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 〈현기증〉, 1958

Vertigo (Alfred Hitchcock, 1958, USA, 128m, Col)

스포일러 있음

타인이 되어서야만 받을 수 있는 사랑, 사랑의 대상의 부재

6–7년 전, 내가 위대한 영화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알랭 레네, 장 르누아르, 페데리코 펠리니, 장뤽 고다르, 버스터 키튼,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감독들의 영화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히치콕의 <현기증>은 그 포문을 열어준 영화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고전 영화는 다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만약 각잡고 처음으로 본 고전이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 이후로 고전들을 지금처럼 많이 보지 못했을 것 같다. 고전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설렘과 막연한 기대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매우 고마운 영화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여러 매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을 선정할 때 수없이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대단한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현기증>은 그의 역작 중에서도 최고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이 영화도 여러 매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를 선정할 때 수없이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거장 영화 감독 박찬욱은 이 영화를 보고 영화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든 것인가? 히치콕이 창조한 영화 기법, 여러 상징들, 구도, 나선형 이미지들, 제임스 스튜어트와 킴 노백의 연기, 버나드 허먼의 음악, 이디스 헤드의 의상 모두 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든 요소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주디(매들린)의 양가 감정과 스카티의 무력함, 허무에 온전히 이입했던 궁극의 감정적 체험이 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줄거리

존 스카티 퍼거슨은 형사다. 그는 동료 형사와 어떤 남자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소공포증 때문에 동료가 죽게 만든다. 이후 그는 형사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어느 날 대학교 동기 개빈 엘스터에게 연락을 받아 그를 만나러 간다. 그는 은퇴한 형사 스카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는데 그건 자신의 아내, 매들린을 미행해달라는 것이다. 개빈은 아내가 마치 그녀의 증조 할머니의 혼이 씌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그녀의 증조 할머니는 칼로타 발데스로, 자살한 인물로 그려진다). 스카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매들린을 미행하는 일을 맡는다.

스카티는 정말 칼로타 발데스의 혼의 씌인 것처럼 행동하는 매들린을 계속 미행하고, 그러다 샌프란시스코만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던 매들린을 구한다. 물에 젖은 매들린을 구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몸을 녹이게 하고,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대화를 한다. 매들린은 다음 날 스카티의 집에 편지를 주러 찾아오고, 그들은 같은 차를 타고 돌아다닌다. 그 날 이후로 그들은 계속해서 같이 다니고, 서로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다. 스카티는 죽은 자에게 지배되어 자꾸만 죽음 곁으로 다가가려 하는 매들린을 지켜주고 구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결국 교회 종탑으로 올라가 투신하고 만다. 스카티도 종탑으로 따라 올라가 그녀를 구하려고 했지만, 고소공포증이 다시 도져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 생긴 트라우마로 스카티는 오랜 기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온다. 나오자마자 매들린의 흔적을 좇던 그는 길에서 매들린과 아주 닮은 한 여성, 주디를 보게 되고 그녀가 묵는 엠파이어 호텔까지 따라가서 방문을 두드리고야 만다. 그런데 주디는 사실 매들린과 동일한 여성이었다. 매들린의 남편 개빈 엘스터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짰고, 매들린과 닮은 주디를 계획에 이용한 것이었다.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는 사전에 개빈이 살해한 그의 아내였고, 미리 준비한 시신을 아래로 던진 것이었다. 치밀하게 짜여지고 이행된 이 계획의 단 한 가지 변수는, 매들린과 스카티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스카티는 당연히 주디가 매들린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주디는 스카티를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해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자신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나머지, 스카티를 떠나지 못하고 진실을 숨긴 채 그의 곁에 남는다. 하지만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지 얼마 지내지 않아 스카티는 주디를 매들린처럼 바꾸려고 한다. 매들린처럼 입히고 머리를 바꾸게 한다. 주디는 그것이 싫으면서도 스카티를 너무나 사랑해, 자신을 매들린처럼 바꾸는 것을 허락한다. 그것만이 스카티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매들린처럼 입고 스카티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녀는 실수로 칼로타 발데스의 목걸이를 한다. 그 목걸이를 보고 스카티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주디를 교회로 데려간다. 종탑으로 올라가길 거부하는 주디에게 그곳으로 올라갈 것을 강요한다. 이전에 자신이 올라갔던 높이까지 도착하자 스카티는 주디에게 자신이 진실을 알게 됐음을 밝히고 사고 현장인 맨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스카티는 배신감과 허탈함을 느끼며 주디를 추궁하는데, 주디는 스카티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고 당신도 날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스카티는 너무 늦었다고, 죽은 매들린을 살려낼 방법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주디의 애원에 그녀에게 키스한다. 그 순간 수녀 한 명이 올라오고 놀란 주디가 종탑 아래로 떨어져 죽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죽음의 대비

이 영화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죽음의 대비, 그리고 죽음의 상징으로 사용한 초록색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스카티는 총 4번의 죽음, 혹은 죽음과 유사한 상태를 마주한다. 첫 번째는 동료 형사의 죽음, 두 번째는 매들린의 자살 시도, 세 번째는 매들린의 자살, 네 번째는 주디의 죽음이다. 이 네 번의 죽음은 두 가지 형태로 대비된다. 한 가지는 장소, 다른 한 가지는 낮과 밤이다.

처음 동료 형사가 죽은 곳은 금문교가 보이는 지붕이었고, 밤이었다.

매들린의 자살 시도는 금문교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낮이었다.

매들린의 자살(엘스터 부인 시체 유기)은 교회 종탑에서 이루어졌고, 낮이었다.

주디는 교회 종탑에서 죽었고, 밤이었다.

낮에 있었던 죽음은 모두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밤에 있었던 죽음은 모두 실재했다. 매들린이 금문교 아래로 뛰어들었을 때는 스카티가 그녀를 구할 수 있었고, 스카티가 본 매들린의 투신은 가짜였다. 그러나 형사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것과 주디가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것은 진짜 죽음이었다. 그리고 스카티는 그 옆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한 남자였다. 한 번의 밤은 그를 공포 속에 가라앉게 했고, 두 번의 밤은 그를 깊은 심연에 가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영원히 무력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죽음의 상징, 초록색

이 영화에서 초록색은 곧 죽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카티는 개빈의 부탁을 듣고 어니스 레스토랑에서 매들린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그때 그녀는 초록색과 검정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고 있다.

스카티가 매들린을 미행할 때마다 자연스레 매들린의 차가 보이는데, 차 역시 초록색이다. 여기까지는 마치 초록색이 매들린을 상징하는 색 같다.

그런데 매들린이 금문교 아래 뛰어들고 스카티가 그녀를 구해 집으로 데려온 다음, 그녀가 깨어나고 둘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스카티는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있다. 그가 초록색 옷을 입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와 처음 이야기하는 시점에 스카티가 초록색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매들린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자 그가 그녀의 진짜 죽음에 개입되는 순간임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스카티가 길에서 주디를 보게 되었을 때 그녀가 입고 있던 옷 역시 초록색이다. 주디는 여러 번 초록색 옷을 입는다. 그녀는 매들린보다 더 초록색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주디가 매들린의 그림자,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녀가 초록색이 아닌 옷을 입은 건 세 번인데, 그 세 번 중 한 번은 연보라색 옷, 한 번은 매들린의 회색 정장, 한 번은 매들린이 입었을 법한 검정색 이브닝 드레스였다.

그녀가 연보라색 옷을 입은 날은 스카티와 다시 만나게 된 첫 날 저녁이었다. 스카티는 그녀에게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갈 것을 제안하고, 그녀는 그를 뿌리치지 못해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스카티가 떠나고 주디는 그를 속였던 일을 생각하며 떠나려고 짐을 챙기고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스카티, 드디어 저를 찾아내셨군요. 바로 제가 두려워 하면서도 소망한 순간이죠.

···

완벽한 계획을 세웠고, 한 치의 오차도 없었죠. 내가 실수를 했어요. 사랑에 빠졌으니까. 그건 계획된 게 아니었는데.

···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날 사랑하길 바라요. 내가 철면피라면, 여기 남아 거짓말을 하고 날 다시 사랑하게 하련만… 나, 진짜 나를 말이에요. 그렇게 다른 나는 잊고, 과거도 잊고. 하지만 내게 그런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편지를 다 쓰고 주디는 그 편지를 찢음으로써 용기를 낸다. 매들린으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진짜 주디로 사랑받기 위해서.

그녀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브라도 입지 않고, 주디 그 자체로 어니스 레스토랑에 간다. 주디로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그러나 스카티는 주디를 앞에 둔 채 매들린과 비슷한 정장을 입고 비슷한 머리를 한 여성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카메라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 주디를 잡는다. 바로 다음 숏은 초록색 불빛이 켜진 엠파이어 호텔 전광판을 담는다. 카메라는 방 안으로 들어가 (호텔 전광판의 초록색 불빛 아래) 의자에 앉은 주디의 실루엣만 비춤으로써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를 매들린 안에, 죽음 안에 가둔다. 그때 그녀는 알았다. 자신은 결코 ‘진짜 나’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실낱 같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이 순간이 곧 이 사랑의 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디가 입은, 초록색이 아닌 두 번째 옷은 바로 회색 정장이다. 회색 정장을 입은 고상한 여인의 모습은 스카티가 생각한 매들린의 형상 그 자체였다. 주디가 그녀 자신은 개의치 않으며 매들린이 되어서라도 사랑받겠다고 결심한 후로 입은 첫 번째 옷이다. 그 옷은 매들린의 그림자 그 자체다.

주디는 머리 색을 바꾸고, 매들린의 눈과 입술을 하고, 회색 정장을 입고 스카티 앞에 나타나지만, 단 한 가지만은 바꾸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헤어스타일이다. 주디 자신으로서 사랑받고 싶었던, 마지막 희망만은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매들린이 되어서라도 사랑받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카티는 왜 자기가 요구한 대로 머리를 올리지 않았냐고 묻는데, 이때 거울에 비친 방문에는 계속해서 초록빛이 일렁인다. 스카티는 매들린과 똑같이 머리를 올려달라고 말한다. “부탁이오, 주디.“라는 그의 말에 주디는 결국 초록빛이 일렁이는 그 문으로 들어간다.

주디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스카티에게도 결국 호텔 전광판의 초록빛이 비친다. 주디는 머리마저 매들린과 똑같이 한 채로, 자신을 살해한 채로 문에서 나온다. 그 모습을 꼭 환영 같이도 비춘다. 그 전까지 주디와 키스하지 않았던 스카티는 그제서야 주디(혹은 매들린)와 키스한다. 카메라는 그들의 키스를 어둠 속에서 비추며 돌다가, 초록색 배경에서 키스하는 둘을 마지막으로 숏을 끝낸다. 스카티와 주디가 초록색 불빛 아래 함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는 스카티가 주디의 죽음에 개입되는 순간임을 알릴 뿐만 아니라, 스카티의 정신적 죽음을 예고하기도 하는 장치 같았다.

주디가 입은, 초록색이 아닌 마지막 옷은 검정색 이브닝 드레스다. 스카티는 초록 불빛이 비치는 의자에 앉아 있고, 주디는 초록빛이 일렁였던 그 문에서 나온다. 매들린이 입었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매들린이 했을 법한 귀고리를 하고, 칼로타 발데스의 목걸이를 하고. 그리고 그 날, 그녀는 죽는다.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한 가지 색을 정말 정교하게도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정교함이 매혹적이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끝을 품은 사랑

살인 계획에 동참해 다른 여자를 연기한 여인, 그 여인과 사랑에 빠진 남자, 그 여인의 죽음, 다시 나타난 그 여인을 닮은 여인에게 품은 희망, 다른 여인이 될 것을 종용하는 남자, 다른 사람이 되어서라도 사랑받고 싶은 여인.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여러 차례 이들의 사랑이 이미 끝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스카티는 어니스 레스토랑에서 처음 매들린을 보게 된다. 아마 스카티는 그때 이미 매들린에게 연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매들린의 옆모습을 비춘 후, 그녀가 떠나자 흔들리는 스카티의 눈동자를 비춘다. <현기증>을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나선형 계단 이미지, 다른 하나는 어니스 레스토랑에서 매들린의 전설적인 옆모습이다. 붉은 색의 레스토랑 배경, 금발의 머리카락, 초록색 드레스, 그리고 매들린의 아름다운 얼굴.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 것 같다. 스카티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때의 옆모습이 여러 번 등장한다. 스카티가 차 안에서 칼로타 발데스에 대한 책자를 보며 매들린을 떠올릴 때, 처음 레스토랑에서 봤던 매들린의 그 옆모습을 떠올린다. 그녀와 차를 타고 동행하게 되었을 때 스카티가 훔쳐보듯 매들린을 한 번 쳐다보는데, 그때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흉내낸다. 그는 무의식중에 흠모하던 그녀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쳐다본다. 미행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남자. 뒤틀린 사랑과 불행의 시작이다.

스카티와 매들린이 한 차를 타고 동행하기 전, 스카티가 매들린에게 물었다. 둘이 따로 다니는 게 좀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냐고. 그때 매들린은 혼자 다니면 방랑자지만, 둘이 함께면 항상 어딘가 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국 방랑자가 되지 못했다. 어딘가로 가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매들린이 바닷가로 걸어가자, 스카티는 따라 뛰어갔다. 매들린은 왜 뛰었냐고 묻고, 스카티는 대답한다. “I’m responsible for you now.” 한 번 구한 생명은 영원히 책임져야 한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한다. 매들린의 자살이 가짜였으므로 스카티는 그녀를 구한 적도 없고, 따라서 그녀를 영원히 책임지지도 못한다.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시퀀스를 생각나게 하는 바닷가 신에서 매들린은 스카티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하고, 키스하며 “날 떠나지 말아요. 나와 함께 있어요.“라고 말한다. 스카티는 “언제라도.“라고 대답했다.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들의 바로 다음 만남 때 매들린은 스카티에게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죽음에 대해 말하고, 스카티는 그 날 오후에 매들린을 교회로 데려가서 악몽을 끝내줄 것을 약속한다.

오후에 스카티와 함께 교회로 가는 매들린의 표정은 참 슬프다. 이것이 사랑하는 스카티와 함께 하는 마지막임을, 그들이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슬퍼하는 표정 같다. 반대로 스카티의 눈빛은 ‘내가 그녀의 악몽을 끝내리라’는 결의에 가득차 있다.

교회에서 스카티는 매들린의 악몽을 끝낼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하고, 계속해서 “매들린, 지금은 어디에 있죠?“라고 묻는 스카티에 괴로운 매들린은 한 순간만이라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마차에서 내려 키스하며 서로 사랑을 고백할 때, 매들린은 계속해서 너무 늦었다는 말을 한다(이는 스카티가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신과 대비된다). 매들린은 교회로 달려가며 이건 옳지 않다, 너무 늦었다, 이렇게 되어선 안 되는 거였다고 말한다. 이건 그녀의 ‘실수’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다.

매들린은 “날 잃고 나면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계속 사랑하고 싶어했단 걸 알 거예요.“라고 말하고, 스카티는 “난 당신을 잃지 않을 거요.“라고 말한다. 이런 스카티를 비웃듯이 영화는 다음 신에 스카티의 고소공포증과 매들린의 투신을 막을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을 가장 예술적으로 담는다. 너무나 잔인하다.

주디와 다시 만난 순간부터는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잔인하다. 스카티가 엠파이어 호텔에서 주디의 방 문을 두드렸을 때, 스카티의 눈동자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러나 아마 스카티는 매들린이 죽은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것을.

주디가 꽃을 고른 직후부터 그들의 불행은 극대화된다. 주디는 낮부터 스카티와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했다. 같이 걸어다니고, 자신이 원하는 꽃을 고르고 스카티가 그 꽃을 옷에 달아줄 때까지는. 그런데 스카티는 그녀에게 옷을 사주려고 한다. 주디는 다른 옷을 원하지만 스카티는 강경하게 그녀에게 매들린과 똑같은 옷을 입히려고 한다. 똑같은 회색 정장을, 똑같은 이브닝 드레스를, 똑같은 갈색 구두를.

주디는 그를 떠나고 싶으면서도 떠날 수 없다. 스카티가 그녀에게 매들린의 옷을 강요했던 날,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그냥 그 자체로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묻는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을 좋아해주기만 한다면 그깟 옷은 입을 수 있다고 말하는 주디. 그렇게 하면 자길 사랑해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는 없다.

칼로타 발데스의 목걸이를 한 주디를 보고서 그녀를 교회로 데려가는 스카티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매들린이 종탑으로 올라가기 전에 했던 말처럼. 주디가 들어가기 싫다고 말하는데 스카티는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매들린이 했던 말과 똑같이.

이제 매들린이, 주디가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된 스카티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스카티의 친구 미지가 이렇게 말했다. “내 주치의 말이 충격을 받아야 고쳐질 거래, 그래도 안 고쳐질 수도 있고. 설마 그걸 알아보려고 또 지붕에 올라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는 이제 다시 한번 ‘지붕’에 올라가려고 한다. 주디가 종탑 위로 올라가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그 사고현장까지 올라갈 수 있다면, 자신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카티는 결국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생각대로 구원받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배신감, 허탈함에 잠식되었다. 그는 주디를 몰아세웠지만 주디는 “제발, 당신도 날 사랑하잖아요.”, “날 보호해 줘요, 제발!“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이미 너무 늦었다"라고 말하면서도 키스를 하는 순간,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나버렸고 이미 너무 늦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거짓말로 범벅되었던 사랑은, 처음부터 이미 그 끝을 품고 있었던 사랑은, 이제 막을 올렸다.

타인이 되어서야만 받을 수 있는 사랑, 사랑의 대상의 부재

이 영화는 주디(매들린)가 느끼는 양가 감정과 스카티의 무력함, 허무에 온전히 이입하게 함으로써 궁극의 감정적 체험을 선사한다.

매들린은 스카티를 사랑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는 없고, 그래서 떠나야만 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 완벽한 계획의 실수(오점)라고 말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실수가 되는 입장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주디는 스카티를 떠나고 싶으면서도 떠나기 싫어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사랑받을 수가 없다. 매들린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되어서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 일인가.

주디는 진실을 말하고 싶으면서도 진실을 말하기 싫다. 진실을 말하면 스카티가 사랑했던 실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녀는 사랑받을 수 없다. 진실을 숨기고서라도, 타인이 되어서라도 사랑받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다.

처음 봤을 때는 주디의 입장만 보였는데, 다시 보니 스카티도 너무 안타깝다. 스카티가 사랑했던 것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고급스럽게 입고 행동하는, 칼로타 발데스의 혼에 사로잡힌, 유약하고 음울한 엘스터 부인인가? 아니면 엘스터 부인, 매들린을 연기했던 주디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성격을 지닌 주디가 연기한 매들린인가? 스카티는 그 모두를 사랑했으면서 동시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분명 사랑하는데 사랑의 대상은 부재하는 것이다.

이토록 비통한 감정들을 살면서 어떻게 경험해볼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것 같다.

<현기증>은 문학이, 텍스트가 주지 못하는, 오직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음을 느끼게 해준 영화다.

기타

  • 스카티의 친구 미지도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미지는 스카티의 대학교 동기로, 대학교 때 둘은 약혼한 적도 있다. 미지는 스카티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의 감정은 조금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스카티가 매들린을 미행하기 시작하고, 그가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자 미지는 그에게 호감을 품기 시작한다. 서점 주인에게 칼로타 발데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스카티에게 엘스터 부인이 예쁜지 물어본다. 여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질투한다는 뜻일 테다. 샌프란시스코만에 빠진 매들린을 스카티가 구해준 뒤 집에서 불을 쬐게 하고, 매들린이 그 집에서 나왔을 때 미지가 매들린을 보았다. 아름다운 매들린을 본 미지의 표정은 씁쓸해 보인다. 만약 미지가 스카티를 좋아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이때부터는 확실히 스카티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그 후 스카티가 미지의 집에 들어오는 인기척이 날 때, 미지는 머리를 한 번 매만진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스카티는 언제나 미지의 집에 먼저 불쑥 들어오곤 했지만, 이 날은 미지가 먼저 스카티 집 문에 쪽지를 끼워넣었다. 언제부터 깊어졌는지도 모를 이 연정은 계속된다. 매들린의 죽음 이후 스카티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미지는 애정어린 표정으로 스카티에게 노력해보라고 말한다(이는 스카티가 매들린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미지는 병원을 떠나면서 의사에게 스카티가 매들린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정신이 반쯤 나간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슬픈 표정으로 일러준다. 미지를 보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른 아름다운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느껴지는 질투와 갑자기 시작되는 연정을 왠지 알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 버나드 허먼의 음악이 이 영화에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버나드 허먼은 <싸이코>의 전설적인 음악으로 더 유명하지만, 내게는 이 영화 음악이 그의 최고작이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참고해서 음악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게 이 영화와 더없이 어울렸다. 매들린의 회색 정장을 입은 주디가 머리까지 매들린과 똑같이 한 채 초록 불빛이 일렁이는 문을 뒤로 하고 나올 때 삽입된 음악은 정말 마스터 터치다.

  • 이디스 헤드의 의상들이 하나같이 세련되었다. 초록색과 검정색이 섞인 드레스, 회색 정장, 검정 드레스, 흰색 코트에 검정 장갑, 검정 스카프까지. 지금 봐도 이 정도로 세련된 의상들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영화 자체가 곧 의상들을 닮아 있다. 영화가 매들린의 옷들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고 세련되었다.

  • 이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나선형 계단이 너무나 아름답다. 한때 그 계단 위에 제임스 스튜어트가 서 있는 사진을 정말 좋아했는데, 지금 봐도 정말 아름답다.

  • 크게 웃었던 대목이 있다. 스카티가 미지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알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역사 전문가가 있냐"고 묻는데, 이때 미지가 여심을 겨냥하는 인사라면서, “안녕, 오늘 예쁜데.” 이런 말 안 하고 냅다 “샌프란시스코 역사가…“라고 말을 꺼냈다고 비아냥댄다. 히치콕의 유머 감각이 살아 있다고 느꼈던 대목이었다.

  • 아마 히치콕이 의도하고 그렇게 연기하도록 요청했겠지만, 매들린과 주디를 분한 킴 노백의 억양이 당시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여자 배우들처럼 과장된 톤이 아니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