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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디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안용철 옮김, 현대미학사, 1997
스포일러 있음
욕망과의 조화를 지향하는 그리스 신화의 상징들
중학생 때부터 만화책으로 그리스 신화를 읽곤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서둘러 밥을 먹고 도서실에 가서 『만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 그 덕에 성인이 되어서도 신화의 주요한 내용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렸을 때 읽기도 했지만, 아는 것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껏해야 신화의 알레고리적 의미만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신화가 인간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심도있게 반영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알고 있었더라면 혼자서 그리스 신화를 깊이 이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프로이트와 융 심리학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폴 디엘의 책을 읽었고, 그 덕에 그리스 신화를 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안 읽었더라면 앞으로도 얼마나 표면적으로 신화를 읽었을지 눈앞이 깜깜하다.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은 비단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상징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준 책이다.
그리스 신화의 주요 주제는 본질적인 의미 추구(이를 영의 발전, 영화라고 표현한다)와 욕망 사이의 조화다. 욕망을 억압하면 고통 속에서 살아갈 뿐이고 욕망과 조화를 이루면, 즉 욕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면 삶의 본질적인 의미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욕망을 참아야 한다는, 혹은 이겨내야 한다는 종교의 가르침 하에 자란 사람으로서, 욕망의 억압이 얼마나 많은 정신적 기형을 만들어내는지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자유를 제한당하면,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 어릴 때 박탈당한 원초적 자유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한다. 나는 예수 같은 성인이 아니다. 나는 욕망을 초월하지 못했고, 그래서 내 안에는 아직도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 억압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상은 중용이었다. 그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가장 큰 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이들이 영의 발전과 지상의 욕망간의 조화를 추구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탄탈로스처럼 숭고하게 되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지상의 욕망에만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볼 때 가장 건강한 삶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어떻게 욕망을 누르고만 살겠는가. 욕망의 목소리를 건전한 방식으로 들어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영의 부름과 욕망간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러한 조화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이다. 그렇기에 괴물과의 싸움으로 그려지는 내면의 투쟁에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러한 도전을 한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둘 중 하나와 투쟁한다. 신경증적 상태, 혹은 진부화. 신경증적 상태는 억압과 승화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상태다. 신경증적 상태는 죄를 의식하고 있기에 죄책감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을 겪는다. 이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영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다.
진부화는 이러한 고통마저 없는, 답도 없는 상태다. 진부화라는 말이 좀 낯설지만 영어로 obsolescence라는 문자 그대로 진부하게 되는 것, 그래서 쓸모없어지는 것, 한물간 것을 뜻한다. 더 이상 영의 부름을 듣지 않는 상태다. 그래서 신경증적 상태는 ‘영의 타락’이라고 부르지만, 진부화는 ‘영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진부화와 그에 대한 예시를 든다.
첫 번째는 관습적 진부화로, 이는 평범함, 생각 없는 삶, 타인의 시선에 대한 굴종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진부화된 인물에 속한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했던 미다스 왕, 영혼의 결합이 아닌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했던 에로스와 프시케가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적 진부화로, 이는 강렬한 삶을 추구하고 타락을 통해 쉬운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한다. 디오니소스가 주신(술의 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개념이다. 방탕한 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정신적 죽음을 맞이했던 오르페우스가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는 티탄적 진부화로,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적 도착을 의미한다. 권력의 유혹에 빠져 도착된 꿈을 실현했던 오이디푸스가 여기에 속한다(오이디푸스는 영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종국에는 영을 부활시킨다).
세 가지 진부화에 대한 예시는 생각 없이 사는 것, 숭고한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방탕으로 쉬운 자유를 얻는 것, 영의 발전 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방심해도 진부화된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교육, 언론, 정부, 금융, 기업, 친구, 심지어 가족—이 진부화를 부추긴다. 한두 번도 아니고, 평생을 부추긴다. 언제나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은 괴물 혹은 악을 한 번 물리쳤다고 해서 편하게 살 수 없다. 테세우스는 한때는 진정한 영웅이었지만, 계속해서 찾아오는 진부화와의 투쟁에서 실패하고 결국 전락해버린 인물이다. 영웅에게는 계속해서 시련이 찾아오고, 계속해서 이 시련들을 이겨내야만 끝까지 성공한 영웅이 된다.
내게는 어떤 시련이 계속해서 찾아올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나는 진부화된 인간은 아니지만, 신경증적 상태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내게는 허영이 있고, 죄책감도 있다. 계속 투쟁해야만 하는 영웅들처럼 나도 허영, 죄책감과 평생에 걸쳐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겠지만,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야만 숭고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스 신화는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준다. 모든 것 중 더 이상 영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진부화가 가장 위험해 보이지만, 욕망을 외면하며 사는 것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의 표면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상, 숭고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지상의 욕망과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나에게는 여전히 오래전부터 억압된 욕망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그것들을 직시하고, 앞으로의 욕망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그것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동시에 진부화를 경계하고,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야겠다. 그러면 나도 그리스 신화에서 몇 안 되는, 궁극적으로는 내면의 투쟁에서 성공한 페르세우스, 오이디푸스,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들처럼,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