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데리코 펠리니, 〈8과 1/2〉, 1963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욕망의 수단이 아닌 자신의 삶, 진실을 담는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감독의 선언
이 영화에서 상징을 찾고,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것들을 비판하는 영화인데 말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 때문에 시인들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시인의 작품을 시인 자신보다 사실상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 다음과 같은 진실을 알게 되었지요. 즉 시인들은 지혜가 아니라 일종의 소질이나 영감으로 시를 짓는다는 것을.”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22b–c행
영화 제작자들은 영화를 영감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어떤 문제 의식, 메시지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플롯을 철저히 짜서 만드는 영화도 있지만, 모든 예술이 그러할 필요는 없다. 어떤 영화는 떠오르는 영감으로, 그 영감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석은 감독에게 있지 않고, 그러므로 절대적이지 않다. 해석은 관객이 작품을 더 깊게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이 영화는 이번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인데 보고서 펑펑 울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의 고독이 너무 그대로 전해졌고, 마지막에 휘몰아치는 그의 각성과 선언, 고백은 뜨거운 눈물을 쏟게 한다. 해석이 소용없다고 해도 내 마음 속에 더 깊이 간직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 영화는 감독이 영화를 욕망의 수단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개인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감독은 무엇이 억압되어서 영화를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무엇이 그를 각성시켜서 진실된 삶을 살기로 하는지 찾는 것이 핵심이다. 거기에다가 각 인물이 남자 주인공 구이도에게 무슨 역할인지까지 체크하면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주인공이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도록 말하게 하는 가장 표면적이고 큰 이유는 영화 제작자나 비평가, 팬, 배우들 때문이다. 이들은 영화에 있는 주제 의식에 대해 끊임 없이 묻는다. 그러면서 구이도에게서 대단한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제작자는 특히 손해를 따지며 영화에 대한 줄거리나 배역, 세트 등이 빨리 결정되길 원한다. 비평가는 계속 구이도의 영화 내용에 대해 알맹이가 없고, 감독의 의도 등이 보이지 않는다고 까내린다. 비평가는 구이도가 자기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없음을 나타낸다. 구이도의 팬들도 영화의 내용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한다. 하지만 구이도는 대답할 수 없다. 지금의 영화에서는 자기도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배역에 몰입하고 연습해야 하니 어떤 배역인지 계속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구이도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고, 계속 설명을 미루기만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아내 모두 영화에 대해 간접적으로 부담을 주는 존재이다. 두 번째 꿈에서 아버지는 무덤의 천장이 낮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정리정돈을 안 해주어도 어머니가 오니 괜찮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와도 이야기를 하다가 그 존재는 아내로 바뀐다. 아내는 자신도 못 알아보냐면서 핀잔을 준다. 구이도는 부모님과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죄책감은 영화 제작에 대한 간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가장 첫 번째 장면이자 첫 번째 꿈을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구이도를 지켜보고 있다. 욕망에 순응한 듯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있다. 시체처럼 버스에서 밖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구이도는 차 안에서 숨이 막혀 탈출하려고 하지만 탈출할 수 없다. 결국 창문으로 나간 구이도는 하늘을 난다. 이것은 구이도의 자유로워지고 싶은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발에 실이 묶여 있고, 영원히 내려오라는 말 한 마디에 추락하게 된다. 이는 아직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런 모든 부담감은 코노키아라는 친구 제작자로 나타난다. 그는 30년간 업계에서 일했다지만, 구식 제작법을 고수하고 있다. 과거에는 두려움 따윈 없었지만 현재는 두려워하고 있다. 구이도의 영화에서 정확한 스토리나 지시 하나 없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젠 떠나겠다고 한다. 구이도의 두려움을 정확히 반영하는 캐릭터이다.
추기경이나 카톨릭 사제들은 구이도에게, 영화 감독은 수많은 영혼을 교화시키거나 타락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교 교리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구이도의 부담감 때문에 결국 영화는 산으로 가서 우주선 발사대 세트장까지 만들어진다. 우주선 세트장은 진실을 뒤로 한 채 만드는 영화 스토리가 정말로 우주로 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자네는 이렇게 분명히 말해야 해. “이 여자는 아내, 이 여자는 정부, 이 남자는 추기경, 이 여자는 사라기나"라고
영화는 아직 아무 배역도 정해져있지 않다. 이것은 구이도의 삶과 똑같다. 구이도는 삶에서도 무엇에 헌신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부담이다. 아니 사실 자신의 존재가 부담이다. 모든 것을 갖고 싶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욕망과 현실이 부딪치니까 말이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고 계속 도망쳐야 하는 삶. 그 삶이 부담이다. 구이도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싶어서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한다. 아무것도 사랑할 수가 없다.
네가 그린 인물같이 아무도 사랑 않는 그런 남자는 알다시피 별로 호감이 안 가.
실은 그의 잘못이야.
남들한테 뭘 바라는 거야?
그러나 주인공이 거짓된 삶을 사는 것은 비단 영화 때문만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정신을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으로 나누었다. 잠재의식은 현실에 의해 억압된 자아이다. 구이도는 유년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잠재의식 속의 억압이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창녀인 사라기나에게 돈을 주고 춤(룸바)을 추게 했다. 어렸을 때의 그와 친구들은 사라기나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구이도는 사라기나와 함께 춤을 추기도 하며 즐거워 한다. 하지만 카톨릭 사제들은 구이도를 잡은 뒤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며 혼을 낸다. 여기서 여자에 대한 억압된 자아가 생긴다. 그의 정신은 억압 때문에 그때 이후로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재의 구이도는 추기경과 만났을 때 다들 새소리를 들으며 경건한 자연의 소리를 감상할 때, 혼자 사라기나에 대한 망상을 한다.
구이도는 억압된 자아 때문에 자아가 성장하지 못했으므로 욕망도 어긋나게 된다. 그는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며 이는 카를라와의 불륜으로 이어진다. 불륜녀 카를라는 이러한 욕망에 대한 상징이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여러 벌 갖고 있기를 좋아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원한다. 그리고 지성은 겸비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사 니지 마사! 어렸을 적 들었던 부자가 되는 주문이다. 그는 부에 대한 갈망도 놓지 못한다. 부와 명예, 육욕. 그는 현재 욕망의 집합체이다. 뒤틀린 욕망은 그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그래서 그가 삶을 진실되게 대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구이도의 어긋난 욕망은 망상 속에서 불륜녀 카를라와 아내 루이자가 화해를 하고 자신의 하렘이 만들어지는 곳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많은 여자들을 자신의 하렘에 두고, 그녀들이 반역을 일으키면 채찍으로 다스리는 것을 원한다. 구이도는 하렘에서 어린아이처럼 대해지는 것을 원하고 상상하는데, 이는 그의 정신이 억압되었던 어렸던 시절 이후에 아직 성장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하렘에서는 나이가 들면 위층으로 쫓겨난다. 역설적으로 구이도는 자신이 나이 드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이는 친구 메짜보타로 나타난다. 메짜보타는 딸 뻘 되는 나이 어린 글로리아와 연애를 하고 있다. 그는 나이가 들면 어떻고, 만약 글로리아가 돈 때문에 자신을 만나면 어떻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도 글로리아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자신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아내 루이자는 하렘에서 구이도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구이도는 아내가 하렘에서의 상상처럼 조금 인내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한다.
이런 이유들로 감독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진실하지 않으니, 영화는 삶을 노래하지 않는다. 구이도는 여성들에게 배역을 하나 주겠다며 말을 섞고, 우주선 세트장에서 뱃사람에게 배역을 하나 주겠다며 탭댄스를 춰보라고 강요한다. 그에게 영화는 진실을 전하거나 삶을 노래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단일 뿐인 것이다.
아내 루이자는 특별하다. 그의 거짓을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다. 루이자 때문에 구이도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계속 느끼게 된다. 즉, 구이도의 정신 상태를 정리하자면 그는 어렸을 적 억압된 자아(잠재의식)으로 인해 잘못된 욕망(무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혼란을 겪고 있지만, 아내에 의해 삶을 그대로, 진실되게 바라봐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초의식)을 느끼는 중이다. 루이자는 구이도의 초의식이다.
당신이 놀라운 사람이란 걸 모두가 믿게 만들어
그런데 대체 남들에게 뭘 가르치려는 거지?
당신 옆에서 함께 늙은 사람에게도 한 번도 진실을 말할 줄 몰랐던 사람이!
클라우디아는 구이도의 이상을 상징한다. 잘못된 욕망을 바로 잡아줄 희망이다. 즉, 클라우디아는 구이도의 각성이자 승화이다. 마지막 클라우디아가 나타났을 때 둘은 차를 타고 간다. 구이도는 클라우디아에게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왔다고 한다. 클라우디아는 영화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한다. 구이도에게 영화는 자신의 삶과 같다. 자신의 삶을 얘기해달라는 것이다. 신부에게 사라기나와 룸바를 췄던 것을 고해성사 했듯이, 자신의 삶을 클라우디아에게 고해성사한다. 신부는 억압의 상징이지만, 클라우디아는 승화의 상징이다.
너는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어?
하나만을 택해서 그 하나에 절대적으로 몰입할 수 있겠어?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이 되는 그 하나를 네 인생의 이유로 삼으면서
그 하나에 대한 네 헌신만이 영원히 그걸 지속시킨다면
그 하나에 헌신할 수 있겠어?
클라우디아는 자신은 길을 모르겠다고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는다. 그런데 구이도가 가는 길은 이제 아무 곳이나 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샘물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샘물 소리는 무엇인가? 글로리아가 설명했었다. 물은 거짓을 씻어낼 수 있는 영험한 상징이다. 깨끗하게 단장하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 이제 구이도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행복을 향해 갈 수 있다.
그리고 샘의 아가씨를 만나
그녀는 치료용 광천수를 떠주는 아가씨들 중 하나야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젊으면서 원숙하고,
아기 같으면서 의엿한 여성이야
정통적이고 밝아.
그녀가 그의 구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샘의 목소리가 들려요?
로마인들은 “행복한 물"이라고 불렀죠.
클라우디아: 넌 헌신할 수 있겠어?
구이도: …
아니, 여기 있는 이 친구는 그럴 자신이 없어
이 친구는 모든 걸 붙잡으려고 하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줄 몰라
바른 길을 잃어버린다는 공포 때문에 매일 길을 바꿔
그는 천천히 출혈로 죽어가고 있어
클라우디아: 그렇게 영화가 끝나?
구이도: 아니, 그렇게 시작해
구이도의 영화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구이도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이다. 새로운 영화, 새로운 삶!
이제 구이도의 마음에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억압된 욕망이 왜 그릇된 욕망을 불러왔는지 드러나는 때이다.
클라우디아: 난 이해 못하겠어. 그는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는데 그가 그녀를 거부해?
구이도: 더 이상 안 믿기 때문이지
클라우디아: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야
구이도: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클라우디아: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야
구이도: 무엇보다 또 다른 거짓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야
클라우디아: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야
구이도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뒤틀린 욕망에 충실해봤지만 채워지지 않는다.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아내를 불러왔지만, 화만 돋군 상황이 되었다.
클라우디아는 이 장면이 영화에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구이도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구이도는 영화에는 이 장면이 없다며 사실 영화도 없고, 어디에도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사랑하는 법을 알기 전까지는 영화는 없다.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진실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영화도, 영화로 상징되는 삶도 없다.
하지만, 구이도의 영화가 이제 시작될 때이다. 구이도는 비평가를 망상 속에서 목 매달아 죽인다. 그러나 클라우디아의 대화 이후 구이도는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낸다. 구이도는 우주선 발사대 세트장으로 끌려간다. 두려운 순간이라 다리가 풀리기도 하고, 도망치려고 해보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모든 기자와 비평가, 팬들이 묻지만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다. 그는 코노키아에게 미안하다며, 당신의 영화는 그동안 훌륭했다고 한다. 제작자는 이미 많은 돈이 들어갔다며 또 한 번 구이도를 압박한다. 가장 진정한 친구 아고스티니가 그의 오른쪽 주머니에 총을 넣어줬다. 자, 그의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자살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삶의 종말이다. 그가 진실을 말할 때 그의 지금까지의 삶은 죽었다. 그리고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움, 수치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우주선 발사대 세트장을 철거한다. 영화 제작 커리어가 끝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도피하지 않고 이제 인정한다. 자신의 삶이 아니고는 할 얘기가 없다고.
구이도는 탭댄스를 추던 뱃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뱃사람” 어긋난 욕망에 대한 작별 인사이다.
나에게 힘과 생명을 주면서
나를 떨게 하는 이 행복의 섬광은 무엇인가?
⠀
나를 용서해 줘, 감미로운 창조물들.
내가 이해를 못했어.
내가 몰랐어.
당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임이.
얼마나 옳고 간단한 일인지!
⠀
루이자, 나는 지금 해방된 느낌이야.
모두 훌륭하고, 모두 의미 있고, 모두 진실하게 여겨져.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
이제, 모두 처음처럼 되돌아와 모두 다시 혼란스러워.
그러나 이 혼란은 바로 나야!
되고 싶은 “나"가 아닌 그냥 존재하는 “나”
진실을 말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아.
⠀
내가 모르는 것, 내가 찾는 것, 내가 아직 찾지 못한 것.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들이야.
그리고 부끄러움 없이 당신의 눈을 바라 볼 수 있어.
⠀
인생은 축제야.
인생을 함께 살아!
⠀
루이자, 당신과 남들에게 이 말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어.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이대로의 나를 받아 줘.
이것이 우리가 서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얼마나 완벽한 해피 엔딩인가? 봤던 영화들 중에 이보다 더 완벽한 해피 엔딩은 없었다. 행복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독했던 구이도는 이제 자유로워졌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한다. 피리 부는 소년은 구이도의 어릴 적 모습, 즉 구이도 자신을 대변한다. 소년이 피리를 부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리 부는 소년이 흰 커튼 쪽으로 가자 커튼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려온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주변의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다 같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그 가운데에 구이도와 루이자가 손을 잡고 있다. 구이도는 이제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불륜녀 카를라가 구이도에게 와서 말을 걸지만, 구이도는 사람들 사이로 가라고 한다. 구이도는 이제 뒤틀린 욕망에 순응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허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