 생존과 번식에 1%만 도움이 되는 성향이 복리로 누적되면 1만 세대 후에는 그런 성향이 없는 개체보다 약 16,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배 더 남아있을 것으로 계산된다. 이는 ‘1600정’이라는 숫자로, ‘1조 × 1조 × 1조’를 하고서도 1600만을 더 곱해야 하는 숫자이다. 거꾸로 생존과 번식에 1% 불리한 성향이 복리로 누적되면 ‘1조 × 1조 × 1조’를 하고서도 4400만을 더 곱해야 하는 숫자 배수만큼 불리하게 된다. 그런데 음식을 찾는 성향이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부터 시작되었겠는가? 그런 성향의 알고리즘이 생물의 초기 형태인 남조류 때부터 진화했다면, 진화의 시간에서는 1만 세대도 아주 우스운 시간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런 계산은 약간 비합리적일 수 있다. 중간에 변이가 또 다시 개입할 수 있고, 환경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 시간에서 진화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이와 유전은 이미 발견되고 증명된 사실이다. 그런데 변이와 유전이 있다면, 정말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알고리즘은 강화되고, 불리한 알고리즘은 도태되는 쪽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학적, 고고학적 증거와 더불어 사실로부터 추론한 내용도 진화가 참이라는 것을 귀납적으로 가리킨다.

그렇다면 저마다의 삶의 가치가 존재하고, 그러므로 보편적인 삶의 의미나 보편적인 좋은 삶에 대해 정의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이제 완전히 반박될 수 있다. 저마다의 삶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은 의식의 합리화나 허용된 알고리즘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개인과 문화를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알고리즘이 있다. 그런 알고리즘은 자연 선택과 성 선택에 의해 남게 된 것이다. 그런 공유된 알고리즘이 있다면, 공유된 알고리즘으로부터 보편적인 삶의 의미와, 좋은 삶을 추론해낼 수 있다. 문화나 개인의 경험에 상관 없이 그것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있는 알고리즘이기 때문이다.

좋다. 우리는 보편적인 좋은 삶에 대해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좋은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너 성공했다! 축하한다.’, ‘잘 살았구나!‘라고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공통된 맥락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순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건강하게 살아갈 때, 근심과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때, 광범위한 지식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했을 때, 그런 지식을 습득했다는 자격을 얻었을 때, 많은 친구를 두었을 때, 혹은 적은 친구더라도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뒀을 때, 좋은 스승을 만났을 때, 좋은 스승이 되었을 때, 남들이 우러러보는 지위를 획득했을 때,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을 때, 배우자와 금술이 좋아 행복하게 살아갈 때, 아이를 낳았을 때, 아이를 많이 낳았을 때, 아이가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나이까지 잘 길러냈을 때,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봉사했을 때,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고 발전시켰을 때, 지병 없이 오래 살다가 편안하게 죽을 때 , 미련이나 후회 없이 죽을 때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문화를 초월하여 공유하는 우리의 본능적 인식이다. 아직 이런 부분으로부터 좋은 삶을 정의하진 말자. 그래도 이런 공유된 인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간의 좋은 삶을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 영향을 주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라난 문화끼리도 이런 인식은 많은 부분 공유될 것이다.

요약

직관에 의하면 인간이 알고리즘이 아니라 자유 의지에 의해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의식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무의식은 알고리즘에 따라 사고나 행동을 결정한다. 의식은 무의식이 내린 결정에 대해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식의 권고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무의식에게 달려있다. 리벳의 실험이나 현대의 다른 뇌 과학 연구에서 뇌에서 결정이 이미 이루어진 후에 의식이 결정을 내렸다고 느끼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의식은 이미 내려진 결정에 대해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하려고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을 의식의 합리화라고 한다. 분리 뇌 환자들에 대한 실험이나, 다른 현대의 실험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나 행동은 모두 알고리즘이다.

의식의 합리화는 알고리즘에 의해 당연한 것들을 인간들이 당연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인간 삶을 아름답게 해준다. 경외감, 숭고함, 황홀함, 깊은 사랑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기본적인 감정들이 의식의 표현에 의해 증폭된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좋은 삶이나 삶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는 의식의 합리화나 허용된 다양성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의견으로부터 보편적인 좋은 삶을 추론할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된다.

인간의 어떤 알고리즘들은 문화적 수준에서 다양성이 허용되고, 어떤 알고리즘들은 개인적 수준에서도 다양성이 허용된다. 그러나 그런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는 알고리즘이 있는데 이는 자연 선택과 성 선택으로 인한 것이다.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은 자연의 기본 원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알고리즘이 있다. 개인과 문화를 초월하여 인간들 사이에 공유된 알고리즘이 있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좋은 삶,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추론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