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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스포일러 있음
혼란스러운 시대에 치유와 위로를 건네는 영화
영화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기뻤다.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영화의 상징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마 그런 상징을 읽어낼 줄 모른다면 이 영화가 상당히 난해하게 느껴지고, 영상미만 감상하고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찾아낸 상징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런 상징들은 다양한 신화나 문학 작품에서 비슷하게 쓰이는데, 감독이 이런 문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상징들을 모르고서 이 영화를 만들었을리가 없다.
‘새’와 ‘와라와라’가 상징하는 것
새는 가식을 의미한다. 왜가리, 펠리컨, 앵무새 모두 가식을 의미한다. 주인공 마히토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자신이 설 곳을 잃었다. 그래서 세상에 가식으로 대처한다. 지나치게 예의바르고,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가리는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왜가리는 다른 새들처럼 가식을 의미하긴 하지만, 다른 특별한 역할도 부여받았다. 왜가리는 마히토가 자신의 진심을 외면하지 않게 하는 존재이다. 즉, 죄책감을 비롯한 그의 진심이다. 그래서 마히토가 성에 왔을 때 자꾸 괴롭힌다. 탑으로 오라고, 마음 속 진심을 마주하라고 계속 괴롭힌다. 따라서 왜가리는 마히토를 자신의 진심과 마주하도록 도와주는 길잡이이다. 그러므로 왜가리는 특별하다. 펠리컨과 앵무새는 단순히 가식이라면, 왜가리는 가식이자, 가식의 이면까지 보게 하는 존재이다.
특히 왜가리의 깃털은 진심을 마주하게 하도록 인도하는 마히토의 죄책감이자, 진심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상징한다. 가식은 새가 날으는 능력과 새의 부리로 표현된다. 다른 신화에서도 가식은 들뜬 상태로 표현되고, 그런 가식은 입, 즉 부리를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왜가리의 깃털로 만들어진 화살, 진심을 마주하게 하는 용기가 왜가리의 부리를 맞힌다. 그러자 왜가리는 날으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때에서야 왜가리 속에 있던 진짜 존재가 나온다. 날으는 왜가리의 겉모습은 가식인 것이다.
이후에 마히토는 왜가리 부리에 있는 구멍을 메워준다. 그러자 왜가리는 날아갈 수 있게 된다. 그 덕분에 앵무새를 거짓으로 유인할 줄 알게 된다. 부리가 있는 왜가리는 거짓이라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마히토가 들어간 탑의 세계에는 ‘와라와라’가 있다. 와라와라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래서 와라와라가 위쪽 세계로 가면 아기로 태어난다고 한다. 현실과 타협한 적 없는 가장 순수한 존재가 아기이다.
펠리컨은 와라와라를 잡아먹고 산다. 가식은 순수한 마음을 잡아먹고 산다. 하지만 펠리컨들의 이야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펠리컨들은 살아남기 위해 와라와라를 잡아먹고 산다. 펠리컨이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 펠리컨은 마히토에게 말한다. 자신들은 살아가는 지혜라고 말이다. 가식은 순수한 마음을 잡아먹고 살지만, 이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이다.
이 영화는 가식과 순수한 마음 모두에 대해 중립적이다. 가식이 나쁜 것이고, 순수한 마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가식과 순수한 마음 모두 필요한 것이고,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짓고 산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가식과 악의로 지어진 세계이든, 순수로 지어진 세계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펠리컨에게 조의를 표한다. 죽은 펠리컨을 묻어주고, 예를 갖춘다.
‘할머니’들과 ‘탑’의 세계가 상징하는 것
마히토는 꿈속에서 탑을 보러 간다. 이것이 꿈속인 것은 명확하다. 마히토의 모든 모험은 마히토가 잠을 잔 뒤에 시작된다. 그것이 현실인지 생생한 꿈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 감독의 연출 의도겠지만, 감독은 힌트를 계속 배치했다. 항상 마히토가 잠이 드는 장면 뒤에 모험이 시작된다. 게다가 첫 번째 모험 전에 잠들 때에는 새엄마 나츠코가 마히토 옆에 차를 갖다 놓는다. 하지만 마히토가 일어났을 때에는 차가 없어져있다. 이렇듯 꿈속이라는 단서가 많이 있다.
그렇다면 꿈은 마히토가 자신의 잠재의식과 마주할 수 있는 통로이다. 진흙은 대부분 신화와 문학에서 공통적으로 잠재의식을 상징한다. 마히토는 진흙을 밟고 왜가리의 인도를 따라 탑으로 들어간다. 앞에서 말했듯 왜가리의 깃털은 진심을 마주하는 용기이다. 그래서 그 용기가 마히토를 탑 안쪽까지 인도한다. 하지만, 아직 가식으로 무장한 마히토는 탑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할머니들은 현실과, 현실을 살아가는 조화로운 지혜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탑 안에 들어가려는 순간에도 할머니들의 부름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다. 현실 때문에, 현실을 대하는 가식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의 진심을 마주할 수 없다.
특히 잠재의식은 다양한 신화에서 바다와 파도로 표현된다. 그래서 마히토가 잠재의식 세계로 처음 들어갔을 때, 폭풍의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에서는 모두가 젊은 모습이다. 엄마도 어린 ‘히미’의 모습으로 나오고, 키리코 할머니도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이런 잠재의식의 세계를 아랫세계라고 표현한다. 현실과 현실을 대하는 마히토의 태도는 윗세계이다. 탑 속의 세계가 상징하는 것은 너무 명확하다. 섬에 있는 무덤이나, 키리코 할머니의 상징은 뒤에서 이야기하자.
영화 해석과 감상
주인공 마히토는 전쟁통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당시 병원에 있었는데, 폭격으로 병원이 불타면서 함께 사라졌다. 주인공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구할 수 없었다. 영화는 이 장면으로 시작된다.
전쟁 때문에 사람들은 살기 어렵다. 혼란스러운 시대다. 아버지는 주인공의 이모, 즉 아내의 동생인 나츠코와 재혼했다. 아버지와 마히토는 아버지의 새 군수공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으며, 그래서 주인공과 새엄마는 근처의 성에서 함께 살게 된다. 성에서 시녀로 있는 할머니들은 설탕과 통조림을 보면 환장을 하며, 담배 하나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평온한 세상이라면 흔한 것들이 이 세계에서는 희귀하다. 다들 살기 어려운 시대이다.
주인공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예의바르며, 가식으로 자신을 둘렀다. 마히토는 쓸쓸하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피곤해도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성에 도착해 자신의 방을 배정받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든다. 그의 진심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마히토는 지쳤다.
마히토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 그의 속마음은 어머니를 못구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새엄마와의 관계로 인해 혼란스럽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식으로 세상을 대한다. 그것이 그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들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에 자신이 힘들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 말로는 무엇일까? 악의로 가득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거나, 순수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은 어느 쪽이나 똑같다. 현실과 진실된 화해를 하지 않는 한 그런 가식의 세계에서 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마히토가 설 곳은 점점 사라진다. 아버지의 군수공장의 생산품(전투기 콕핏의 유리창)은 운송이 밀려, 결국 가족이 살고 있는 성채에 생산품을 보관하게 된다. 혼란스러운 현실은 마히토가 설 공간을 점점 줄어들게 하는 것이다. 마히토는 밤 늦게 아버지와 새엄마 나츠코가 마주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마히토는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랑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주 조심히,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정말 마음 아픈 장면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폐가 되는 상황이라니.
성채는 현실이다. 그런데 성에는 왜가리가 있다. 마히토가 이 성에 오자마자 왜가리는 성 안으로 들어와 난다. 마히토는 꿈속에서 어머니를 구하지 못하는 악몽을 꾼다. 이런 죄책감은 마히토가 치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자신의 진심을 마주하게 잠재의식의 세계로 인도한다.
근처 학교로 전학 갔지만 거기서도 마히토는 치유 받을 수 없다. 전학생은 이방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와 싸운다. 큰 상처는 없었다. 마히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제는 누군가가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길 바란다. 하지만 가식으로 쌓여있는 상황에서 그런 마음은 악의로 나타난다. 자신을 때린 동급생이 더 큰 불이익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자신의 머리를 돌로 친다. 머리에서는 피가 흐른다. 하지만 마히토는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 아버지는 마히토를 보호해주려는 존재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지위, 돈, 힘을 이용해 마히토를 보호해주려고 한다. 그래서 마히토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마히토의 고통은 심리적인 것이다. 그런 보호는 마히토를 진정으로 치유해줄 수 없다.
마히토는 자신의 악의에 대해 한심해하고 있다. 꿈속에서 왜가리를 잡기 위해 목검을 들고 나간다. 그러나 아직 마히토는 가식 외에는 현실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런 다른 지혜 없이 목검은 무용지물이다.
엄마가 준 책 덕분에 마히토는 진정으로 치유받을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다. 엄마는 죽기 전에 마히토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선물로 준다. 엄마는 구원자이다. 엄마는 책을 통해 마히토에게 가식 대신 현실을 대하는 다른 태도를 알려준다. 이제 드디어 마히토는 자신의 진심에 다가설 수 있다.
마히토는 아픈 나츠코에게 문병을 간다. 그러나 문병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식에 의한 것이다. 마히토는 문병에 가서 히카리 담배 한 갑을 훔쳐온다.
마히토는 이번에는 활과 화살을 만든다. 훔친 히카리 담배를 할아버지에게 줘서 활을 만든다. 그러나 활과 화살은 조악한 것이다. 진심과 화해가 이뤄지지 않은 현재 그런 조악한 무기로는 자신의 가식들을 잡을 수 없다. 목검이 무용지물이었듯, 활과 화살도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러나 화살의 깃털은 왜가리의 깃털이다. 왜가리는 다른 새들처럼 마히토의 가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진심을 마주하게 하는 죄책감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화살은 왜가리의 부리를 맞힌다. 왜가리는 이때부터 날으는 능력이 사라진다. 새의 날으는 능력은 거짓과 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가리는 이제 진심을 마주하게 하는 인도자의 역할만 남았다.
마히토는 어머니가 준 책 덕분에 처음으로 잠재의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는 문구가 적힌 무덤의 문이 있다. 가식을 배우는 자는 진실된 자신을 잃게 된다. 펠리컨은 마히토를 먹으려고 달려든다. 가식이 그를 집어삼키려 한다. 그러나, 마히토에게는 왜가리의 깃털이 있다. 마히토에게 진심을 마주하게 하는 죄책감이 있는 한 펠리컨들, 즉 가식은 마히토를 잡아먹을 수 없다.
마히토의 이름의 뜻은 ‘진실된 자’이다. 이런 진심은 현실에서 곧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히토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아직 죽진 않았지만 말이다. 자신의 진심을 잃은 자들은 죽은 자들이다. 탑 속의 세계는 마히토의 잠재의식의 세계이지만, 이 세계는 다른 사람의 잠재의식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살기 힘든 현실 때문에 그들의 진심은 죽고 가식이나 악의만이 남아있다.
할머니들은 목각 인형의 형태로 마히토를 지켜준다. 현실에서 마히토를 간호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잠재의식에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마히토와 함께 들어온 키리코 할머니는 목각 인형이 없다.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있으니 말이다. 키리코 할머니(아가씨?)는 마히토에게 역할을 부여한다. 배를 밀라고 하고, 잡은 큰 생선의 배를 가르라고 한다. 마히토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 존재만으로 폐라고 생각했었는데, 더이상 그렇지가 않다. 마히토는 이제 쓸모있는 존재가 되었다. 키리코는 마히토를 강하게 만드는 존재이자, 마히토가 설 곳을 찾게 해주는 존재이다. 가식이 아닌 현실과 조화롭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이다.
와라와라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들은 조금 성숙해지면 위로 떠올라 아기로 태어난다고 한다. 아기는 현실을 접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아주 순수한 존재이다. 펠리컨은 와라와라를 잡아먹는다. 가식은 순수한 마음을 잡아먹는다. 히미는 불로 펠리컨들을 물리친다. 대부분 작품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히미는 마히토의 가식을 물리쳐주는 존재이다. 히미는 엄마이다. 엄마는 마히토에게 죄책감이자, 마히토의 수호자이다. 펠리컨이 왜가리 깃털, 즉 죄책감이 있는 마히토를 못 잡아먹었듯이, 죄책감은 가식을 물리친다.
왜가리는 가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진실된 마음을 직시하는 인도자로 나타날 수도 있다. 화살에 의해 구멍이 뚫린 왜가리는 날 수 없다.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약점까지 혼잣말로 다 말하게 된 것이다. 왜가리는 또한 그 상태에서 마히토에게 “나츠코가 없어졌으면 좋겠잖아!“라고 직설을 한다. 마히토는 부정하지 않는다. 진심과 현실은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는 가식만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지혜이다.
펠리컨이 죽어가면서 이 바다에는 물고기가 없어서 모든 펠리컨이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다는 저주 받은 바다라고 한다. 펠리컨이 고약한 거짓말쟁이인 것은, 살아가기 위한 진실이라고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가식은 모든 마음을 집어삼킨다. 앵무새와 펠리컨은 인간도 잡아먹는다.
하지만 앵무새들은 나츠코를 잡아먹을 수는 없다. 아기는 순수한 마음이니까! 현실을 접해본 적이 없는 아기는 가식이 잡아먹을 수가 없다.
엄마 히미도 마히토를 가식들로부터 지켜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와 가까워질수록 히미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탑은 돌로 이뤄져있다. 돌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산실은 마히토의 가장 깊은 마음이다. 그것이 보여지는 것을 돌은 원치 않는다. 그곳을 보는 것은 금기이다. 마히토는 그곳에서 나츠코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지만, 그 마음과 진정한 화해가 이뤄진 상황이 아니다. 나츠코는 마히토의 마음 속에 있다. 나츠코가 마히토에게 적대적인 것은, 마히토가 나츠코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나츠코가 있는 산실의 종이는 모두 불이 타고, 마히토와 히미는 쓰러진다.
앵무새들은 마히토와 히미를 납치한다. 히미가 잡혔다. 가식에 대항하는 힘이 가식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왜가리가 있다. 날으는 능력을 잃은 왜가리는 마히토를 구해준다. 앵무새들은 잡은 히미를 미끼로 탑의 세계의 창조자와 거래하려고 한다. 탑의 세계를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만들려고 한다. 가식만이 남은 세계로, 곧 빼앗고 죽음의 세계로 만들려는 것이다.
마히토는 세계의 창조자를 만난다. 창조자는 마히토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창조자는 이 세계는 생명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벌레도 생기고 곰팡이도 핀다고 한다. 마음은 움직이는 것이다. 어떻게 악의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창조자는 마히토에게 자신만의 세계를 지으라고 한다. 마히토는 가식과 악의로 만들어진 세계 말고 순수한 돌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겠다고 한다. 창조자는 사흘에 하나씩 돌을 쌓으라고 한다. 그러다가 앵무새의 수장이 나타나서, 이것은 말도 안 된다며 순수한 나무 조각을 내리친다. 별이 갈라진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데리고 탈출하려고, 나츠코에게 간다. 그전까지 마히토는 나츠코를 새엄마를 대해야 하는 의무로 대했다. 하지만 이제 마히토는 나츠코를 ‘엄마’라고 부른다. 진정한 화해가 이뤄진 것이다. 마히토는 가식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다른 지혜를 배웠다. 바로 사랑이다.
마히토와 히미는 동시에 현실의 문을 열려고 한다. 마히토는 히미를 말리려고 한다. 히미가 나가면, 엄마가 나가면, 병원에서 불타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미는 괜찮다고 한다. 그래도 마히토를 낳는 현실이라면 갈만한 곳이라고. 마히토는 이제 죄책감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너무 마음 아프고 기쁜 장면 아닌가!
이제 앵무새와 펠리컨들은 자유이다. 마히토는 가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키리코 할머니 덕분에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새엄마를 엄마를 대하는 사랑으로 대할 줄 알게되었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도 사라졌다. 불에 타죽는 고통스러운 삶이더라도, 엄마가 마히토를 사랑해서 그런 삶을 다시 선택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탑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나오자, 왜가리는 저쪽에서 일어난 일은 잊어버리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흰색 순수한 마음의 조각 정도는 괜찮겠다고 한다. 마히토의 마음이 가식에서 해방되었음을, 마히토의 마음이 치유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키리코 할머니는 목각 인형에서 돌아온다. 전쟁은 끝나고, 2년 뒤 마히토와 가족은 도쿄로 돌아간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포스터를 보는 것조차 마음이 아프다. 포스터에 나와있는 왜가리의 가짜 눈은 흐리멍텅하다. 부리 아래 진짜 눈이 있다. 마히토가 혼란스럽고, 모두가 살기 힘든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식을 두르는 것이 생각난다. 마히토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죄책감과 용기라는 왜가리를 통해, 자신의 진심과 화해하고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법을 깨닫는다. 자신도 사랑 받았던,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포스터를 보면 그런 모든 감정이 압축되어 전달된다.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련해진다.
현실을 가식으로 대하다보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생긴다. 그런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에 악의를 품고 살아갈 수도 있다. 혹은 순수한 자신만의 세계를 짓고 그곳에 갇혀 살아갈 수도 있다. 혹은 사람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영화는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살아가기 위한 지혜였다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그런 치유의 손길을 내밀면서, 동시에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