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와 욕구 이론들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인생론을 더 살펴보고 가자. 삶의 목적을 정의한 사람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의 인생론의 논리에서도 분명 우리가 취할 것이 있으니 확인하고 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 결론에 이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 의술의 목적이 건강하려는 목적에 종속되듯이 말이다. 이렇게 어떤 목적이 다른 목적에 종속될 때는, 주된 목적이 종속된 목적 보다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종속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주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되며, 다른 목적을 위해 추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다른 목적들이 행복이라는 목적에 종속될 지언정, 행복이 다른 목적에 종속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최고 목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진화심리학적 해석의 반박을 받는다. 이런 논리의 환원이라면 사실 잘못된 진화심리학적 해석 중 하나인 삶의 목적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결국 행복도 생존과 번식의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생존과 번식의 적응 문제들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지표가 된다. 또한, 행복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사랑을 나눌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감은 인간이 다시 맛있는 것을 먹고, 다시 사랑을 나누기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행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행동이나 사건을 통해 얻은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야 그런 생존에 도움이 되는 사건이나 행동을 다시 추구할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결국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삶의 궁극적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잘못된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잘못된 논리가 전개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의지적 목적과 기능적 목적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지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생존과 번식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우리는 분명 행복도 그 자체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호기심이 생존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정확히는 생존보다는 유전자에 도움이 된다. 호기심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개체를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이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기심에 독버섯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희생된 개체 덕분에 그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친척들은 그런 위험한 상황을 피할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나 유전자에게는 이득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일리가 있다. 분명히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목적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지의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 엄청난 갈증 상황에서 물을 원하는 것은 살기 위한 것다. 이런 의지의 주종 관계는 누구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물이 없다면 곧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 물을 찾는 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은 곧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화심리학적 해석에서 살펴본 것처럼 삶의 목적을 여러 개로 두어야 하지만, 만약 어떤 의지에 다른 의지를 추구하기 위함인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위 의지로 묶어낼 수 있다. 극심한 갈증에서 물을 마시려는 의지나 극심한 허기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의지는 모두 살기 위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그냥 음식이 아니라 특정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의지를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각이나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촉각에서 비롯되는 쾌락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살고 싶다면 그냥 음식을 먹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것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칼로리가 높거나, 영양소가 골고루 있는 것을 맛있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방을 추적하기 위해 고소한 맛을 느끼고, 단백질을 추적하기 위해 감칠맛을 느끼고, 탄수화물을 추적하기 위해 단맛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생존에 아주 중요한 나트륨을 추적하기 위해 짠맛도 느낀다. 거꾸로 부패하여 산성을 띠는 음식에는 신맛을 느끼고, 독이 포함되어 있어 염기성을 띠는 음식에는 쓴맛을 느낀다. 이런 것들은 꺼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의지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들은 생존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과거의 오랜 진화 과정 동안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표현하자면, 행복은 과거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방을 추구하는 우리의 강한 의지는 과거 환경에서는 분명히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 과거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으므로, 중요한 에너지원인 지방을 잘 추적하고 그것을 강하게 갈망하는 것은 분명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지방을 원하는만큼 섭취할 수 있다. 도시에는 피자 가게나 치킨 가게가 널려있다. 그러다보니 지방을 과도하게 섭취하게 된다. 그래서 지방을 추구하는 강한 의지는 현대 환경에서 각종 심혈관 질병을 유발한다.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방을 추구하는 것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의지는 지방을 섭취함으로써 얻어지는 쾌락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한 또다른 근거로 지난 번에 잠깐 보았던 대체당에 대한 예시를 들 수 있다. 우리가 단맛을 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보통 그것이 과거 환경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단맛을 원하는 것에 생존하기 위한 의지, 그러니까 칼로리를 많이 섭취하려는 의지가 반영이 되어있다면 우리는 대체당을 싫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 당이든, 대체당이든 단맛이라면 다 좋아한다. 그것은 단맛을 추구하는 것이, 생존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맛으로부터 오는 쾌락 때문에 추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행복이 과거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대상을 추구하게 만드는 기제라면, 고통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해가 되는 대상을 회피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그렇다면 삶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어서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라는 몇몇 철학자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고통도 그런 해가 되는 기제를 완벽히 회피하도록 하지 못할 수 있다. 또는 과거 환경과 현대 환경이 바뀌어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과 번식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통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어떨 때에는 고통을 감내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어떨 때에 고통을 회피하고, 어떨 때에 고통을 감내할지 기준을 세우려면 목적의 본질을 정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논의에서 삶의 목적을 정의하는 데에 중요한 지침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우리의 심리 기제는 다른 심리 기제에 종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의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 어떤 의지가 다른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더이상 환원하면 안 된다.
둘째, 행복은 삶의 목적들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지표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행복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행동과 상황을 추적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경이 변했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삶을 사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행복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을 추적하긴 하지만, 대체당의 예시처럼 완벽하게 추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봤듯이 생존과 번식은 분명히 궁극적인 삶의 목적 중 ‘하나’이므로,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살고자 하는 의지와 번식하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에게 분명히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동기는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나 번식하고자 하는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삶의 목적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동기 이론들을 살펴보고 좋은 삶을 정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