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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위대한 독재자〉, 1940
스포일러 있음
위대한 독재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세계 재패의 꿈을 가진 독재자 힌켈이고, 한 명은 반유대 정책 때문에 억압 받는 미용사 찰리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찰리 채플린’ 혼자서 1인 2역을 했다. 억압의 상징으로 나온 유대인 미용사와 잔인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독재자의 배우가 같은 것은 결국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같다. 지위는 통제력과 자유의 개념을 제외하고 보면, 결국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다. 양자전기역학의 창시자 ‘리처드 파인만’의 아버지는 교황과 일반 신도의 차이점은 모자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다 사람이다.
초반에 힌켈이 독일어로 연설하는 장면에서 자막이 안 나오길래, 영어만 번역이 된 완벽하지 않은 자막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들어보니 이 독일어가 엉터리 독일어고 그냥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히틀러의 독일 억양과 행동을 거의 똑같이 따라하며 풍자하는데, 다른 언어를 흉내내는 것이 참으로 웃기다. 우리나라의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한본어, 한중어랍시고 주변 국가의 언어를 흉내만 내는 게 재미있고, 인기를 끈다. 이런 유머가 유서 깊은 유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흉내 내는 것을 보는 것도 웃기다.
그런데 이 풍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의 몸짓이나 억양이 요란하긴 하지만 점점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로 이어진다. 히틀러의 연설이 아무 알맹이도 없는 연설이라는 것 아닐까? 아무 의미도 없는 연설을 보고 어떤 장군은 감동받기도 하고 군인들은 박수를 치며 열광한다. 대중의 행복, 다수의 행복, 즉 공동선과 동떨어진 의미도 없는 연설에 특정 사람들만 감동한다는 것은 그런 독재자의 야욕이 특정 소수에게만 이익이 간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 같다.
초반에 찰리가 전쟁터에서 어리버리해서 벌어지는 장면도 정말 웃기다. 이런 풍자는 전쟁의 고통스러움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전쟁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치유하고, 그런 전쟁이 덧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같다.
찰리는 퇴각 중에 먼지와 연기로 인해 적군들과 함께 달려오는데도 서로 못 알아챈다. 이것도 얼마나 덧없는가? 같은 사람인데 군복의 색깔로 서로 구분하는 것이다. 연기나 먼지로 군복의 색깔을 못알아보게 되면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다가 결국 서로 화들짝 놀라 알아차리고 적군이 총을 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 전쟁에서 찰리는 슐츠를 구해 비행기로 탈출하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 추락 후 찰리는 기억을 잃게 된다.
찰리는 기억을 잃고 미용사로 살아간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토매니아(힌켈의 독재 국가)의 돌격대(나치 친위대/돌격대를 풍자)가 유대인을 억압할 때 그는 저항한다. 그와 그의 이웃인 한나는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억압에 대한 저항은 순수한 사람이 할 수 있다. 기억을 잃은 찰리가 억압에 저항하는 것을 보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순수한 마음에서 저항을 한다. 이것저것 잴 줄 아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을 염려해 다들 숨어있다. 한나와 찰리는 순수하다. 그들이 저항하는 것은 어떤 대의 때문이 아니다.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이다. 저항은 간사한 사람들은 할 수 없다. 둘의 사랑이 더욱 순수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인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알게 되었는데, 두 배우는 진짜로 부부라고 한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
이 영화에서는 독재자 힌켈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그의 지구본 체조 장면은 너무 뜬금 없어서 웃기다. 그러나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체조를 하다가 마지막에 지구본이 터지고 오열하는 힌켈의 모습은 그의 야욕이 덧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장면에서 나오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음악은 정말 대조적으로 절절하다. 바그너는 민족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래서 나치도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 음악을 썼을까? (개인적으로는 작가와 작품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로엔그린 1막은 엘자와 기적적으로 나타난 기사가 절대권력의 상징인 텔라문트에 대항하여 절대권력을 몰아내는 내용이다. 독재자는 이런 음악을 들어도 자신을 절대권력이 아니라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기사에게 이입할 것이다.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되는 것은 독재자의 자질이다.
더 웃긴 장면은 동맹국의 독재자 나폴리니(이탈리아의 독재자를 풍자한 것 같음)를 만났을 때이다. 측근의 조언에 따라 행동을 설계하는 것을 보면 독재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 어떤 짓들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나폴리니보다 높은 의자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위엄 있게 보이려고 하고, 나폴리니가 먼 길을 돌아오게 설계함으로써 나폴리니가 주눅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두 독재자가 서로 높은 의자에 앉으려고 기싸움을 하는 장면은 정말 웃기다. 그만큼 의미 없는 것이다. 독재자들이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
두 독재자가 오스테를리히 국가를 두고 싸우는 이유도 참 어이가 없다. 둘이 침공 때문에 싸우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이다. 독재자 한 사람의 자존심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 그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 왜 인간이 한 사람의 자존심 때문에 서로 싸워야 하는가? 대의니 뭐니 어떤 말로 대중을 설득해도 그 속내는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것이다. 아직도 현대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전쟁이 대의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야욕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자. 참 씁쓸한 현실이다.
미용사 찰리와 독재자 힌켈은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결국 뒤바뀐다. 군인들은 힌켈을 찰리로 오해해 수용소로 끌고 간다. 오스트렐리히 국가 정복에 성공하여 힌켈을 황제로 추대하며, 그의 승리 연설을 들으려는 시점에 절묘하게 힌켈과 찰리가 바뀐다. 찰리는 갑자기 연설을 하게 된 상황에 불안해한다. 그러나 그가 연설을 시작하는 이유는… ‘희망’ 때문이다.
나는 연설도 명장면이지만 바로 그 전에 그가 ‘희망…?‘이라며 나지막히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1940년에 만들어졌으므로 세계 2차대전이 진행 중이던 상황이다. 모두가 희망을 잃어갈 때 그가 ‘희망…?‘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는 큰 메시지를 표정 연기로 던져주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동료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격려하는 메시지는 아쉽지만 현대에도 먹힌다. 현대에도 인류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 확정된 미래가 보인다. 이렇게 모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찰리 채플린이 ‘희망!‘이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아직도 찰리 채플린의 연설이 먹히는 현대. 씁쓸하다.
놀라운 점은 찰리 채플린은 나치 수용소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유대인 수용소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연설은 정말 두고두고 읽어볼 명연설이다. 여기에 적어두고 종종 들어와서 확인하려고 한다.
가비츠(괴벨스의 패러디)가 연설한 뒤 찰리가 연설하는 것은 큰 대조 효과를 낳는다. 가비츠와 힌켈은 독재자의 표상이다. 가비츠는 가치 있는 것은 승리 뿐이고, 민주, 자유, 평등은 약자의 넋두리라고 한다. 이 승리는 누구의 승리인가? 독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승리이다! 시민의 승리가 아니다.
미안합니다만, 전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전 누군가를 다스리거나 정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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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단 가능하다면 모든 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유대인, 비유대인, 흑인, 백인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서로 돕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자고로 그래왔으니까요.
우리는 남의 불행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행복한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고, 풍요로운 대지는 모두를 위한 양식을 줄 수 있습니다.
인생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방법을 잊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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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중독시켰고,
세계를 증오의 장벽으로 가로막았으며,
우리를 불행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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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계는 우리를 욕심 속에 버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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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었고,
영리함은 무정하고 불친절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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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많이 하지만 느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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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보다는 인간성이,
지식보다는 친절과 관용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비참해질 것이며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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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와 라디오는 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발명품들의 본질 그 자체가
인간의 선량함과 지구적 형제애, 그리고 우리 모두의 화합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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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제 목소리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수백만의 남성들, 여성들, 어린 아이들,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가두는 체제의 희생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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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겪는 불행은 그저 스쳐가는 탐욕일 뿐입니다.
인류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조소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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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지나가고 독재자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이 인류로부터 빼앗아간 힘 또한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인류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한 자유는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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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여!
그대들을 경멸하고, 노예처럼 다루며,
그대들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과 삶을 통제하며,
짐승처럼 다루고 사육하고 조련하여 총알받이로 만드는 이 짐승 같은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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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정상적인 자들에게,
기계의 지성과 마음을 가진 기계 같은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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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기계가 아닙니다!
짐승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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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마음 속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 숨쉬고 있기에,
남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들, 비인간적인 자들만이 남을 증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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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여! 노예 제도가 아닌, 자유를 위해 투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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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 사람, 한 무리가 아닌,
모든 인류에게, 바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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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를 창조할 힘, 행복을 창조할 힘, 바로 그 힘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삶을 자유롭고 아름다운, 멋진 모험으로 만들 수 있는 바로 그 힘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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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힘을 사용합시다.
화합을 이룩합시다.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젊은이에게 미래를,
노인들에게는 안정을 제공할 훌륭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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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같은 자들 또한 이런 것들을 약속하며 권력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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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들은 스스로 자유를 누리며, 사람들은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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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이 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함께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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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고,
국가 간의 장벽을 허물고
탐욕과 증오와 편협을 없애도록 함께 투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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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다스리는 세계,
과학과 발전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군인들이여!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모두 단결합시다.
‘마르크스’의 원시 공산제에서는 자원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가 누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다른 사과나무에 가서 사과를 따먹으면 될 일이었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노동 때문에 사유재산이 등장했다고 했다. 길가에 있는 사과나무는 모두의 것이지만, 자기가 물을 주고 거름을 줘서 키운 사과나무는 자신의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이다. 이러한 농작물의 소유가 해가 거듭되면 토지의 소유로 바뀐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토지에 울타리를 치며 여기는 나의 땅이라고 외칠 때, 사람들에게 그의 말은 엉터리라고 말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이 모든 욕망과 불행, 전쟁의 원인인 사유재산 제도는 없었을 것이라고.
과학 기술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기술의 혜택은 소수에게 돌아간다. 세상에 가치를 주는만큼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구조는 인류가 가장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욕망이 아니라 가치주의에서 건전하게 돌아간다. 학생들이 기업의 제일 목표가 ‘가치’가 아닌 ‘이윤’이라고 배우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욕망에 의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찰리의 연설에서처럼 욕망은 남을 증오하게 만들고 전쟁으로 이끈다.
나는 세상에 어떻게 가치를 줄 것인가?
나는 억압에 저항할만큼 순수한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한 순수함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