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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 〈시민 케인〉, 1941
스포일러 있음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에서 실패한 남자 케인
그가 죽으면서 가장 아쉬워하고,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엄청난 부자로 그려지는 그의 삶이 ‘잘 사는 삶’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대부분이 부자되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 어쩌면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질 것인지도 모른다.
케인은 제너두라는 큰 성에 살며, 어렸을 때 거저 얻은 광산 덕분에 엄청난 부자가 된다. 어머니는 어린 케인을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다른 재력가에게 보낸다.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은 날, 케인은 스케이트 보드를 들고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다고 떼를 쓴다. 그러나 우는 케인은 결국 어머니를 뒤로하고 헤어지게 된다.
케인은 커서 광산을 물려받고, 언론사를 차린다. 노동자의 편에서 기사를 작성하겠다는 그의 선언에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의 선언은 진정성 있는 선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빠르게 명성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을까? 처음에는 어느정도 진정성도 느껴진다. 그는 자본가들을 두려워하지 않아 각종 고발 기사를 쓰고, 그의 혁신 정신에 맞지 않는 편집국장을 해고하고, 침대까지 가져와 신문사에서 지내기도 한다.
케인의 언론사는 승승장구하며 더욱 많은 돈을 벌게 되고, 케인은 대통령의 조카딸과 결혼하게 된다. 아들도 낳아 행복하게 지내고, 정계에까지 진출한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가장 호화로운 궁전에 막대한 부, 사람들의 생각을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권력(제1언론사), 엄청 지위가 높고 아름다운 여자와의 결혼, 귀여운 아들까지… 여기서 무엇이 그의 삶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여길 수 있을 때였는데, 그때부터 그의 삶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그는 가수 지망생 수잔과 사랑에 빠져 바람을 피게 된다. 이 불륜으로 인해 정계 진출은 실패한다. 또한, 아내는 이혼하여 아들을 데리고 떠나간다. 막상 사랑에 빠졌던 수잔은 노래 실력이 형편 없다. 자신이 공연을 주선해주고, 자신의 언론사를 통해 수잔을 띄워줘도 다른 비평가들에게서 악담이 들려온다. 그의 권력이나 재력을 보고 빌붙었던 떨거지들은 하나 둘씩 떨어져나간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친구 릴런드는 남아있었다. 릴런드는 수잔의 노래 실력에 대해 거짓을 더하지 않고 그녀의 노래 실력이 형편 없다는 기사를 쓴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케인은 릴런드를 내보내고, 릴런드는 떠나게 된다. 케인의 언론사는 노동자의 편에서 진실을 작성하겠다는 사명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결국 케인의 언론사도 문을 닫게 된다.
케인은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 자녀, 명성, 주변 사람들, 친구까지도… 그런 그가 인생에서 가장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케인이라면 인생의 모든 달콤함과 쓴맛을 본 것 같다. 그가 가장 아쉬워한 것은 ‘로즈버드’로 축약되는 어머니와의 사랑, 추억이다. 대부분 사람은 돈을 원하지만, 정작 케인은 대부분 사람이 가진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어쩌면 그가 했던 모든 노력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 언론사를 차리고, 아내를 만나고, 바람을 피우고 그랬던 것이다. 이것은 수잔이 하는 말에서 드러난다. 수잔은 케인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주기만을 원한다며 케인을 떠난다. 그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 사랑의 구멍을 메우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이런 비극이 있나! 그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점점 마음이 아파온다. 그를 잘못했다고 감히 질타할 수 있을까? 그는 단지 사랑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사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좀 심드렁하게 봤다. 그냥 한 사람이 재력이나 권력에 물들어 타락하는 뻔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러다 마지막 ‘로즈 버드’의 정체를 아는 순간 앞의 모든 순간들이 갑자기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그 가슴 아픈 것이 마지막 단 한 컷에서 한꺼번에 밀려왔다. 개인적으로 그런 어머니와의 추억이나 사랑의 부재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은, 어머니가 그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케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를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려는 것도 사랑에서 시작된 마음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도 케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케인과 다른 점은 나는 유년 시절 생긴 사랑의 구멍을 메우고도 넘칠만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주고 받는 방법을 알았다. 완벽하게 알았다고 할 순 없지만, 나를 교정해줄 평생의 동반자가 있다. 그 동반자 덕분에 케인과 나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행복한 삶, 즉 잘 사는 삶에 대해 섣불리 평가할 수 없다면서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를 예로 든다. 프리아모스는 그 어느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아들들을 잃고, 가장 아끼던 아들 헥토르의 시체가 질질 끌려다니는 것을 봐야 했다. 적진에 가서 그 시체를 가져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해야 했다. 한 인생이 지금까지 행복하다고 해서 그 인생을 행복한 삶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진짜 잘 사는 삶이었는지는 죽는 순간에 저울 재듯 결정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죽는 순간에만 행복을 따질 수는 없지만, 죽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외적 좋음(부, 명성, 외모 등)에 취해 방심하는 순간 행복, 즉 잘 사는 삶은 멀어지게 된다.
시민 케인에서 이야기한 인생의 열쇠는 사랑이었다. 물론, 케인을 취재하는 기자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삶을 한 단어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잘 산 인생을 사랑 한 단어로 환원할 순 없다. 하지만 사랑이 잘 산 인생의 퍼즐 한 조각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아주 큰 한 조각인 것은 분명하다.
}시민 케인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너무 아픈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