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얘기하지만 우리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합리화’할 뿐이다.

자유 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의지나 의식이 있음을 느낀다. 이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강한 심리적 추동을 의지라고 한다. 심리적 추동이 알고리즘에 의해 생기는 것, 혹은 알고리즘에 의해 특정 행동이나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자유 의지가 없다는 사실과 의지의 존재는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의식의 존재와 자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은 서로 상충되는 것 같다. 의식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단기적 손익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손익을 함께 고려해 더 나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일반적으로 의식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 결과들은 의식도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까? 우리는 확실히 의식이 있음을 느낀다. 뇌에도 분명히 다른 욕구나 충동을 제어하는 전두엽을 비롯한 기관이 있고, 뇌가 사고하는 과정에서도 주의를 집중하여 일을 처리하거나 학습하는 중앙관리자 모드, 숙고 체계, 제2시스템이 있다.

의식의 역할이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생각할 수 있는 역할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논리적 타당성 검토이고, 둘째는 논리적 타당성 확보이다. 하나는 합리적인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비합리적인 역할이다.

이미 이루어진 결정에 대한 의식의 논리적 타당성 검토의 역할부터 살펴보자. 결정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이후에 그 결정이 의식에 올라왔다면 우리 의식은 그 결정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결정권은 의식에게 있지 않다. 의식보다 좀 더 단순한 심리 체계인 무의식이 결정 권한을 갖고 있다. 무의식은 알고리즘에 따라 결정할 것이다. 심리가 의회라면 의회는 무의식이 전부 차지하고 있다. 의식은 무의식이 결정한 것에 대해 검토하는 시민 단체이다. 시민 단체는 의회의 결정에 대해 검토하고, 권고안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권고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의회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무의식도 우리 심리에서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의식의 역할이 논리 검토라면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상충하지 않는다. 이 경우 의식의 역할 조차 알고리즘으로 환원 가능하다. 무의식, 제1시스템에서는 알고리즘에 따라 빠르게 처리 가능한 일들만 처리할 수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사안이 복잡하여 빠른 알고리즘에 따라 처리할 수 없을 때에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의식에게 내려진 결정에 대한 논리를 검토하라고 할 수 있다. 늦은 밤 배가 고파서 무의식은 야식을 먹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당장의 배고픔만 고려해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의식에게 문제 검토를 요청한다. 의식은 무의식에게 결정의 실행을 보류하라고 하면서 시간을 확보하고, 생각한다.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지금 밥을 먹으면 얼굴이 부을 것이다. 또한, 곧 잘 것인데 야식을 먹으면 위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러므로 야식을 먹는 것은 배고픔을 해소하는 이익보다 다른 손해가 크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런 보고서를 무의식에게 보낸다. 이 보고서의 의견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무의식에게 달려있다.

그런데, 방금 말한 의식의 역할은 또 다른 알고리즘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할 것. 이것은 가치 판단이나 손익 계산 같은 알고리즘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합리적인 결정에 다가가기 위한 알고리즘이다(합리적인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곧 볼 것이다). 의식도 알고리즘에 따라 논리적 검토를 하고, 무의식도 나름의 가치 판단을 통해 알고리즘에 따라 행동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현재 호르몬 체계에 의하면 배고픔이 제일 중요하다. 따라서 의식이 보낸 의견 보고서를 묵살하고, 야식을 먹어라!

무의식은 의식보다 아주 강력하다. 우리가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 중 의식에 의한 것은 5%밖에 안 된다. 나머지 95%는 무의식에 의한 것이다. 처리하는 정보로 따지면 의식의 처리 속도는 10–50B/s 내외이지만 무의식이 처리하는 속도는 천만 B/s를 넘어간다(Koch, 2004). 그러므로 의식이 무의식의 결정에 대해 검토하는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무의식은 그 결정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하라고 의식에게 신호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검토하는 것과 확보하는 것은 좀 차이가 있다. 앞에서는 의식 체계가 보낸 의견에 따라 무의식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의 역할이 단순히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만 하는 것이라면 의식의 권한은 아주 적다. 이런 경우, 무의식은 이미 결정을 번복하지 않기로 강한 결정을 내렸으므로 어떤 행동이 이뤄질 것은 확실하다. 의식은 이 행동의 논리를 확보할 뿐이다. 이것이 의식의 역할 중 하나인 ‘합리화’이다.

실제 실험에서 의식이 이미 이뤄진 결정에 합리화를 한다는 것은 밝혀졌다. 분리 뇌 연구가 의식의 합리화에 대한 적절한 예시라고 하긴 어렵지만, 합리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번 보자. 흥미로운 내용이니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대뇌는 우뇌와 좌뇌로 나뉘어진다. 우뇌는 좌측 신체와 관련이 있다. 신체의 왼쪽 부분에서 감지하는 신호를 처리하고, 신체 왼쪽 부분의 운동도 담당한다. 좌뇌는 반대로 우측 신체와 관련이 있다. 신체 오른쪽 부분에서 감지하는 신호를 처리하고, 신체 오른쪽 부분의 운동도 담당한다. 관련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 정보는 거의 반드시 한쪽 눈에서 받은 정보를 반대쪽 뇌가 처리하지만, 촉각의 경우에는 반대쪽 뇌가 아니라 두 뇌에 함께 전달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좌뇌는 언어 영역도 담당한다. 언어를 담당하는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은 모두 좌뇌에 있다. 베르니케 영역은 문맥의 의미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고, 브로카 영역은 문법적으로 문장을 구사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베르니케 영역에 문제가 생겨 ‘베르니케 실어증’을 앓게 되면 문장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는 있어도 사실은 아무 뜻이 없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된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동문서답하게 된다. 반대로 브로카 영역에 문제가 생겨 ‘브로카 실어증’을 앓게 되면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듣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지만, 문장으로 구사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문법에 맞지 않게 단어만을 나열하거나 어눌하게 말을 하게 된다. 어쨌든 언어 능력을 관장하는 이 두 영역 모두 좌뇌에 있다. 좌뇌는 세부적인 디테일을 보는 경향이 있고, 우뇌는 그런 능력은 약하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를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우뇌와 좌뇌는 ‘뇌량’이라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서로 정보를 적절히 주고 받을 수 있다. 양쪽 뇌는 한쪽만 사용하는 것보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함께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Hughes & Babara, 2012). 그런데 과거에 발작을 일으키는 뇌전증 환자들에게는 이 뇌량을 자르는 수술이 이뤄졌었다. 뇌 전체가 활성화되어 일어나는 발작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뇌량이 절제된 환자들에게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연구진은 마치 좌뇌와 우뇌가 다른 인격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인지와 언어 처리 사이에서 불일치가 일어나는 등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보겐은 이니셜이 W.J.인 환자에게 뇌량 절제술을 했고, 가자니가는 이후 환자에게 몇 가지 실험을 했다. W.J.에게 이미지가 보이면 버튼을 누르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어떤 것은 왼쪽 눈에만 보이게 했고, 어떤 것은 오른쪽 눈에만 보이게 했다. 그랬더니 왼쪽 눈에 이미지를 보여줬을 때는 왼쪽 손으로 버튼을 눌렀고, 오른쪽 눈에 이미지를 보여줬을 때는 오른쪽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환자의 눈은 양쪽 다 이미지를 반대쪽 뇌를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실험에서 가자니가는 W.J.의 오른쪽 눈(즉, 좌뇌)에 상자나 얼굴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을 봤냐고 물어봤다. W.J.는 상자나 얼굴을 봤다고 정확히 설명했다. 그런데 W.J.의 왼쪽 눈(즉, 우뇌)에 상자나 얼굴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랬더니 W.J.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방금 상황에서 우뇌는 무언가를 봤지만 우뇌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언어 능력은 전부 좌뇌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좌뇌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답한 것이다. 스페리는 이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Gazzaniga, Bogen, & Sperry, 1962).

이제 합리화에 대한 신기한 실험을 보자. 가자니가는 W.J.에게 후속 실험을 한다. 이번에는 양쪽 눈에 동시에 서로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왼쪽 눈에는 눈이 내리는 사진을, 오른쪽 눈에는 닭발이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사진과 관련이 있는 이미지 카드를 고르라고 했다. 왼쪽 손은 눈삽이 있는 카드를 골랐고, 오른쪽 손은 닭 카드를 골랐다. 여기까진 이상할 게 없다. 눈 내리는 장면을 본 우뇌(왼쪽 눈)는 관련있는 눈삽 카드를 골랐고, 닭발을 본 좌뇌(오른쪽 눈)은 닭 카드를 골랐다. 가자니가는 왜 이 카드를 골랐는지 물어봤다. W.J.는 닭발은 닭과 관련이 있으므로 골랐다고 답했다. 가자니가가 왼손은 왜 눈삽을 골랐냐고 묻자, W.J.는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니까요.“라고 답했다(Gazzaniga, 1998). 좌뇌는 우뇌가 눈 내리는 장면을 봤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좌뇌는 그럴듯한 이유를 지어낸 것이다!

가자니가는 이니셜이 N.G.라는 뇌량이 절제된 환자에게도 실험을 한다. 이 환자의 오른쪽 눈에 글자를 보여주고, 그것을 읽게 한다. 그러면 N.G.라는 환자는 잘 대답한다. 그러다가 왼쪽 눈에 웃긴 누드 사진을 보여줬다. N.G.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웃는다. 가자니가가 N.G.에게 무엇을 봤냐고 묻자, N.G.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당연하다. 누드 사진은 우뇌가 본 것이고, 좌뇌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드 사진을 또 보여주고, N.G.가 얼굴을 붉히며 계속 웃자 가자니가가 이번에는 왜 웃냐고 다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N.G.는 “모르겠어요. 선생님 기계가 참 웃기게 생겼네요.“라고 대답했다. N.G.의 좌뇌는 우뇌 때문에 웃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또 그럴싸한 이유를 지어낸 것이다.

가자니가와 르두는 뇌량이 절제된 P.S.라는 환자에게도 비슷한 실험을 해봤다. P.S.의 왼쪽 눈에 스트레칭 하시오, 웃으시오. 등의 지시 사항이 적힌 것을 보여줬고, P.S.는 그에 따랐다. 그리고 연구진이 왜 그랬냐고 묻자, P.S.는 스트레칭이 필요했다는 둥, 연구자들이 재미있다고 느꼈다는 둥으로 대답했다. 역시 좌뇌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에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뇌량이 절제되지 않은 다른 경우를 보자. 실험참가자가 손을 들라는 요구를 받으면, 보통 오른손잡이는 60% 확률로 오른손을 든다. 그런데 연구진이 실험 참가자의 우뇌에 자기장으로 자극을 주면 오른손잡이인데도 80% 확률로 왼손을 들게 할 수 있다. 우뇌는 좌측 신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외부의 물리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 참가자들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왼손을 들었다고 생각한다(Leone et al., 1996).

심지어 연구자들은 실험 참가자가 손가락을 움직이도록 뇌를 자극할 수 있다.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먼저 참가자들 뇌의 시상 부위를 자극하여 손가락을 움직이게 해봤다. 그러고나서 참가자에게 손가락을 자신의 의지로 움직였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참가자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답했다. 다음에는 참가자 뇌의 운동 피질을 자극하여 손가락을 움직이게 해봤다. 이번에도 그것이 참가자 자신의 의지였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참가자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대답했다(Crese, 2004). 외부 물리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참가자들의 손을 움직여도 참가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의지였다고 답한다. 그런 행동이 이뤄졌을 때 손이 간지러워서 움직였다는 등의 이유를 갖다 붙이는 비합리적인 합리화에 대한 실험은 이밖에도 많이 이뤄졌다. 비자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답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있음을 의미한다.

정리해보자면, 의식의 논리 검토와 논리 확보의 두 가지 역할 모두 우리가 알고리즘이라는 사실과 상충하지 않는다. 논리 검토 과정은 그것조차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여길 수 있고, 논리 확보 과정은 이미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된 행동에 그저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의식이 하는 합리화 중 가장 쉬운 합리화는 ‘[우리]가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합리화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를 뜻하는 것은 의식이다. 하지만 실상은 의식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이 알고리즘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심리를 의회와 다른 기관에 비유한 것으로 돌아와보자. 의회의 의석은 무의식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 의식은 결정에 대한 권고안을 내놓는 시민 단체와 같다고 했다. 의식의 또다른 역할은 무의식이 결정한 것에 대해 얘기하는 의회의 대변인이다. 대변인이 의회의 모든 결정을 얘기하진 않듯이 우리는 의식에 올라온 것만 느낄 수 있다. 또한, 의식이라는 대변인은 무의식이라는 의회가 결정하는 과정은 볼 수 없고, 최종 결정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의식은 결정된 행동에 대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지어내어 발표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추론 능력으로부터 발달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의식의 역할 중 하나인 합리적 타당성 검토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역할인 합리화는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의식은 인간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특히 인간의 ‘합리화’는 독특한 인간의 특성을 만들어낸다. 다음 절에서 인간의 ‘합리화’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인간이 저마다 좋은 삶을 다르게 여기고, 그러므로 좋은 삶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박도 논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