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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 1953
스포일러 있음
남보다도 못한 부모 자식 사이
자녀와 부모 유전적 근연도는 같다. 자녀에게 부모는 각각 자신의 절반과 같고,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의 절반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반적으로 더 클까? 진화심리학적으로는 부모의 번식 가치가 자녀의 번식 가치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부모는 나이가 들며 번식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짐에 따라, 부모의 번식 가치보다 자녀의 번식 가치가 점점 커진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짐으로 여기고 불효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효는 무엇일까?
영화 초반 자녀들은 부모가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저것 준비를 한다. 그런데 심상치가 않다. 손자의 책상은 조부모가 자야 할 자리를 위해 잠깐 바깥에 뒀다. 손자는 그 책상 때문에 엄마랑 실랑이를 한다. 손자에게 조부모는 별로 하지도 않는 공부보다 못한 존재인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와도 손자들은 몇 마디도 나누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가 훌쩍 커버린 뒤 처음 보는 것 같다. 자녀들과 왕래한 기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단서는 계속해서 나온다. 부모님은 시골 먼 곳에서 올라오지만, 음식을 준비할 때 여러 메뉴를 준비할지 고민할 때 자녀들은 오히려 말린다. 자녀들은 고기만 해도 충분하다며 회까지 준비하지 말라고 한다.
부모님이 도쿄에 도착해서 자녀들과 나누는 대화를 보자. 아들이 아버지와 자주 낚시 다니던 동료에 대해 묻지만, 그 동료는 이미 죽은지 오래됐다. 자녀들이 얼마나 오랜만에 부모님을 본 것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편지 등의 교류도 없었다는 뜻이다.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렸을 때 어머니가 살이 쪄서 창피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그냥 웃기만 한다. 이런 말은 남한테도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왜 그럴까? 그냥 부모님이 편하기 때문일까?
친자녀들은 어쩌면 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리코(며느리)보다 부모님에게 매정하다. 노리코의 남편, 즉 부모님의 친아들은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렇게 남편을 잃은 노리코는 없는 형편에도 시부모님을 깍듯하게 대접한다. 친딸과 사위는 노리코보다는 못하지만, 거기서도 친정 부모님 걱정이라도 하는 쪽은 사위이다. 친정 부모님이 먹을 간식을 사오고, 친정 부모님이 도쿄에 올라와서 아무것도 구경 못하고 빨래나 하고 계시니, 사위가 좀 고궁라도 같이 모시고 둘러봐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한다. 오히려 친딸은 간식은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하나만 드리라고 빼고, 고궁 얘기에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한다.
친자녀들은 자신들이 부모를 책임지기 싫으니, 부모님을 휴양지인 아타미에 보낸다. 그러나 음주가무나 도박으로 밤 늦게까지 노는 휴양지의 문화는 부모님과 맞지 않았고 부모님은 밤잠을 설치게 된다. 부모님이 도쿄에 휴양을 하러 왔겠는가? 부모님은 자식들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 마음을 모른다.
부모님이 아타미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를 보자. 딸은 부모님께 왜 벌써 왔느냐며 아쉬워한다. 부모님을 책임지지 않고 돈으로 편하게 해결하려는 마음은 도시 사람들의 잘못된 문화인 것일까? 도시에서는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미용실 손님은 딸에게 저분들이 누구냐고 묻자 딸은 그냥 시골에서 아는 분이 올라왔다고 한다.
친자녀들의 행태는 혈족이 아닌 남을 대하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그런데 그들도 사연이 있다. 친딸은 미용실을 보느라, 친아들은 의사인데 환자가 많아서 부모님을 모실 여유가 없다. 감독은 도시의 삶을 비판하는 것인가? 도시의 여유 없는 삶이 자녀들을 그렇게 만든 것인가? 도시에서는 가족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의 잘못인가? 아니다. 사회 구조는 결국 사람들이 이루는 것이다. 도시는 욕망의 집합체이다. 잘못이 있다면 욕망에 순응한 사람들이 잘못이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는 도시의 삶이 불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며느리 노리코이다. 노리코도 도시 속에서 생활하며, 오히려 여유가 없다. 노리코는 작은 방 하나에 살며, 시부모님께 대접할 먹을 것과 술도 옆집에서 다 빌려올 정도로 어렵게 산다. 하지만 휴가를 내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고, 시어머님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한다. 자녀들이 부모를 편하게 생각하며 일반적인 남들보다 못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대조된다. 며느리도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도시의 삶이 자녀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
자녀들이 부모를 보러가지 않는 것은 바쁜 삶 때문이 아니다. 부모님은 처음 도쿄에 올라와 며느리 노리코를 보며 꿈 같다고 이야기한다. 도쿄가 엄청 먼 곳인줄 알았지만, 이렇게 하룻밤만에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부모님과 자녀 사이에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것만큼이나 왕래가 없었지만, 사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친자녀들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애도하는 것도 잠깐뿐이다. 다시 도시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도시의 삶 때문인가? 장례식장에서 유품은 뭘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도시의 삶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아버지는 휴양지였던 아타미에서 아내가 잠을 못 잔 뒤에 어지럼증을 느껴 휘청거렸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평소 살이 쪘으니 그것 때문에 갈 때가 된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그 전까지 쌩쌩했다. 이들은 자신이 책임지기 싫은 것이다. 도시 때문에 책임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책임지기가 싫은 것이다. 도시는 좋은 핑계를 제공해줄 뿐이다.
결국 도시는 그저 사람들의 욕망을 증폭시켜주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수단이다. 도시 문화 때문에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을 책임지기 싫은 욕망이 도시 문화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시 문화가 문제가 아니다. 왜 자녀들이 부모님을 책임지기 싫어하는지, 그것이 진짜 문제이다.
왜 자녀들은 부모를 짐으로 여기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할까? 먼저 부모에 대한 책임을 자녀에게 물을 수 있는지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상호호혜성 관계로 이어지는 남과의 관계는 무책임하게 굴 수가 없다. 무책임하게 굴면 자신이 받는 것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남에게 자원이나 호의를 제공하면 그에 해당하는 것이 돌아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준다면 그에 해당하는 것을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좀 다르다. 혈족에 대한 관계는 상호호혜성에 기반을 두는 타인에 대한 관계와는 다르다. 부모는 유전적 근연도로 인해 자녀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푼다. 자녀들은 받는 것에 익숙하다. 즉,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자녀가 받고, 부모가 주는 것이 당연한 구조이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자녀는 부모에게 무언가를 베풀 필요가 없다. 부모의 번식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자녀의 번식 가치는 점점 올라가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에게 여전히 번식 가치가 있거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혹은 부모의 생존을 위해 자녀로부터 노동력이나 자원을 착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가 번식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자녀의 노동력 착취에 대한 것은 좀 역사 흐름에 따라 다르게 여겨졌는데 이것은 다른 글에서 보자.)
즉, 자녀가 부모에게 불효를 하는 이유는 부모와의 관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관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은 이런 생각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모든 관계를 계산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당연해지면 그 사람은 막 대해도 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만약 부모와의 관계를 일반적인 타인의 관계처럼 생각한다면,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거나 아니면 그에 해당하는 것을 돌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혹은 그런 부담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받는 것이 당연해진 삶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공할 수가 없다. 타인과의 관계는 상호호혜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지위의 측면에서도 타인에게 소중한 자원이나 정보, 기술을 제공하는 사람이 명성을 얻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녀가 ‘효’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자녀를 위한 것이다. 부모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자녀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주는 것은 자녀를 남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서 받는 것들에 감사하는 연습을 함으로써 올바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아버지가 며느리 노리코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인상 깊다. 노리코에게 그만 남편(자신의 아들)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하라는 말에서다. 나는 여기서 눈물을 쏟았다.
이상한 일이야,
내가 낳아 기른 자식보다
타인인 네가 우리에게 훨씬 잘해줬단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