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화양연화〉, 2000

왕가위, 〈화양연화〉, 2000

스포일러 있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역설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련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오는 영화였다.

영화가 정말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중요한 일을 직접 말하지 않고, 생략을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게 한다. 남자가 들깨죽을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복도에서 어쩌다 만나 들깨죽을 잘 먹었다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혹은 불륜을 재연해보자고 이야기하는 것 없이 바로 재연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이다. 남자 주인공의 아내나 여자 주인공의 남편의 얼굴은 영화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핵심적인 이야기만을 담백하게 담아내며, 생략을 통해 상상하게 한다. 또한 시어처럼 하나의 물건 안에 감정이나 의미를 담기도 한다. 특히 여자의 ‘신발’이 그랬다.

둘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은 영화 초반 ‘난처한 순간이다.‘라고 시작하는 자막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둘의 사랑이 왜 이뤄질 수 없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는 것이 포인트일 것이다. 둘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는 이유는 도덕 의식 때문이다. 욕망을 따른다면 둘이 도망가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그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도덕 의식은 진짜 도덕 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 도덕 의식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서로를 지켜주는 이야기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역설이 펼쳐진다.

남자가 무협 소설을 쓰기로 한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 이제 자기도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아내가 바람을 핀 것처럼 자신도 진짜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둘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연출도 어떻게 이렇게 조명과 색, 구도를 잘 짰는지 감탄이 나온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와 만날 때 계속 어떤 창문 앞에 서있다. 그 창문 앞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고 그런다. 그 창문의 철창 밖으로 두 사람이 보이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삿날부터 둘의 짐은 이것저것 섞인다. 사람들은 거실 같은 곳에서 공동생활을 하므로 각자의 사생활을 보장받을 공간은 없다. 사람간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서 누구에게나 간섭할 수 있는 홍콩의 도시 공간에서 주인공 남녀가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여자가 방 주인으로부터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핀잔을 듣자, 남자는 바로 무협소설 집필을 위한 방을 빌린다. 무협소설 집필을 위한 방 2046호는 여자를 그런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남자의 의지이자, 둘의 도피처이다. 둘은 이곳에서 사랑을 할 수 있다. 남자는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방으로 여자를 초대한다. 여자는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방으로 가지만, 그래도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여자는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다음 층으로 갔다가 눈치를 보며 2046호로 간다.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사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하기도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직장 상사는 불륜이 의심되는 여자를 보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상사도 불륜을 저질렀는데, 왜 상사는 여자의 불륜에 대해 못마땅해할까? 여자는 상사의 넥타이가 바뀐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상사에게 말했다. 상사는 자신의 불륜이 드러난 것에 대해 멋쩍어하며 원래의 넥타이로 바꿔나가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 불륜 같은 행동이 티가 안 날 수가 없는 도시이다. 사장은 아마 부하 직원인 여자 주인공으로부터 불륜을 지적 받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하 직원인 여자가 불륜 전화를 받는 것 같은 상황은 상사가 이렇게 생각할 만하다. ‘결국 너도 똑같은 부류였잖아?’ 그리고 여자는 당연히 이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여자가 크게 우는 장면이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황을 연습할 때이다. 그때는 2046호 안이었다. 즉 아직 남편이나 세상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떠나가는 것을 연습할 때 남자에게 기대어 오열한다.

결국 남자는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 떠난다. 둘은 사랑했지만 아무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던 일이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거실에서 마작하는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밤을 새고 국수를 나눠먹던 때, 여자는 하이힐로 갈아신느라 신발을 두고 간다. 남자에게 여자와의 사랑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신발 하나 뿐이다.

여자는 이후에 남자가 보고 싶어서 싱가포르로 간다. 그런데 남자의 방에 자신의 신발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을 보고 남자에게 자신이 왔었다는 것도 알리지 않은 채 신발을 가져간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를 위해 자신을 그만 잊으라고 신발을 가져간 것이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 신발을 찾는다. 담배에 묻은 립스틱을 보고 그녀가 왔다 갔다는 것을 그냥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추억할 수 있는 신발을 가져감으로써 이제 아무것도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앙코르와트는 화려했던 도시지만 결국 폐허가 되었다. 남자는 그 폐허에 비밀을 묻는다. 화려하고 강렬했던 감정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 것처럼 말이다. 둘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서로를 지켜주는 마음으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마음 아픈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손가락질 받는 것을 견딜 수 없고, 여자는 남자가 자신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다시 살던 집에 왔을 때 둘은 문 하나를 두고 만나지 못한다. 여자는 원래 남편과 자식도 낳아 살고 있고, 남자는 무협소설도 잘 출판했지만 둘은 만날 일이 없다. 서로를 위해 그러기로, 각자 아프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은 희미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