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삶을 잘 살 수 있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좋은 삶’을 정의할 수 있는지다. 잘 산 삶은 좋은 삶이다. 좋은 삶이 있다는 것은 안 좋은 삶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삶은 좋고, 누군가의 삶은 안 좋다고 어떤 기준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많은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나 주변 사람들의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삶’, ‘완벽한 삶’을 정의할 수 있는지, 무슨 근거로 정의할 수 있는지 미리 논의해두지 않으면 사람들의 비난으로 인해 썩 곤란해질 것이다.

좋은 삶이나, 잘 산 삶은 이름 자체에서 보듯이 정의 자체가 힘들어보인다. ‘좋은’이나 ‘잘’이라는 뜻은 이미 주관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좋은’의 기준이 다르므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도 다르다. 그렇다면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좋은 삶은 전부 다르고, 이는 객관적인 좋은 삶을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삶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로부터 ‘좋은 삶’을 정의할 수 있는지 추론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추론을 시작해야 한다. 또한, 왜 사람들마다 ‘좋은’의 뜻이 다르고,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다른지 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저마다 생각하는 좋은 삶이 정말로 전부 다 다른지 살펴봄으로써 예상되는 반박도 미리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인간의 자유 의지에 둔다. 이들은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삶의 의미는 더 나은 결정을 통해 좋은 삶에 다가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래서 정해진대로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 의ː지 (自由意志)
[명]
① {윤리학}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어떤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
② {심리학} 두 가지 이상의 동기(動機)에 대한 선택과 결정을 자신이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의지. 내적 자유(內的自由).
(…)
—뉴에이스 국어사전, “자유 의지 (自由意志)”

자유 의지란 스스로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을 선택할 때 우리의 의식이 선택한다고 여긴다. 이는 사람들이 의식에는 반하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무의식에 의해 이뤄지는 선택을 비자발적인 것으로 여기는 풍조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첫 번째 사실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좋은 삶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자유 의지가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민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더 나은 선택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더 나은 선택이 여러 번 이어진다면, 더 잘산 인생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실이 우리가 할 주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자유 의지를 우리의 의식이 사고나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자유 의지의 반대는 우리의 무의식이 우리의 모든 사고나 행동을 알고리즘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존재가 무슨 사고나 행동을 할지 결정되어 있다면 그 존재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우리가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한다는 자유 의지론의 반대 개념이 결정론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결정론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는 사고나 행동에 대한 선택이, 우리 무의식 속에 내재된 동기나 성향에 의해 항상 같은 방법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적어도 위에서 정의한 자유 의지에 한해서는 그렇다.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항상 같은 일련의 과정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알고리즘이라고 한다. 유전자가 같더라도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자유 의지 때문이 아니라 입력된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은 행위자가 처한 외부 상황이나 행위자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경험 같은 내부적인 상황 등을 모두 포함한다. 사실 어떤 욕구가 심리적 추동으로써 의식 수준에까지 올라왔다면, 이미 무의식은 알고리즘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지 정했다. 의식은 이미 내려진 그 결정을 합리화하거나 검토할 뿐이다. 이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면 다음 내용을 보자.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가 있다.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그냥 작은 지렁이처럼 생긴 동물이다. 학명은 Caenorhabditis elegans이다(Maupas, 1900). 이 벌레는 길이가 약 1mm이다. 이 벌레는 흙이나 썩은 과일 등 자연 여러 곳에서, 작은 박테리아를 먹으며 살아간다. 이 벌레는 알에서 태어나는데, 그 뒤에는 3일간 성장하고, 이후에 2–3주 정도를 더 살아간다.

이 동물은 자기가 배고플 때에는 음식을 찾아간다. 이 동물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학습하며 자신의 행동을 바꿀 줄도 안다. 만약 어떤 먹이를 먹고 나서 배탈이 나면 그 먹이는 싫어하며 다시 안 먹으려고 한다. 어떤 냄새를 오래 맡고 있으면 그 냄새에 적응도 한다. 또한 예쁜꼬마선충은 25℃의 온도를 좋아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따듯한 온도를 찾아간다. 머리를 만지면 뒤로 도망가고, 알코올을 마시면 술에 취하기까지 한다.

이 동물에게는 Y염색체가 없지만, 성별은 2가지이다. XX염색체를 가지면 스스로 생식 가능한 자웅동체가 되고, X염색체를 가지면 수컷이 된다. 수컷이 태어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만약 수컷이 있으면 자웅동체 개체는 암컷처럼 행동해 수컷과 교미한다. 수컷이 없으면 혼자 알을 낳는다.

배부른 수컷은 짝짓기 상대를 찾아간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면 음식을 먼저 찾는다. 마치 계층적인 욕구가 있는 것처럼 식욕이 해결된 뒤에 성욕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이 동물은 환경으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결정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동물에게는 더 나은 결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가 고플 때에는 성욕을 해소하는 것보다는 식욕을 해소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처럼 보인다. 이 동물은 자유 의지에 따라 더 나은 선택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동물은 특별히 다세포생물 중에서 최초로 모든 게놈 지도(DNA 서열)가 밝혀진 동물이다. 또한 인간은 이 동물의 세포 구조와 발달 과정 전부에 대해 알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이 생물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즉 어떤 세포가 분열해서 어떤 세포로 가는지 전부 알 수 있다. 예쁜꼬마선충은 처음에 1090개의 세포가 있지만 나중에는 수컷의 경우 1031개의 세포를, 자웅동체인 경우 959개의 세포를 갖게 된다. 이중에는 신경세포 302개도 있다. 그런데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J. G. 화이트는 이 신경세포 뉴런들이 어디서 어디로 연결되는지 예쁜꼬마선충을 8000등분해서 전부 알아냈다. 또한 이 뉴런과 7000개 이상의 시냅스들을 구조화하여 신경망 구조를 전부 알아내 커넥톰 지도를 만들었다(White et al., 1976). 즉 예쁜꼬마선충은 세포 구조와 유전체 지도, 신경망 구조가 전부 알려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예쁜꼬마선충의 신경망 구조를 전부 알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재현할 수 있었다. 302개 뉴런의 연결 정보와 연결 강도를 그대로 구현해 전선으로 연결하고, 프로그래밍해서 로봇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재현된 이 로봇은 예쁜꼬마선충과 똑같이 행동했다. 인간은 이 로봇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프로그래밍한 적이 없다. 먹이가 있으면 따라가라는 행동을 하라고 프로그래밍한 적이 없다. 그저 신경 세포들이 어떤 전기적 신호를 어떤 강도로 주고 받는지만 재현하여 로봇으로 만든 것이다. 그랬더니 예쁜꼬마선충과 똑같이 행동한 것이다. 심지어 이런 예쁜꼬마선충 로봇은 아이들의 블록 장난감인 ‘레고 마인드스톰’ 로봇으로도 재현되어 만들어졌다.

이 동물은 환경으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전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에 따라 정확히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인간이 전부 파악했다고 해서 자유 의지가 없는 것일까? 없다면 이 동물에게 삶의 의미는 없는 것일까? 이 동물이 단지 로봇인지, 아니면 나름의 정신을 지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대상을 인간으로 확장해보자. 언젠가는 인간의 게놈 지도가 전부 밝혀지고, 신경 구조도 전부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재현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 로봇은 인간의 행동을 학습하고 따라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이 아니다. 행동하는 방식이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과 완벽히 같다. 이렇게 인간 마음 속의 모든 알고리즘을 풀어서 재현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자유 의지는 영원히 밝혀낼 수 없는 숭고한 정신 같은 것이 아니다. 언젠가 풀릴지도 모르는 알고리즘이지만, 그 작용이 너무 복잡해 지금은 알아낼 수 없을 뿐이다. 그 복잡함이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스티븐 호킹의 말처럼 “자유 의지가 그 존재의 근본 특징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 존재의 행동을 예측 가능하게 해주는 계산들을 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스티븐 호킹, 『위대한 설계』,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