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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신유진 옮김, 1984BOOKS, 2022
스포일러 있음
보편적 개인: 이브토에 살았던 내 아버지
최고의 영화와 최고의 책: 작가가 내 삶을 훔쳐본 것 같은 작품들
내가 최고의 영화라고 여기는 것들은 모두 셋 중 하나에 속한다.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거나,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해보게 해주거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삶을 훔쳐본 것 같거나.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서 감탄을 자아내고 최고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영화도 정말 많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를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나를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삶을 훔쳐본 것만 같은 영화다. 그런 영화를 볼 때면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는 <토니 에드만>이 그랬다. 영화 속 인물들의 시대적 배경을 끌어와 ‘68운동 세대 아버지와 80년대 신자유주의 세대 딸의 세대 갈등’과 같은 말로 영화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둥지를 떠나버린 딸과 아버지 사이의 어색함, 아버지에 대한 창피함, 애잔함, 연민 같은 것, 그리고 어떤 극적인 방식을 통해 그들 사이의 간극이 좁혀진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다시 생기고 마는 거리가 이 영화의 전부다. 딸과 아버지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 그 사소한 디테일들은 이미 내 안에 품어져 있던 것들이다. 이미 알고 있는 그 사소한 행동 방식들이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영화의 경우, 기록용으로 수많은 작품을 평가하면서 나만의 평가 기준이 세워진 것 같다. 마음 먹고 평가 기준을 세웠다기 보다는 데이터에 의해 저절로 기준이 생겼다. 최고의 작품이라고 꼽은 영화들을 보니 전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평가라는 것이 주관적이다 보니 영화사에서 너무나 큰 의미가 있을 정도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음을 움직인 영화에만 만점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남들 시선을 극도로 의식하지 않게 되면서 이제는 영화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조차도 나를 울리지 못하면 쉽게 만점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우습게도 이전에는 그런 작품을 알아보고 만점을 주는 것이 진정한 시네필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오직 내게 의미 있는 작품에만 만점을 주고 있다. 어쨌든 인간의 삶을 예술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거의 ‘드라마’라는 장르에 속해 있고, 이런 이유로 내 인생 영화들의 장르는 90% 이상이 드라마다.
책은 아직 영화를 본 것처럼 많이 읽지 못했다. 영화에 비해 데이터가 적기 때문에 명확한 평가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든 ‘명예의 전당’ 목록을 살펴보니 내가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내게 최고의 책은 일종의 동지 의식을 느끼게 하는 책, 내 삶의 이상과 꿈을 담고 있는 책, 파토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 도끼 같은 책이다.
여태까지 동지 의식을 느끼게 하는 책은 거의 문학 작품이었고, 내 삶의 이상과 꿈을 담고 있는 책은 문학과 철학, 파토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은 당연히 문학, 도끼 같은 책은 과학과 철학이었다.
“나는 어두운 객석 안에서 당신의 재능이 빛나는 스크린 한쪽을 바라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아님을 느꼈습니다.”
이번에 읽은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는 이 중에서도 동지 의식을 절정으로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올 초에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고, 『남자의 자리』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읽을 책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화 <엘리멘탈>을 보고 빨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주인공 앰버의 아빠 버니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으면 아빠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던 시기였다. 영화 속 버니가 늙어간다기 보다는 시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내 아버지도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문득 ‘이대로 아빠가 돌아가시면,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그의 죽음에 대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이 책을 펴들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문학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승우는 『생의 이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을 ‘지하의 세계’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하는, 그곳이 지상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하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 적은 아무 데도 없는데 고통은 도처에 널려 있다. 나는 그 책을 내 방에 깔린 어둠의 눈을 빌려 아주 조금씩 읽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조그만 문고판 책의 행간에 무수히 그어진 붉은 줄들은 공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예컨대 동지 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이단의 내가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정말로 공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아니 에르노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그들이 살았던 방식은 나의 아버지, 어머니, 우리가 살았던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내가, 내 가족이 프랑스 어딘가에 또 있었다.
아니 에르노는 이 글을 쓰면서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개인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덤덤한 문체로 글을 써내려감으로써 보편적 개인을 창조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순간에 느꼈던 생각과 감정,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웠으나 분명 오랫동안 반복되었던 순간들. 그것들을 에르노는 명확한 언어로 표현해냈다.
책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쓰게 되면 내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게 될까 두렵다. 그래도 몇 문장은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버지와 나는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 삶에서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자유, 책, 음악)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에게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그는 내게 희망을 품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어렸을 때 했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그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와 나는 이제 드문드문 보게 됐다.
내 아버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직 내 아버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많았나보다. 에르노의 책을 읽으며 내가 혼자가 아니었음을 느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그의 책 『시간의 각인』에서 자신이 받은 편지를 읽어준다.
고리키(현재 니즈니노브고로드)에 사는 한 여성 관객은 내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영화 <거울>에 감사해요"라고 썼다. “내 어린 시절도 영화와 똑같았어요. ··· 그런데 당신은 이걸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그때도 이런 바람이 불었고 폭풍우가 일었죠. 할머니는 ‘갈카, 고양이를 쫓아내!‘라고 소리쳤죠. 방안은 어두웠고요. ··· 석유등이 꺼졌는데, 내 영혼은 어머니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 찼어요. 당신의 영화는 어린아이의 의식과 생각의 각성을 정말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어요! 세상에, 사실 그대로예요. ··· 우리는 사실 우리 어머니들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정말 간단하죠. 아시겠지만, 나는 어두운 객석 안에서 당신의 재능이 빛나는 스크린 한쪽을 바라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아님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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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가 누구에게도 필요 없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너무 오랫동안 들어와서 그런지, 이런 고백은 내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작품 활동에도 의미를 부여해주면서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고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타르콥스키는 한 여인에게 생애 처음으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니 에르노도 한 여인에게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게 살아왔기에 이 책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으리라. 누군가는 이 책에 나만큼의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삶의 일정 부분을 공유한 덕분에 온전한 동지 의식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다.
공감이라는 말로도, 동지 의식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그를 통해 저자와 하나됨을 느끼는 것이 문학의 아름다움 중 하나인 것 같다. 모든 노벨상 분야가 실질적으로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인데, 노벨문학상이 어떻게 거기에 포함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나도 있다.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사람의 삶을 살만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 다른 그 무엇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초두에서 내 마음을 가장 동하게 하는 영화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삶을 훔쳐본 것만 같은 영화라고 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그것이 내 삶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보니 책도 영화와 똑같다. 작가가 내 삶을 훔쳐본 것만 같은 책이 내게는 최고의 책이다.
반드시 마주하게 될 순간
에르노는 줄곧 ‘우리’를 그녀와 그녀의 부모를 지칭할 때 사용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나 남편과 결혼했을 때, ‘우리’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으로 바뀌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우리’는 나와 내 부모님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그 세계에서 너무나도 멀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한다. 아버지를 사랑한다. 나는 아버지가 밉다. 아버지가 불쌍하다. 아버지가 혐오스럽다. 그래도 그를 사랑한다. ‘어쩌면 그의 가장 커다란 자부심, 아니 심지어 그의 존재 이유는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가 웃었고 희망을 가졌고 행복해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이 책은 106페이지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지금 나와 아버지의 시간은 92페이지쯤에 있다. 어쩌면 대략 그의 인생의 87%는 지나갔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와 내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짧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남은 시간 동안 그는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계속해서 좋아하는 것이 없는 채로 살게 될까. 한때 그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면 내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노력하면 그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지 못하면 그가 떠났을 때 죄책감이 심할 것 같아서, 슬픔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뒤인 지금은 그런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다. 그것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닌가. 그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의 마지막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끝이 날까. 그때가 되면 나도 그에 대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를, 그의 과거를, ‘과거의’ 우리를 회상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괴로울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은 덕분에 괴로움을 조금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죽음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내 아버지가 다른 곳에도 있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딸이 다른 곳에도 있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