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핀처, 〈더 킬러〉, 2023

데이비드 핀처, 〈더 킬러〉, 2023

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는 어려울 게 없다. 그냥 스토리를 즐기면 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이해하는 데 어려울 게 전혀 없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신이나 국가, 어떤 이념도 믿지 않는다. 오직 보수를 받았는가만이 중요하다. 그에게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성악설을 믿으며, 죽음 뒤엔 차가운 공허뿐이라고 믿는다. 공감은 나약함이라고 여긴다. 그런 그가 암살 미션에 실패하고 복수하는 것이다.

그런 그도 인간적이다. 무엇보다 침착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 때문에 미션에 실패한다. 복수할 때 결국 그는 자신의 스마트 워치인 심박수 측정기를 차에 두고 간다. 또한, 그는 브로커를 죽이러 갔을 때 브로커의 자비를 구하는 비서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녀를 마치 사고사인 것처럼 죽임으로써 말이다. 무엇보다 복수라는 것 자체가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지 않은가? 거기에는 어떤 보수도 따르지 않는다.

영화가 이해하기 쉬워서 영화의 해석에 대해 특별히 적을 건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몇 가지 생각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첫 번째는 면봉처럼 생긴 여자 전문가 킬러를 찾아 레스토랑에 갔을 때 든 생각이다.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신세에 대해 한탄한다. 그러면서 곰을 사냥하러 간 사냥꾼의 이야기를 한다. 사실 사냥꾼은 사냥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곰에게 당해지는 수모를 즐기러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여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건강하게 살지 말고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걸 그랬다며 후회한다. 절제하는 삶은 장수하기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장수를 위해 참고 사는 것이라면 빠른 죽음 앞에 그런 것은 의미 없어지게 된다. 그것은 또한, 고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태도는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즐거울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것이다. 미래의 즐거움이 현재의 즐거움보다 낫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미래의 즐거움이 더 나쁠 수도 있다. 미래라는 시간을 확보해도 행복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행복과 미래의 시간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절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모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쾌락의 쳇바퀴 법칙 때문에 전체 효용은 감소한다. 미래의 시간 축은 줄어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에 가까운 것인가?

간단하다. 절제 자체를 즐기면 된다. 그러면 절제를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미래의 시간도 확보하고, 현재의 행복도 유보할 필요가 없다. 절제를 통해 현재를 즐기니 말이다. 절제를 통해 생기는 자부심을 즐기면, 어느 쪽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주인공이 클라이언트를 찾아갔을 때 하는 독백으로부터 생각난 것이다. 주인공은 부는 클수록 몸을 숨기기 어렵다고 한다.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인정 받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과시를 통해 인정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급 아비투스이다. 기성 부자들과 벼락 부자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들이 과시를 하고자 하는가? 아닌가? 과시를 한다면 그들은 과시가 통하는 세상에서 살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던져버리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그런 꼬리표가 과시이다.

반면 오랫동안 부를 굳혀온 사람들은 과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과시하지 않는 것이 과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명품을 사용하는 것은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품을 사는 것이 아무런 특별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돈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지위를 보장한다. 하지만 지위는 자유를 위한 것이다. 과시는 가난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지 몰라도, 이미 부자인 사람에게는 열등한 발악으로 느껴진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모르고 과시하는 것은 자신이 바보라고 광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삼가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해치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는 쪽이 더 지위가 낮은 쪽이다.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은 그만큼 약점도 많이 드러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는 부를 과시했기 때문에, 킬러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