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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옮김, 숲, 2018
스포일러 있음
윤리학이라고 해서 거창할 게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행복(최고선)에 대한 학문이 윤리학이고, 공동체의 행복(최고선)에 대한 학문이 정치학이라고 했다. 즉,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하면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책 전체에 걸쳐 논리를 펴나가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라고 하면 왠지 도덕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 같다. 당연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도덕적 미덕이나 책임에 관해 이야기한다. 과거에는 도덕의 영역이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선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으니 신이 보기에 좋은 것은 선, 신이 보기에 나쁜 것은 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 사회 구조를 유지하거나, 혹은 권력자에게 유리한 것이 선이었고, 그 반대는 악이었다. 이런 이유로 정해진 도덕이라면 왜 도덕적으로 되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의 도입 없이 선악을 설명해보자. 도덕이 개인이 행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킬 이유가 충분하다. 이것이 윤리학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개인의 행복,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면 사회 구조를 유지할 수가 없다. 때로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제도가 개인의 행복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행복을 최대한 적게 해치면서 공동체의 행복은 최대한 증대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이것을 논의하는 것이 정치학이다.
초등학교 때 맹목적으로 쓰레기를 길에 버리면 안 된다고 배우는 것이 도덕이 아니다. 쓰레기를 마구 버리면 편하다. 행복하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집까지 가져가면 불편하다. 이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길이 깨끗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증대된다면 이것은 정치학에서 논할 문제이다(공동체의 행복). 만약 쓰레기를 집에 가져가서 사회의 바람직한 시민이 된 것 같아 뿌듯하고 행복하다면 이것은 윤리학이다(개인의 행복). 개인의 행복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윤리학의 출발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 제도의 근간인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총 10권까지 있다. 행복한 삶, 잘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10권에 걸쳐 설명한다.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많고, 꼭 정리하고 싶은 내용이라 권을 나눠 전부 정리해보면서 개인적인 의견을 써보겠다. 최대한 쉽게 정리해보는 것이 목적이다. 주요 논리만 정리하고, 곁가지는 의견으로 보내자.
제1권: 인간의 좋음
처음에는 책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는데 몇 가지 용어를 손봐두니 편리했다.
‘좋음’은 ‘선’이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행위나 학문은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학문이나 행위의 ‘목적’은 ‘좋음’이다. 그러므로 ‘선’=‘좋음’=‘목적’으로 이해해서 보면 편하다. 때때로 안 맞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거의 들어맞고, 더 잘 이해가 된다.
‘혼’은 ‘정신’이라고 이해하면 편리하다. 1권에서 인간의 좋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3가지 좋음을 이야기하는데, 외적 좋음, 몸의 좋음, 혼의 좋음이라고 한다. 즉, 좋음은 크게 외적 조건에 의한 좋음과 내적 조건에 의한 좋음으로 나눌 수 있다. 내적 좋음은 몸과 혼인데, 이것을 몸과 마음, 즉 육체와 정신으로 이해하면 딱 맞는다. 나는 처음에 혼을 ‘영혼’으로 생각해서 이해하려 하니 ‘인간은 영혼이 존재한다.‘라는 공리가 있는 것인가 해서 알쏭달쏭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이것을 그냥 정신으로 생각하니 갑자기 이해하기가 엄청 편해졌다.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히 크게 문제도 없고 말이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혼’=‘정신’이다.
논리 1: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 다른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 ‘최고 목적’도 있다.
수학에서 식을 수립하고 이항을 연습하는 목적은 식을 잘 다루고, 이항을 잘 하려는 목적이다. 이항을 잘 하려는 것은 결국 방정식을 잘 풀기 위한 목적이다. 몇 가지 더 목적을 따라갈 수 있다. 방정식을 잘 풀기 위한 목적은 학생들에게는 문제를 맞히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고, 그것은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고, 그것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고, 그 목적은 취직을 잘 하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고, 그것은 부모님의 행복이나 자신의 행복의 목적에 종속된다.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예시를 들 수 있다. 학자들에게 방정식을 잘 풀기 위한 목적은 일상의 문제를 풀기 위해, 개인적인 성취감을 위해, 논문을 쓰기 위해, 그래서 학계에서 좋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혹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등등 여러 가지 목적을 따라갈 수 있다. 이렇듯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 그러면 종속된 목적보다는 주된 목적이 더 나은 목적이다. 이항을 잘 하는 것보다는 방정식을 잘 푸는 목적이 더 높은 목적이다.
논리 2: 인간의 최고 목적은 행복이다.
그런데 행복은 다른 목적을 종속하지만, 다른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 행위의 모든 목적은 결국 ‘행복’으로 귀결된다.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되며, 다른 목적을 위해 행복을 추구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우리가 신을 칭찬하지 않듯이 행복한 사람을 칭찬하진 않는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신처럼 존경의 대상이다. 이것은 행복이 최고 목적이라는 또다른 증거이다.
논리 3-1: 그러므로 최고의 학문은 공동체의 최고선, 최고 행복을 다루는 정치학이다.
논리 3-1 - 근거 1: 행복은 개인의 행복과 국가(공동체)의 행복이 있다.
개인의 좋음, 행복(윤리학)과 국가의 좋음, 행복(정치학)이 같은 것이라고 해도, 국가의 좋음이 분명 더 중요하다.
논리 3-1 - 근거 2: 모든 학문은 정치학에 귀속된다.
정치학은 다른 모든 학문을 이용한다. 또한, 정치학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므로 다른 학문의 모든 목적을 포괄한다. 정치학은 인간을 위한 좋음, 행복을 추구한다.
논리 3-2: 인간의 좋음은 외적인 좋음, 몸의 좋음, 정신의 좋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중에 가장 좋은 것은 정신의 좋음이다.
외적인 좋음은 외적인 조건에 의한 좋음이다. 돈이나 외모, 지위, 가족 등 외부 환경에 의한 좋음이다. 행복에 외적인 좋음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외적 환경에 따라 행복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운(환경)에 의한 좋음과 다를 바 없다. 돈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 궁극적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몸의 좋음에 대한 것은 언급이 없지만 이것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아니기에 외적인 좋음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내가 잘못 읽어서 몸의 좋음에 대한 내용을 못 찾았을 수도 있다. 대중적인 쾌락은 외적 좋음이나 몸의 좋음에 속하는데 이것은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최고로 좋진 않다.
논리 3-2 - 근거 1: 정신의 좋음은 외부 환경에 상관 없이(적은 영향으로) 행복할 수 있다.
정신의 좋음은 자신이 좋을 때 좋을 수 있다. 정신의 좋음인 쾌락은 외부 환경에 상관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논리 3-2 - 근거 2: 정신의 좋음인 미덕을 갖추면 외부 환경에도 행복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당연히 외부 환경, 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도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행복이 운에 의한 것이라 계속 바뀔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죽을 때에서나 판단할 수 있다. 죽기 전까지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면 행복한 사람, 행복한 순간보다 불행한 순간이 많았다면 불행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정신적 미덕을 갖춘 사람은 불행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적 미덕을 갖춘 사람은 외적 환경에 의해 행복이 크게 바뀌지 않으므로 더욱 행복한 것이다.
논리 3-2 - 근거 3: 인간만의 고유의 목적에 인간 고유의 행복이 있다. 그것은 이성, 즉 정신의 활동이다.
생물에게는 본능(영양섭취와 성장), 감정(감각), 이성(정신)의 기능(목적)이 있다. 그런데 영양섭취와 성장의 기능은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에게 있는 기능이자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간 고유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감각은 모든 동물에게 있는 기능이자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간 고유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 고유의 기능은 이성(정신)의 기능이다. 인간 고유의 목적, 행복은 이성의 기능에 있다. 이성은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판단된 옳고 그름에 순응하는 기능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향락적 삶, 정치가의 삶, 관조적 삶이다. 향락적 삶은 본능과 감정의 기능을 충족시키므로 짐승도 느낄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향락적 삶은 짐승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정치가의 삶은 명예를 추구한다. 그런데 명예는 받는 사람보다 그것을 부여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명예가 오히려 부여하는 사람에게 있다면 명예는 명예를 추구하고 받는 사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치가의 삶은 명예보다는 명예를 통해 인정되는 미덕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좋다. 미덕은 그 사람의 고유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관조적 삶은 1권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10권에서 제일 좋고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함)
논리 4: 그러므로 최고의 행복을 위해서는 정신의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정신적 미덕을 갈고 닦음으로써 이룰 수 있다.
인간의 행복, 좋음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적 미덕을 연구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미덕에 대한 연구와 미덕을 실천하기 위한 평생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덕은 행위함으로써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 미덕이 마음 속에 있다고 미덕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미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게 미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논리 5: 정신적 미덕은 도덕적 미덕과 지적 미덕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지적 미덕은 철학적 지혜, 실천적 지혜, 이해력 등을 말한다. 지적 미덕은 교육을 통해 함양한다.
도덕적 미덕은 후함, 절제, 용기 등을 말한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을 통해 함양한다.
이 미덕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 권들로 이어진다.
나의 생각
미덕에 대한 이야기에서 정말 놀랐다. 미덕을 심리 자본으로 바꿔서 읽으면 현대 심리학의 연구 내용과 거의 들어맞는다. 미덕을 갖추면 불행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를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심리 자본에 대한 내용을 알면 편하다. 심리 자본 중에는 예를 들어 긍정 심리 자본 4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낙관주의, 희망, 회복탄력성, 자기효능감이다. 낙관주의만 예를 들자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능력이다. 낙관주의는 과거에 대한 낙관주의, 현재에 대한 낙관주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로 나눌 수 있다. 현재에 대한 낙관주의가 높으면 시련이 닥쳐도 그것을 기회로 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떤 짐승이 자기 마당에 똥을 쌌다고 가정해보자. 낙관주의가 낮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좌절할 수 있다. 낙관주의가 높으면 짐승의 똥을 거름으로 써 마당의 정원에 거름이 생겼다며 좋아할 수 있다. 똑같은 상황에 대해 어떤 사람은 불행해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해한다. (마틴 샐리그만, 『긍정심리학』 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심리학 연구 자료들이 없었음에도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생각과 세상에 대한 관찰, 그리고 논리만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 정말 놀랍다.
제레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근대 철학자들에게서 공리주의가 출발한 줄 알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이미 이런 논의가 심도 깊게 이뤄지고 있는 것에 놀랐다. 대체 고대 그리스는 무슨 나라였던 것인가. 정치학도 얼른 읽어보고 싶다. 읽을 게 산더미이다!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중 아주 인상 깊은 말이 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든 것이라도 버리는 쪽이 더 낫다. 아니, 그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철학도 논리를 통해 거짓이라고 판단된다면 사정 없이 버렸다. 특히 1권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내용을 버리고 출발한다. 이데아는 플라톤 사상의 핵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위에 대한 속성에 대해 날카롭게 판단한 것도 잘 보자. 명예는 받는 사람보다 부여하는 사람에게 있다. 인플루언서, 연예인의 지위는 대중이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의 사회적 바람직성에 부합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만약 그러한 사회적 바람직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그들에게서 지위를 빼앗아간다. 지위가 높아지면 좋은 점은 통제력과 자유이다. 통제력과 자유에는 자원을 분배하거나 선취할 권한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대중의 사회적 바람직성에 부합해야 하는 인플루언서, 연예인은 오히려 완전한 통제력이나 자유를 얻는다고 할 순 없다. 아이돌이 몰래 하던 연애가 대중에게 들킨다면 아이돌의 지위는 빼앗긴다. 만약 아이돌이 성적 매력을 통해 대중으로부터 지위를 얻었다면, 아이돌의 연애는 그러한 성적 매력을 반감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위는 대중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지위를 추구할 것이라면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을 잘 봐야 한다. 유튜버들이 사회적 바람직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위가 추락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상을 받아서 지위가 높아지고 싶다면, 상을 부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봐야 한다. 지위가 높아지고 싶다면 상을 받는 사람보다 상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노벨상을 받고 싶다면 상을 주는 사람이 누구이고, 상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자. 노벨상을 받아 높은 지위를 얻고 싶다면 왕이 되거나, 노벨에 필적한 인물이 되어 상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이것이 지위의 속성이다. 지위는 통제력과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지위를 추종하다가는 오히려 통제력과 자유를 잃을 수 있다. 자녀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다른 생각도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 경제학, 과학, 심리학의 증거들을 봤다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현대 심리학의 결론은 행복도 결국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행복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이나 번식에 유리한 행동들을 강화하기 위한 기능이고, 고통(불행)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이나 번식에 불리한 행동들을 피하기 위한 기능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면 행복하고, 사랑을 나누면 행복하다. 배고프면 괴롭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 괴롭다. 행복이 금방 사라지는 이유도 생존을 위한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행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다음 음식을 찾으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 사라진다면 또 행복하기 위해 다음 음식을 찾아나설 것이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참고)
아이를 낳으면 가장 행복한 이유도 이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것을 상회하는 행복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고통을 상회하는 행복이 있는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고, 그런 특성이 없는 사람들은 아이를 덜 낳았다고 해보자. 양육의 고통을 상회하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아이가 점점 많아진다. 유전자풀에서 이런 특성은 강화되고, 이런 특성이 없는 사람들은 도태된다. 그래서 양육은 큰 고통이자, 그것을 상회하는 큰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에 쏟아지는 증거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의 사유 방식이라면 더 엄청난 결론을 내렸을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야기해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책은 한계가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만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권의 논리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면, 나머지 2–10권의 논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현대 과학을 기반으로 한 그 2–10권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을 나의 일이자 사명으로 삼자.
▼ 다음 권에 대한 이야기
2권부터 5권은 도덕적 미덕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윤리학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1권에서 봤듯이 기본 전제는 다르다. 도덕을 지켜야 하는 이유, 도덕적 미덕을 갈고 닦아야 하는 이유는 신이 선악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도덕적 미덕을 갈고 닦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제2권: 도덕적 미덕
논리 1: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고, 지적 미덕은 교육에 따라 생겨나고 성장한다.
논리 1 - 근거 1: 도덕적 미덕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다.
행동의 실천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다. 용감한 사람이 되려면 용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되므로, 도덕적 미덕은 습관을 통해 생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떤 습관을 들이는지에 따라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큰 차이가, 아니 모든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논리 2: 유덕(미덕)한 행위는 특정 마음가짐을 갖고 해야 한다.
논리 2 - 부연 1: 특정 마음가짐이란 첫째, 행위자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둘째, 행위를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해야 하며, 셋째, 확고부동한 마음가짐에서 행위해야 한다.
논리 2 - 근거 1: 미덕은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단순히 감정 때문에 비난 받거나 칭찬받지 않는다. 칭찬이나 비난은 감정의 표현 방법 때문에 듣는 것이다. 하지만 미덕이나 악덕은 칭찬받거나 비난 받는다. 또한, 감정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미덕은 우리의 선택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미덕은 감정이 아니다.
또한, 능력이 아니다. 미덕은 미덕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칭찬받지 않고, 미덕을 행할 때 칭찬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덕은 능력이 아니다.
미덕은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므로 마음가짐이다.
논리 2 - 근거 2: 미덕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것을 행할 때 즐거운지 괴로운지에 따라 달려있다.
유덕한 행위를 할 때 즐거워하는 사람은 유덕한 사람이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악덕한 사람이다. 즉, 유덕하거나 악덕한 행위를 할 때 즐거운지 괴로운지는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미덕을 행할 때 쾌락을 느끼고, 도덕적 악덕을 느낄 때 고통을 느끼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훈련 받아야 한다. 쾌락과 고통을 잘 다루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잘못 다루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된다. 쾌락에는 고매한 것, 유용한 것, 즐거운 것이 있으며, 고통에는 창피한 것, 유해한 것, 괴로운 것이 있다.
→ 그러므로 미덕과 정치의 관심사는 시종일관 쾌락과 고통이어야 한다.
논리 3: 도덕적 미덕은 중용에 있다.
논리 3 - 근거 1: 행위를 설명한 내용은 개략적이어야 한다.
행위를 할 때는 행위자나 상황 모두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세밀하게 서술할 수 없다. 건강에 관한 문제처럼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논리 3 - 근거 2: 도덕적 자질들은 모자람이나 지나침에 따라 손상된다.
그러므로 도덕적 미덕은 중용에 따라 보존된다. 그래서 미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는다. 도덕적 미덕은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논리 3 - 부연 1: 어떤 행위들은 항상 지나치다.
악의, 파렴치, 질투, 간음, 도둑질, 살인 등은 그 자체로 나쁘기 때문에 항상 지나치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행하는 것 자체가 바로 중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논리 3 - 예시
자신감은 지나치면 무모하고, 부족하면 겁쟁이다. 중용은 용기이다.
쾌락은 지나치면 방종이고, 부족하면 무감각한 사람이다. 중용은 절제이다.
소액 돈 거래에서 지나치면 방탕이고, 부족하면 인색이다. 중용은 후함이다.
거엑 돈 거래에서 지나치면 속물이고, 부족하면 좀스러움이다. 중용은 통 큼이다.
명예에서 지나치면 허영심이고, 부족하면 소심함이다. 중용은 자부심이다.
욕구가 지나치면 야심가이고, 부족하면 야심 없는 사람이다. 중용에 대한 용어는 없다.
분노가 지나치면 성마름이고, 부족하면 기개 없음이다. 중용은 온유이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지나치면 허풍이고, 부족하면 거짓 겸손이다. 중용은 진실한 사람이다.
재미가 지나치면 익살이고, 부족하면 촌스러움이다. 중용은 재치이다.
올바른 즐거움이 지나치면 맞장구, 아첨이고, 모자라면 심술쟁이이다. 중용은 상냥함이다.
논리 3 - 부연 2: 미덕은 때로 양극단 중 어느 하나에 더 가깝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모자람이 중간과 더 대립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침이 중간과 더 대립한다. 본성적으로 더 끌리는 것들은 중간과 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쾌락에 더 끌리므로 쾌락의 모자람인 무감각보다 지나침인 방종이 중용인 절제와 더 대립한다.
⠀→ 그러므로 본성적으로 끌리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더 쉽게 중용을 지킬 수 있다.
내 생각
2권을 더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을 통해 계발되고, 그것은 쾌락과 고통을 올바르게 써서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 미덕은 중용에 있다.
도덕적 미덕은 중용에 있으므로 정확한 중간을 서술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범위로 기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혹은 미덕의 목적이 분명하면 각 개별 상황에 맞는 미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온유의 목적을 보자.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참는 것은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대함은 자발적 복종인 명성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상대방이 일부러 나에게 피해를 끼친 상황이나, 똑같은 실수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에게 피해를 끼친 상황이나, 나를 무시하려고 피해를 끼친 상황 등에서는 내가 관대함을 보여준다고 해서 상대방으로부터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참으면 오히려 나의 지위가 내려간다. 이때는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온유의 목적이 명성 확보라면, 어떤 상황에서 분노를 참고,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하는지 조금은 더 분명하게 기술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미덕의 목적을 서술하거나, 중용의 범위를 설정하면 좀 더 자세한 서술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제3권: 도덕적 책임
논리 1: 미덕과 악덕은 자발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논리 1 - 논리 1: 미덕의 활동은 수단에 관련된다.
논리 1 - 논리 2: 숙고의 대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우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지, 그 수단을 숙고하지, 목적 자체를 숙고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치료할지 고민한다. 목적은 숙고 대상이 아니라 소망의 대상이다.
논리 1 - 논리 3: 숙고를 통해 합리적 선택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논리 1 - 논리 4: 합리적 선택은 자발적 선택에 포함된다.
자발적 선택이 꼭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지만, 합리적은 선택은 자발적 선택에 포함된다. 숙고한 뒤 합리적 선택으로 보이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합리적 선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 1 - 정리: 미덕의 활동은 숙고를 통해 합리적 선택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은 자발적 선택이므로 미덕은 자발적 행위이다. 그 반대인 악덕도 마찬가지로 자발적 행위이다.
논리 2: 개별 미덕 1 - 용기는 두려움의 중용이다.
논리 2 - 부연 1: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는 고매한 죽음이다.
두려운 것들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들이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는 죽음이다. 어떤 죽음인가?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같은 고매한 죽음이다.
논리 2 - 부연 2: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견딘다.
용기에 있어서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은 두려워하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두려워하거나, 그래서는 안 될 때 두려워하는 것 등이 있다. 용감한 사람은 자신감이 있다. 용기는 명예를 바라는 욕구와, 불명예(수치심)를 회피하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강요에 의한 용기나, 지식에 의한 용기나, 기개나, 낙관에서 비롯된 용기들은 유사 용기이다.
논리 2 - 부연 3: 두려움이 지나치게 없는 사람은 미치광이이거나 무감각한 사람이다. 두려운데 자신감이 과한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다. 무모한 사람은 용감한 척 할 뿐이다.
무모한 사람들은 자신감을 과시하지만, 두려운 것들을 견디지 못한다.
논리 2 - 부연 4: 두려움이 지나친 사람은 겁쟁이이다.
겁쟁이는 자신감이 모자라고, 고통에 지나치게 반응해서 쉽게 본색을 드러낸다. 겁쟁이들은 비관적이다.
논리 3: 개별 미덕 2 - 절제는 몸의 쾌락에 관련된 중용이다.
논리 3 - 부연 1: 절제는 몸의 쾌락에 관련된다.
개인적 쾌락에 있어서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정상 수준 이상으로 좋아하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좋아하는 것 등이 있다. 방종은 세 가지 모두에서 지나치다. 쾌락은 본성적 욕구이므로 보통 지나침이라는 한쪽 방향(방종)으로 벗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절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방종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논리 3 - 부연 2: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방종은 특히 촉각에 관련된다. 또한 방종은 특히 더 자발적이다.
방종은 오감 중 특히 촉각에 관련된다. 방종한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미각을 활용해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목구멍을 넘길 때의 쾌감을 즐기는 것이므로 특정 부위의 촉각에 관련되는 것이다. 성교도 특정 부위의 촉각에 관련된다.
방종은 즐거운 것에 이끌려 다른 것들보다 먼저 그런 것들을 선택하는 것이므로 더욱 자발적이다. 그러므로 방종은 더욱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내 생각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용감한 사람이 고매한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죽음보다 수치심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용기가 미덕이라면 쾌락과 고통을 올바르게 써서 용기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쾌락 중 고매한 것을 이용하여 명예를 추구하고, 고통 중에는 창피한 것을 이용하여 불명예를 피하는 것이다. 2권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올바르게 써서 미덕에 도달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제와 건강을 예로 들어보자. 건강에 나쁜 음식을 참는 것은 괴롭다. 보통 건강에 나쁜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인드는 쾌락과 고통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미덕을 행하는 데 괴롭다면 그것은 잘못된 마음가짐이므로 미덕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건강에 나쁜 음식을 참는 것을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즐겁게 만들 수 있을까? 쾌락에는 고매한 것, 유용한 것, 즐거운 것이 있다고 했다. 건강에 나쁜 것을 참음으로써 자신은 건강 관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고매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쾌락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건강에 나쁜 음식을 먹을 때 수치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건강 관리를 포기한 막 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쾌락과 고통을 올바르게 쓰도록 연습해야겠다.
제4권: 다른 미덕들
논리 1: 개별 미덕 3 - 후함은 소액 돈 거래에 대한 중용이다.
논리 1 - 부연 1: 후함은 주는 것에 관련되어 있으며, 올바르게 주는 것이다.
주기보다는 받는 것이 쉽다. 받는 사람은 칭찬 받지 못하지만 주는 사람은 칭찬 받는다. 주는 것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다. 후한 사람은 당연히 주어야 할 사람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만큼, 당연히 주어야 할 때 준다. 후한 사람은 그런 것을 즐거워한다. 후함은 주는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사람의 재산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후함은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후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는 어려운데, 재물을 그 자체가 아니라 주는 수단으로서만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논리 1 - 부연 2: 주는 것이 지나치면 낭비이다. 낭비하는 사람은 자제력 없이 무절제 하게 돈을 쓴다.
낭비는 주는 것에서는 지나치고, 받는 것에서는 모자란다. 하지만 낭비하는 사람은 돈을 쓰는 정도와 방법만 교정하면 금방 중용으로 갈 수 있다. 나이와 가난으로 쉽게 치유될 수 있다.
논리 1 - 부연 3: 주는 것이 모자라면 인색하다. 인색이 낭비보다 훨씬 나쁘다.
인색은 주는 것에서는 모자라고, 받는 것에서는 지나치다. 그런데 사소한 일에서만 지나치게 받는다. (큰 일에서 지나치게 받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보통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쉽기 때문에 인색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인색이 더 인간 본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는 것에서 모자라지만, 남의 재물을 탐내진 않는 사람들은 노랑이, 깍쟁이, 구두쇠라고 불린다. 아무데서나 아무것이나 받는 사람들은 뚜쟁이나, 고리대금업자 같은 추잡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치사스러운 탐욕을 갖고 있다. 이들은 적은 이익을 위해 비난을 감수한다. 받아서는 안 될 데서 이익을 치사스럽게 탐하는 도둑이나 사기도박꾼도 인색한 사람이다. 도둑은 이익 때문에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쓰고, 사기 도박꾼은 제 것을 줘야 하는 친구들에게서 오히려 이익을 취한다.
논리 2: 개별 미덕 4 - 통 큼은 거액 돈 거래에 대한 중용이다.
논리 2 - 부연 1: 통 큼은 규모가 큰 적절한 지출이다. 큰 규모로 지출하는 사람만이 통 큰 사람이라고 불린다.
통 큰 사람은 지출의 규모가 크고 적절하다. 그러므로 성과도 그러하다. 통 큰 사람의 성과는 비용에 걸맞다. 하지만 그는 비용을 꼼꼼히 따지기 보다는 고매한 목적을 위해 지출을 감당하고, 어떻게 해야 가장 고매하고 적절한 성과를 올릴지 고민한다. 통 큼은 큰 지출을 감당해야 하므로 가난한 사람은 통이 클 수 없다.
논리 2 - 부연 2: 규모가 큰 적절한 지출이 모자란 것은 좀스러움이다.
좀스러운 사람은 푼돈을 아끼려다 고매한 것을 훼손한다. 어떻게 하면 경비를 낮출 수 있을까 궁리하며, 매사 큰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리 2 - 부연 3: 규모가 큰 적절한 지출이 지나친 것은 속물근성, 무미건조이다.
속물근성은 그래서는 안 되는 환경에서 그래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과시적 소비를 한 것이다. 그는 사소한 일에 거액을 지출하고 자기 과시를 한다. 그렇게 하면 남이 감탄할 줄 알고, 자기 부를 과시하기 위해 큰 지출을 한다.
논리 3: 개별 미덕 5 - 자부심은 큰 명예와 관련된 중용이다.
논리 3 - 부연 1: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자기가 큰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큰일을 할 만한 사람이다.
명예는 가장 큰 외적인 좋음인데, 그러므로 자부심 있는 사람은 명예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명예와 불명예를 놓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 부와 권력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예 때문에 바람직하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큰일을 할 만한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이다. 그들은 하찮은 일에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큰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그는 은혜를 베풀기 좋아하고, 은혜를 받기는 싫어한다. 또한, 자부심은 미덕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미덕들에 주어지는 일종의 영관이다. 미덕이 없는데 능력만 있는 사람들은 거만하고 불손해진다.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을 흉내낼 뿐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영향력 있는 사람 앞에서는 거만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겸손하다. 영향력 있는 사람을 능가하는 것은 어렵지만,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감탄하지 않고, 원한도 품지 않는다. 그들은 서두르지도 않는다.
논리 3 - 부연 2: 자기 가치를 과대평가하여, 자기는 큰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은 허영심이 강한 사람이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과분한 명예를 추구하다가 부적격자로 드러난다. 자신의 성공을 떠벌리고 다닌다.
논리 3 - 부연 3: 자기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소심하다.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노예 근성이 있다. 또한,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아첨꾼이다. 그들은 자기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들은 고매한 행위나 사업, 외적인 좋음을 모두 삼가므로, 더 나쁜 자기평가를 하게 되고 이는 악순환된다. 그러나 소심함이 더 흔하고, 소심하면 더 출세하기 어려우므로 더 나쁘다.
논리 4: 개별 미덕 6 - 작은 명예와 관련된 중용은 명칭은 없지만, 칭찬받을 만하다.
논리 4 - 부연 1: 작은 명예도 적당한 정도로 원할 수 있다. 이런 중용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명예를 과하게 추구하면 야심가라고 비난받고, 명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온건하다고 칭찬받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야심가를 남자답고 고매한 것을 사랑한다고 칭찬하기도 한다. 작은 명예도 적당한 정도로 원할 수 있다. 이것이 작은 명예에 대한 중용이다.
논리 5: 개별 미덕 7 - 분노가 지나치면 성마름이고, 분노가 모자라면 바보 취급을 당한다. 분노에 관련된 중용은 온유이다.
하지만 분노하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용서해주는 경향이 더 크다.
논리 6: 개별 미덕 8 - 남의 감정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은 비위나 맞추는 사람이나 아첨꾼이고, 너무 신경 안 쓰는 사람은 심술쟁이나 시비꾼이다. 남의 감정을 신경 쓰는 것과 관련된 중용은 용어는 없지만 우애와 가깝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애와는 다르다.
그는 탁월한 사람과 보통 사람을, 더 친한 사람과 덜 친한 사람을 다르게 대한다. 그리고 올바른 원칙에 따라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 하거나, 남을 즐겁게 해주려 할 것이다.
논리 7: 개별 미덕 9 - 자신이 갖고 있지 않는 자질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허풍선이이고, 거꾸로 자기가 갖고 있는 자질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이다. 이에 대한 중용을 지키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은 실제보다 줄여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과장은 역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보다 허풍선이가 더 나쁘다.
논리 8: 개별 미덕 10 - 농담이 지나친 사람은 익살꾼이고, 농담을 하지 않고 남의 농담도 다 거부하는 사람은 촌스럽고 딱딱한 사람이다. 농담에 관한 중용은 재치와 기지이다.
재치는 임기응변에 능한 것처럼, 두뇌의 회전이 빠른 양 농담을 적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기지 있는 사람이란 점잖은 사람들이 재미삼아 말하고 듣기에 적절한 것들을 말하고 듣는 사람이다. 기지가 있는 사람은 더 점잖은 풍자를 한다. 교육 받은 사람이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한다.
논리 9: 수치심과 자제력은 미덕이 아니다.
수치심은 자발적 행위에서만 느끼는데, 훌륭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치심은 미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감정에 따라 사는 젊은이들이 실수를 할 때 수치심을 느끼면 칭찬한다.
자제력도 미덕이 아니라 미덕과 다른 것의 혼합물이다. 이는 7권에서 설명하겠다.
제5권: 정의
(작성 중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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