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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yo Story (Yasujiro Ozu, 1953, Japan, 134m, BW)
스포일러 있음
서로에게 의미가 다른, 부모와 자녀의 만남
<동경 이야기>의 아버지(슈키치)와 어머니(토미)에게는 자녀가 넷 있다. 장남 코이치, 장녀 시게, 넷째 아들 케이조, 막내딸 교코. 셋째 아들은 전쟁에서 죽었다. 부모님(슈키치와 토미)은 히로시마에서 막내딸 교코와 같이 살고 있고 코이치와 시게는 도쿄에, 케이조는 오사카에 살고 있다. 부모님은 아주 오랜만에 자식들을 보러 도쿄에 간다.
부모님은 설레는 마음으로 자식들을 보러 갔겠지만, 자식들은 부모님을 진심으로 반가워하기는커녕 그들을 모셔야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부담으로 여기다 못해 짐짝처럼 여긴다. 부모님에게 비싼 과자를 대접하는 것을 아까워 하고, 부모님을 직접 모시는 대신 젊은 사람들이나 갈 법한 온천 여행에 보내 돈으로 해결한다.
오랜 시간의 공백이 그들 사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영화 속 부모님의 대사들을 보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렇게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씁쓸함, 안타까움, 현실 수긍이 동시에 느껴진다.
장남 코이치, 장녀 시게, 넷째 아들 케이조 모두 이전에는 막내딸 교코처럼 부모님을 대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부모님을 짐짝처럼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자녀들은 크면서 가정을 꾸렸고 생업이 생겼다.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혼해서 집 떠나면 다들 자기 가정이 먼저다. 자기 자식들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생업이 우선순위가 된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부모님을 부담으로 여기다 못해 짐짝처럼 여기는 행동은 자기 가정이 먼저라서, 도시에서의 삶이, 일과 생활이 녹록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봐도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죽은 셋째 아들의 며느리 노리코는 슈키치와 토미를 돌보기 위해 회사에 휴가까지 냈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부모를 부담으로 여기는데 살아 있지도 않은 자녀의 아내 노리코만이 시부모를 곡진하게 대한다. 노리코만이 그들을 진심으로 대한다.
토미가 죽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막내딸 교코를 제외한 자식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교코와 노리코만이 진심으로 슬퍼할 뿐이다. 오죽하면 토미의 죽음 이후 자녀들은 다 집으로 바로 돌아갔지만 끝까지 슈키치 곁을 지킨 노리코에게 그가 이렇게 말했을까.
“이상한 일이야. 내가 낳아 기른 자식보다 타인인 네가 우리에게 훨씬 잘해줬단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가, 자식들보다 그들에게 잘해주었다는 게. 정말 슬픈 일이다.
더 슬픈 것은 슈키치와 토미는 언제나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효막심한 자식들이라고, 부모 공경이라고는 모른다고 욕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우린 운이 좋은 편이지.”
“그럼요. 우린 잘된 거죠. 우린 행복한 거예요.”
“그렇지. 행복한 편이고 말고.”
“그럼요. 행복한 편이죠.”
그들은 너무나도 덤덤한 얼굴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영화는 시간이 만든 변화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덤덤하게 인정한다.
정말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는 걸까? 가스파 노에의 영화 <돌이킬 수 없는>에서의 말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일까? 그럼 나는 그 앞에서 무력하게 앉아서 “나는 행복한 편이다.”라고 자기만족해야만 하는가?
이게 오즈 야스지로가 내게 전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최소한 가족 관계에서만큼은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믿고 싶지 않다. 나는 자녀들과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영화 속에서 제일 극단적으로 부모님의 방문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장녀 시게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겨우 끊었는데 또 마셔버렸어.”, “아버지 옛날에는 자주 마셨어요. 연회 뒤엔 늘 펑펑 마시고 오셔서 어머니만 힘들게 했어요. 형제들이 정말 싫어했는데.”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좋은 모습만 보이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망친 건 비단 시간뿐이 아닐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잘 대접해서 보내줘야 하는 손님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소유물로 여겼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들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들을 내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 관계를 이렇게 만든 건 그들, 그리고 그들이 원했던 것을 주지 않은 나다.
내가 나의 부모님과는 달리 자녀들을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함께 삶에 대해 캐묻는 동반자로 여긴다면, 그래서 그들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면, 나와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자녀가 있다면 같이 그 길도 기웃거려보고, 잘 가라고 손 흔들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련다. 내가 아직 오즈 야스지로처럼 인생의 굴곡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런 패기 넘치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내게 힘을 쓸 수 없는 어떤 것도 있음을 증명해 보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