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편적인 삶을 정의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 보편적인 좋은 삶의 정의를 시도해보자. 먼저 진화심리학적 해석 중 하나인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주장을 검토해보자. 해당 주장에서 합리적인 것은 취하되, 합당하지 못한 것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그 전에 목적에 대해 정확히 구분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목적에 대해 두 가지 의미를 혼재하여 쓰기 때문이다. 첫째, 목적은 대상이 존재하던 처음부터 수행하려던 기능을 나타내기도 한다. 거기에는 대상이 처음부터 해당 기능을 수행하려고 했던 의지가 있거나, 혹은 그 대상의 창조자가 대상에게 해당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불어넣은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런 목적을 ‘의지적 목적’이라고 명명하자. 의지적 목적으로부터는 당위를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돌을 컵으로 쓰기 위해 안을 움푹 파고 가장자리를 다듬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돌 컵에는 물을 담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라고 만든 창조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당위가 있다. 왜냐하면 목적을 잘 수행하는 것이 이 대상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컵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돌 컵에서 물이 새거나, 컵이 자꾸 넘어져 물을 잘 담지 못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지적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컵은 존재 자체가 옳지 못하다. 의지적 목적을 갖고 탄생한 대상들은 그 목적을 잘 수행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새는 이런 돌 컵은 폐기되어야 한다.
둘째, 목적은 순전히 대상이 수행하는 기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목적을 ‘기능적 목적’이라고 명명하자. 그러나 이런 기능적 목적에는 대상의 의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돌이 우연히 움푹 패인 컵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보자. 이런 돌이 발견되어서 컵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돌은 컵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이 돌의 목적은 물을 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돌의 목적이 물을 담는다는 것은, 그런 기능을 수행할 뿐이지, 처음부터 컵이 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능적 목적에는 처음부터 존재하던 의지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능적 목적으로부터는 당위를 추론할 수 없다. 이 우연히 컵 모양으로 생긴 돌에 물을 담으면 물이 샌다고 해서, 그 돌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돌은 컵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연히 그런 모양을 가졌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적 해석 중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혹은 생식을 하는 모든 생물의 궁극적 목적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만약 여기서 주장하는 목적이 기능적 목적이라면 이는 맞는 말이다. 자연에는 어떤 의지가 없다. 우리의 공유된 알고리즘은 처음에는 변이에 의해 우연히 생긴 것이다. 그 우연히 생긴 기능이 생존과 번식에 적합했을 뿐이다. 마치 우연히 컵 모양인 돌이 컵으로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의지적 목적이라면 이는 틀린 말이 된다. 또한 이런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자연주의적 오류를 낳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에는 의지가 없다. 그런데 만약 삶의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것이, 의지적 목적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 존재는 처음부터 생존과 번식을 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당위를 포함하게 된다. 이런 의지적 목적을 지닌 존재는 그 목적을 잘 수행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다. 이것은 당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당위로 연결될 수 있다. 다소 좀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던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우리가 생존과 번식의 기능을 잘 수행한다고 해서, 우리가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당위로 논리 비약이 일어난 것이다.
다음 예시를 보자. 1980년대에 도널드 클라인(Donald Lee Cline)은 불임 시술 전문의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었다. 그는 나팔관 연결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의뢰인들의 정자를 이용하여, 혹은 기증 받은 정자를 이용해 인공수정 시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2014년에 자코바 발라드(Jacoba Ballard)는 자신이 정자 기증을 통해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다음 해 그녀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이복형제자매를 찾는다. 그런데 많아야 한 3명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7명이나 유전적으로 이복형제자매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후 조사에서 저코바의 이복형제자매들은 94명이 확인된다. 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모두 도널드 클라인이었다! 도널드 클라인은 인공수정 시술을 할 때 의뢰인의 정자나 기증받은 정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정자를 사용한 것이다. 정자 기증을 하려면 유전병은 없는지, 건강과 생활습관은 좋은지 등 많은 검사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도널드 클라인은 심지어 유전병인 면역 체계 질환도 앓고 있었다. 그의 자녀들은 1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종종 있는 것 같은데, 네덜란드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17년에 죽은 네덜란드 의사 얀 카르바트(Jan Karbaat)도 인공수정 시술을 할 때 기증자나 의뢰인의 정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정자를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또한, 이후에 정자 기증과 관련된 행정 서류도 조작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그의 생물학적 자녀인 것으로 확정된 사람은 2019년 기준 47명이고, 실제로는 200명이 넘을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만약 생존과 번식이 인간의 의지적 목적이라면, 클라인이나 카르바트는 그런 목적을 아주 잘 수행한 셈이다. 번식에 있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삶을 아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클라인은 E등급 중죄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이 공유하는 ‘좋은 삶’에 가깝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생존과 번식이 인간의 궁극적인 의지적 목적이라는 주장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위를 추론할 때에는 기능적 목적을 의지적 목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저지르면 안 된다. 또한, 당위를 추론하려면 인간의 의지, 곧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물론 의지, 동기, 성향 모두 심리 기제로 우연히 생긴 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연히 생긴 성향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의 의지로 인식된다.
자연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는 의지가 없으므로 현실 세계에서 의지적 목적을 추론하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완전한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의지를 분명히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의지적 목적을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컵 같은 모든 물건은 그런 목적을 잘 수행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그런 목적이 잘 수행되기를 바란다. 컵에게는 물이 새지 않고, 물이 쏟아지지 않길 바라며, 컴퓨터로 글을 쓰는 동안 컴퓨터가 꺼지지 않길 바란다. 각각의 물건들이 목적을 잘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분명히 인간에게 어떤 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의지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알고리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물건이건 관념이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데, 그것을 욕구라고 하며, 다른 용어로 추동이라고 한다. 의지는 추동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사고나 행위를 하려고 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갈망은 갈망의 대상이 결핍되었거나 갈망하는 행위가 억압되었을 때 일어난다. 숨을 쉬는 데에는 어떤 의지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보통 공기는 결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기가 부족해지면, 숨을 쉬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 공기를 마시고 싶은데, 공기가 충분하지 않아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라는 것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물에게 존재하는 어떤 알고리즘이다. 만약 의지를 자연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렇게 정의된 의지는 현실 세계에 없다. 자연의 모든 일에는 의지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의지를 생명체에게서 일어나는 알고리즘의 한 형태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결핍된 것을 갈망하는 알고리즘은 생명체에게 분명히 있다. 그런 알고리즘도 해체하고 나면 당연히 의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컴퓨터로 노트 패드의 기능을 수행하는 코드를 짰다면, 노트 패드는 그런 코드 전체이자, 코드 전체가 수행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코드를 한 줄씩 해체하면, 그것은 노트 패드가 아니다. 이렇듯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도 어떤 것을 갈망하는 알고리즘 전체와, 그 알고리즘이 수행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신경 수준이나 분자 수준으로 해체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연의 법칙인 인과로(고전 역학), 더 해체하면 우연(양자 역학)으로 분해될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의지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 것을 의지로 해석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이다.
자연에서 탄생한 우리는 존재 자체에 의지적 목적이 담겨있진 않다. 부모가 자식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모의 의지가 자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유전자가 만드는 것이므로 의지적 목적이 담겨있진 않다. 어머니가 뱃속의 태아에게 ‘너는 달리기를 잘해야 해’라면서 다리를 길게 만들고 그러진 않는다. (‘양육’ 권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이런 이유로 부모가 자녀에게 부모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고 당위를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 만약 그런 논리가 “내가 너를 만들어 낳았으니, 너는 얼른 취직해서 나에게 돈을 줘야 돼.“라는 식이라면 아주 비논리적인 것이다.) 그보다는 부모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모의 유전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능을 수행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존재 목적 자체가 될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어떤 의지가 있다. 우리가 컵을 만들며 의지를 불어넣듯,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지를 불어넣는다. 즉,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그런 공통된 의지로부터 우리는 좋은 삶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삶을 정의하기 위해서 동기와 욕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생존과 번식은 우리 삶의 의지적 목적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의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 외에도 인간에게는 다른 의지가 있다. 때때로 의지는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 번식의 의지를 수행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속이고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의지도 있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직함에 대한 의지는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알고리즘을 기준으로 판단하자). 그래서 클라인이나 카르바트의 사례는 보편적인 좋은 삶에 해당할 수가 없다. 아직 우리가 인간의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삶이 좋은 삶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의지와 충돌 없이 번식을 잘 수행했다면 그것은 좋은 삶에 다가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총 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이 또 자녀를 낳아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의 손주가 30명이 넘게 되었고(나의 아버지 항렬), 그 손주들이 또 자녀를 낳아 증손주는 60명이 넘게 되었다(나의 항렬). 이것은 분명히 사람들이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에게 잘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사람들이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잘 살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의 기능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이 인간이 삶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삶의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편적인 좋은 삶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 즉 동기와 욕망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좋은 삶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생존과 번식이 삶의 목적이라는 진화심리학적인 해석을 조금만 더 살펴보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