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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½ (Federico Fellini, 1963, Italy, 135m, BW)
스포일러 있음
가짜 자신을 죽이고 진짜 자신으로 살기 시작한 자의 영화
<8½>에서 구이도는 성공한 영화 감독이다. 가톨릭적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성적으로 억압되었고, 욕망을 표출한 그에게 부모님과 성직자들은 수치심을 주었으며 이는 그의 내면에 평생 자리하게 될 뒤틀린 욕망을 만든다. 성인이 된 그는 성적 방탕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아내 루이자를 두고 따로 만나는 정부 카를라에게, 어린 시절에 악마로 여겨졌던 여자 사라기나와 비슷하게 창녀처럼 굴 것을 요구할 정도로 뒤틀린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 꿈에서 나타나는 부모님과 아내 루이자는 그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 성직자들 역시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든다. 그는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그의 삶이 거짓으로 점철된 것은 당연한 운명이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그는 영화도 거짓으로 만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위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원할 것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채 영화를 구상한다. 그러니 자신조차도 영화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고, 이는 영화 관계자들에게도 고통을 안겨준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 구이도는 자신이 위선자임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이를 인지한 이상 그는 모든 거짓을 버리고 진실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진실된 삶을 택하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을 어찌할 수 없을 때, 현실과 이상의 괴리와 갈등이 고조될수록 그는 점점 더 극단적인 망상에 사로잡힌다.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숨어 살 수 있는 곳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망상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선택의 순간은 그를 점점 더 옥죄어오고, 그는 외부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에게 언제나 구원자의 이미지었던 클라우디아가 찾아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클라우디아는 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구원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 포도주 목욕을 위해 끌려갔던 때처럼, 구이도는 영화 촬영 현장으로 끌려간다. 신을 믿냐고 따지듯이 묻는 성직자, 온갖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 뭐라도 말하라는 제작자 사이에서 그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권총으로 자신을 살해한다.
바로 다음 신에서 구이도는 영화 세트장을 철거한다. 건설을 맡겠다고 한 회사가 한 군데도 없어서 모래 위에 세워진 구조물, 사상누각 상태의 구이도의 상징이었던 영화 구조물. 구이도는 그 구조물을 철거함으로써 거짓으로 점철되었던 자기 자신을 파괴했다. 그의 구원자는 클라우디아가 아니었다. 구원은 자기 안에 있었다. 그는 새로 태어났다.
이제 영화는 영화가 선물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구이도의 구원을 축하하는 축제를 연다. 광대들과 함께 어린 시절의 구이도가 피리를 불면서 그의 인생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온다. 제작자, 배역을 받길 원하던 프랑스 여배우, 성직자들, 사라기나, 글로리아, 친구 메짜보타, 부모님, 카를라, 그 외 모든 사람들. 그 사이에 구이도와 아내 루이자가 들어가서 같이 손을 잡고 돈다. 영화는 어린 구이도가 피리 부는 모습을 조명하며 막을 내린다.
어린 시절의 억압된 욕망과 수치심, 죄의식, 허영, 거짓. 그 모든 것과 진실되게 마주하고 그것들을 파괴한 후에 새로 자신을 창조한 존재와 그의 피조물들과의 화해. 그리고 그 축제를 이끄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만들어내는 음악 소리.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다운 엔딩이다.
페르세우스와 고르고네움, 구이도와 권총
얼마 전 배우자가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을 읽고 페르세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구이도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무찌른 영웅이다. 그 유명한 메두사를 눈으로 보는 사람은 돌로 굳어버린다.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신들에게서 빌린 무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테네 여신은 그에게 거울로 쓸 수 있는 방패, 고르고네움을 빌려주고, 그는 이 방패를 이용해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냈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흔히 허영을 뜻한다. 메두사는 수많은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메두사는 페르세우스 내부에 존재하는, 죄 많은 허영을 뜻한다. 그런 메두사를 직접 보기 어렵다는 것은 죄를 직시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죄를 축소해서도 안 되고 과장되게 보아서도 안 된다. 진실이라는 거울을 통해 곧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죄 많은 허영을 직시하는 것,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메두사라는 자신의 허영을 진실되게 바라보고 베어낸 페르세우스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메두사의 잘린 목에서 페가소스가 소생한다. 페가소스는 아홉 뮤즈들이 타고 다니는 말로서, 창조적 영감을 의미한다. 메두사가 죽자마자 페가소스가 소생했다는 것은, 허영을 베어내야만 비로소 진실된 창조적 영감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구이도의 운명과 페르세우스의 운명은 평행을 이룬다. 구이도는 허영스러운 모습, 거짓 모습을 지녔다. 그는 자신의 허영을 직접 보기 어렵다. 다른 어떤 영웅이 나타나 그를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영웅이 되기로 했다. 자신의 허영을 곧은 눈으로 바라보았고, 거짓으로 꽁꽁 싸맸던 자신을 권총으로 살해함으로써 허영을 베어냈다.
그가 거짓된 자신을 베어내자마자 그에게는 섬광이 찾아온다. 그의 페가소스가 소생했다. 이제 그는 어떤 거짓도 없는, 정직한,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전에 호텔 정원에서의 저녁 식사 때 한 남자가 구이도에게 물었다. “당신은 남의 위탁을 받아 진실하고, 중요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나요?” 그때 구이도는 대충 서둘러 답을 피하며 자리를 떴다. “네, 네. 한 번 생각해보죠. 실례합니다.”
이제 그는 이 질문에 확고하게,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남의 위탁을 받아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을 것이다.
구이도의 영화는, 아니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는 이제 다시 시작된다. ‘되고 싶은 나가 아닌 그냥 존재하는 나’가 된 영웅 펠리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승/추락의 반복과 구원
죄 많은 허영이라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허영은 양날의 검이다. 허영이 가져다주는 교만, 자만심은 일시적으로 쾌락을 느끼게 하고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현실과의 괴리가 가져다주는 죄책감은 고통을 준다.
억압된 욕망을 푸는 것도 마찬가지다. 욕망이 억압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표출할 경우 뒤틀린 방식을 수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의미한다. 뒤틀린 방식으로 욕망을 풀 경우 일시적으로는 강렬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뒤틀린 욕망의 해소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억압된 욕망을, 허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정신적 기형을 만들어 낼 정도인지 그렇지 않은 정도인지 차이는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억압된 욕망과 허영을 가진 모든 인간을 둘로 가르는 것은, 그것에 사로잡힌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만일 인지조차 못하고 있다면, 그는 뻔뻔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도, 구이도도 끝까지 뻔뻔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위선을 인지한 후에 진실된 자신과 마주했다.
나도 다행히 나의 억압된 욕망과 허영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직시하기가 참으로 두렵다. 이것들을 지니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을지 보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로 메두사처럼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게다가 그 괴물을 한 번에 처단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자꾸만 그들을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도망쳐 나온다. 나는 그곳을 줄곧 ‘지하실’이라고 불러왔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지하실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 신화에서도 잠재의식을 동굴, 지하 세계, 타르타로스 같은 곳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정신 세계란, 인간의 심리란 꽤나 비슷한 모양을 공유하고 있는가보다.
지하실에 내려가기가 두려워도, 한 번에 괴물을 처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내려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두렵다는 이유로 허영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갈등한다면, 쾌락과 고통을 왔다갔다 한다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구원받으려면 그곳에 내려갔다 와야 한다.
<8½>의 첫 번째 시퀀스, 구이도의 꿈에서 차 안에 갇혀 살려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던 구이도는 그곳을 탈출해 하늘을 향해, 태양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한쪽 발이 밧줄에 묶인 상태다. 묶인 밧줄을 풀어보려 하지만, 영원히 내려오라는 한 남성의 말에 추락한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처럼, 구이도는 바다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이카로스와 다르다. 이카로스는 단 한 번의 상승 시도 후에 영원히 추락해버렸지만, ‘죄책감’을 품은 구이도는 날아가는 데 성공했고, 그는 다시 추락한다 해도 또 다시 상승을 시도할 것이다. 그는 같은 악몽을 다시 꾸지 않을 것이다. 아테네의 방패가 인간들에게 ‘너희도 허영을 베어낼 수 있다’고 증명하듯 보여주듯이, 인간은 결국 승리할 수 있다.
나도 계속 상승과 추락을 반복한다면, 그러고서도 계속해서 날아가려는 시도를 한다면, 언젠가는 억압된 욕망, 수치심, 허영, 거짓에서 해방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죄책감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메두사의 머리가 박힌 아테네의 방패 고르고네움이,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들이, 구이도가, 페데리코 펠리니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이제 나는 지하실에 살고 있는, 일그러진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 여기서 나의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