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논의한 대로 의식이 두 가지 역할을 한다고 해보자. 의식이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논리적 검토를 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역할은 합리적이다. 합리를 추구하기 위해 논리적 검토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가설을 보자.
본능은 당장의 이익만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고려라는 말도 부적합한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이유는 우리 마음에 본능이 생성되던 아주아주 오랜 기간 동안에는 단기적 이익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동물이나 같은 종의 다른 개체와 상호작용하기 시작하면서,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이익을 고려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본능은 중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해야 할 때 보통 감정에 의존한다. 단기적으로는 고통이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큰 이익인 사건을 우리는 갈망하고, 그런 사건을 달성했을 때 쾌의 감정을 느끼도록 말이다. 사냥하러 나가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냥을 하지 않는다면 에너지를 아낄 수는 있어도 굶어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을 느끼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하러 나간다. 사냥에 성공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의 보상 회로가 켜진다. 즉, 쾌의 감정을 수반한다는 뜻이다. 사냥에 나가는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를 상회하는 훨씬 큰 쾌의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냥하러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보상을 얻을 때 활성화되어 기쁨을 느끼게 되는 뇌의 보상 회로는, 보상을 기대할 때에도 활성화된다. 그래서 이곳을 기대·보상 회로라고도 한다.
감정이나 직관이 본능보다는 좀 더 중장기적인 손익을 고려하지만, 이것도 자동적인 결정이다. 그래서 감정이나 직관에 따르는 것도 사안이 훨씬 복잡할 때에는 합리적이지 못할 때가 있다. 자동적인 결정은 복잡하게 얽힌 모든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추론 능력을 가진 의식을 통해 사안의 조건들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파생될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의식이 검토한 의견은 그래서 다시 감정으로 보내진다. 실제로 합리적이라는 의식의 기능은 감정에 의존적이다.
가설에서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의식의 권한이 무의식보다 아주 작다고 하더라도, 의식이 무의식에 보낸 권고안이 받아들여질 때가 분명히 있다. 당장의 본능을 억제하고 더 큰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면, 의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두 번째 역할인 합리화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는 비합리적인 것 같다. 이미 내려진 결정에 대해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결정이 합리적인 척 할뿐이다. 의식의 합리화는 결정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합리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오히려 이는 우리가 결정을 내리게 된 진짜 이유를 알아낼 수 없게 하므로, 올바른 추론을 막는 것 같다. 이처럼 의식의 합리화는 진리를 가리는 역할을 하므로, 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합리화는 인간이 같은 행동이나 관념에도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그래서 삶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합리화가 결점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 질서 속의 무질서이고, 무질서 속의 질서라면, 알고리즘은 질서이다. 저마다 다양하게 부여하는 삶과 행동의 의미는 무질서이다.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결점이자 아름다움인 것이다.
왜 그런지 한 번 살펴보자. 우주에는 이러한 결점 없이 살아가는 인간보다 고등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당첨될 확률이 10분의 1인 게임이 있다고 해보자. 이 게임을 20번 하면 2번 정도는 당첨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사건이 평균적으로 발생할 횟수를 구하는 것을 기댓값이라고 한다. 기댓값은 확률과 시행횟수의 곱으로 계산할 수 있다. 지적생명체가 진화할 확률은 희박하다. 그러나 그것이 희박한 만큼이나 우주에는 별과 행성이 많다. 지적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는 확률에 그런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는 행성의 개수를 곱한 것이 드레이크 방정식이다. 드레이크 방정식에 의하면 우리 은하 내에만 약 16개의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관측 가능한 우주에서 이런 은하의 개수는 2000억 개가 넘어간다. 온 우주를 통틀어본다면 분명히 이러한 합리화라는 결점 없이 살아가는 고등한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합리화라는 결점이 없는 동물을 상상해보자. 그런 결점 없는 존재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인간보다 고등한 존재라면, 온 우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법칙, 진리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은 모두 그 존재의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 생명체는 자신 혹은 자신의 군집이나 전체 생명체를 위해 그런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진리를 발견했을 때의 경외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배우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 것도 종의 보전을 위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인간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았을 때 느끼는 삶의 의미와 황홀한 기쁨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타인이나 민족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도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개미나 꿀벌들이 종 보전을 위해 희생을 감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행동에 기본적인 감정은 있어도, 숭고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경외감, 숭고함, 황홀함,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 같은 깊은 감정은 당연히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려하고 문학적인 의식의 표현을 통한 증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합리화라는 결점이 없는 동물이 보는 세계는 필연적이기만 하고, 모든 사건이 당연한 세상일 것이다.
인간의 저마다의 합리화는 당연한 일들을 당연하지 않게끔 만든다. 당연한 사실들에서 아름다움과 행복,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존재는 필시 그런 경험을 느껴보지 못한 존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