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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20
스포일러 있음
길가메쉬는 기원전 2750년 경의 사람이다.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우루크 왕조의 5대 왕으로 실존 인물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최초의 영웅 서사시이며 문자로 쓰인 세계 최초의 문헌이다. 그리스, 히브리, 북유럽, 이집트 신화도 메소포타미아 신화 이후에 만들어져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각 신화들에는 닮은 점이 꽤 많다. 문학과 신화, 철학과 과학 등 인간이 걸어온 발자취를 쫓아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폭군 길가메쉬
길가메쉬가 왕으로 있는 우루크는 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영광스러운 국가이다. 히브리 신화의 아담은 우루크의 일곱 현인들 중 한 명이다. 아담은 수메르 신화의 엔키 신의 사제였다. 일곱 현인 중에는 아담 외에도 세트, 에노쉬, 케이난, 마할랄엘, 야레드, 에녹 등이 있다. 일곱 현인은 우루크 도시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다. 히브리 신화를 읽어보면 아담의 족보를 알 수 있는데, 아담이 셋(세트)를 낳고, 셋이 에노스(에노쉬)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케이난)을 낳고, 게난이 마할랄렐(마 할랄엘)을 낳고, 마할렐렐이 야렛(야레드)를 낳고, 야렛은 에녹을 낳았다. 에녹의 증손자는 홍수에 대비해 방주를 지었던 노아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노아는 우트나피쉬팀, 혹은 아트라하시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길가메쉬는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살고 있다. 특히 결혼하는 여자는 남편과 첫날밤을 맞기 전에 길가메쉬와 하룻밤을 자야 한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법인가!
진화심리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남자는 부성 불확실성으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내가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남편의 아이인지, 길가메쉬의 아이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당시 피임술이 발달해봤자 얼마나 발달했겠는가? 그나마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아내와 결혼 후 한 참 뒤에 아이를 낳는 것인데 당시 사회 풍습 상 힘들었을 것이다. 길가메쉬는 도시의 거의 모든 남자에게 오쟁이를 지웠고, 도시의 남자들은 첫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다. 만약 첫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확률이 50% 정도라면 부성 투자도 그 정도밖에 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첫째 아이는 또한 얼마나 불행한가? 첫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성 투자를 해야 하는 남편은 또한 얼마나 불행한가?
진화심리학에서 여성은 단기적 짝짓기에서는 신체적 매력이나 용모가 중요하지만, 장기적 짝짓기에서는 특히 정절과 순결이 중요하다. 정절과 순결은 남성의 부성 불확실성을 낮춰주는 좋은 번식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결하다고 여겨지는 여자는 모든 역사를 통틀어 장기적 짝짓기의 대상으로 남성들에게 선호되어왔다. 그런데 길가메쉬는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 여성에게서 정절이라는 번식 가치를 빼앗아가는 셈이다. 이는 여성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남성들은 여성이 원치 않는 남성과 성관계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원치 않는 남성과 성관계를 하는 것은 여성에게는 죽음만큼, 혹은 그 이상 고통스러운 것이다. 길가메쉬는 도시의 모든 여자들에게 이런 고통을 지우니 얼마나 악덕한가?
역사 속에서 높은 지위는 항상 번식 자원의 접근 기회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모든 문명에서 공통 사항이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뿐만 아니라 그보다 작은 다른 문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초 인도 지방의 왕이던 부핀데르 싱은 332명의 여자를 거느렸다. 중국의 황제는 첩을 수 백 명씩 두고 자신의 자녀를 낳게 했다. 아름다운 여자는 황제의 궁에서 황제와 하룻밤을 지냈고, 매력이 떨어지는 여자는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들의 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녀를 가장 많이 낳은 것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은 모로코의 마지막 황제 물레이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은 500명이 넘는 여자를 첩으로 두고 자녀를 888명 낳았다.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우루크가 최초의 진정한 도시 국가, 메트로폴리스라고 한다. 우루크에서는 처음부터 왕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루크는 지위 체계가 합의적 권력에서 강압적 권력으로 넘어간 초기 상태라고 여겨지는 것인데, 복잡한 지위 체계가 거의 처음으로 등장한 곳에서 바로 높은 지위를 활용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서 성적 자원을 빼앗아가는 길가메쉬가 등장한 것은 마음을 참 착잡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엔키두와 길가메쉬의 만남
결국 길가메쉬를 제지해달라는 사람들의 원성은 커져만 갔다. 길가메쉬를 저지하기 위해 신들은 엔키두를 보냈다. 엔키두는 야생에서 길러져 사람 노릇을 하지 못했다. 들짐승에게 길러져 들짐승처럼 행동했다. 현대에도 러시아에서 늑대에게 길러져 늑대처럼 행동하는 5살 여아가 발견되긴 하지만, 이는 우리 현대인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뉴스다. 하지만 길가메쉬의 시대에는 도시 밖에서 산과 들에서 커서 짐승처럼 행동하는 문명화가 아직 되지 않은 인간이 많았나보다.
엔키두는 여사제 ‘샴하트’와의 성교를 통해 문명화된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그런 성교를 불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성스럽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성적 쾌락을 포함한 사랑은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는 동기가 된다. 교수들의 논문 발표는 결혼 적령기, 결혼 직전 가장 활발한데 이런 진리를 길가메쉬 서사시를 쓰던 사람들은 미리 알았던 것일까?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고도의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번식 욕구 덕분이다. 버트란드 러셀은 지식에 대한 탐구 욕구는 공명심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공명심은 번식 기회의 이득으로부터 비롯된다. 초창기 문명의 사람들도 이런 인간 본성에 대해 잘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엔키두와 길가메쉬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둘이었는데, 힘을 겨뤄보고나서 바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힘을 겨룰 때는 경쟁자의 위치이지만, 힘 겨루기가 끝나고 나서는 최고의 우정을 가진 사이가 되었다. 이는 경쟁 관계와 우정의 관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트로이아의 영웅들과 아카이오이의 영웅들은 서로 싸우다가 우정을 확인하고, 서로의 무구들을 교환하기도 한다. 수컷 간 경쟁은 원망심과 함께 발생할 때도 있지만, 확실한 건 두 가지는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 중 서로에 대한 조롱도 서슴지 않다가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교환하는 남자들의 스포츠에서도 이러한 면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훔바바와의 결투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훔바바를 죽이러 원정을 떠난다. 원정을 떠나기 전 길가메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 주변의 원로들도 모든 것을 가진 왕이 왜 죽음을 감수하러 가냐고 말리지만, 길가메쉬는 명성을 위해 여정을 떠나야겠다고 한다.
길가메쉬의 어머니 닌순도 길가메쉬를 말린다. 길가메쉬는 친구 엔키두에게 너도 죽음이 두렵냐고 묻는다. 명성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하는 수컷의 결심은 참으로 무모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어머니 닌순은 어머니 없이, 가족 없이 자란 엔키두에게 자신이 너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말한다. 닌순은 엔키두를 거두어준다. 고아를 받아들이는 양모 닌순의 마음은 참으로 관대한 것이다. 혈연도, 포괄적합도를 뛰어넘어 고아를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의 본능을 초월한 대단한 일이다. 엔키두는 그것을 큰 은혜라 생각하고 길가메쉬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훔바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길가메쉬의 태도가 정반대가 된다. 그는 엔키두와 야영을 하며 계속 꿈을 꾸는데, 그것이 자신이 훔바바와의 결투에서 죽게 될 예지몽이 아닌지 상당히 불안해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에 얼마나 진심이 담겨있는지는 죽음의 실제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구나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싶어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은 쉽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려는 본능은 인간의 제1본능이다. 실제 죽음 앞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것과 단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길가메쉬는 결국 현명한 친구 엔키두 덕분에 훔바바에게 도달해 그를 처치할 수 있었다.
훔바바는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이었다. 만약 훔바바가 정말 길가메쉬와 엔키두에게 말을 건낼 수 있는 존재였고, 실존했다면 훔바바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혹은 큰 곰 같은 짐승이었을 수도 있다. 야생에서 자란 엔키두와 훔바바는 어쩌면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훔바바를 생포했을 때 길가메쉬는 훔바바를 살려주려고 고민했다. 엔키두가 길가메쉬에게 훔바바를 죽여야 한다고 계속해서 설득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엔키두는 훔바바가 길가메쉬를 속이는 것이라 말했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왜인지 엔키두에게서 어떤 질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엔키두의 죽음
길가메쉬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 이슈타르의 구혼을 거절하고, 그 저주로 내려온 황소도 엔키두와 함께 죽이고 나서 길가메쉬와 엔키두 둘 중 하나는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나약한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슬프다. 신이 자연의 힘이라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가?
엔키두는 죽음을 앞두고,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한다. 샴하트가 자신에게 성교를 통해 지혜를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야생에서 그냥 자랐다면 이런 저주 없이 제 명대로 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말이다. 죽음 앞에서 길가메쉬와 함께 있으며 누렸던 영광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 앞에서 영광이 무슨 소용인가?
영생을 찾아서
저승에 다녀온 엔키두는 사람들이 저승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길가메쉬에게 이야기해준다. 어떤 자들은 저승에서 행복하고, 어떤 자들은 영원히 울고 있다. 죽음의 때에 어떤 사람들은 만족 속에서 눈을 감지만, 어떤 사람들은 후회 속에서 눈을 감는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죽기 직전의 모습이 저승에서도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확실한 건 모든 인생에는 똑같은 가치가 있지 않다. 어떤 인생은 잘 산 인생이고, 어떤 인생은 부족한 인생이다. 마치 이집트 신화에서 심장의 무게를 달아 생전의 죗값을 측정하듯,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의 저울을 잰다. 만족스럽게 꽉 채운 인생을 살았다면 그걸로 되었다. 후회로 인해 인생이 여기 저기 비어있다면 부족하다. 어떤 인생이 잘 사는 인생인지는 계속 탐구해야 할 문제이지만, 분명히 ‘잘 산 인생’은 있다. 모든 인생을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대 사람들도 알고 있던 진리이다.
길가메쉬는 저승에 다녀온 엔키두를 보내준다. 자기 손으로 직접 엔키두를 묻어준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던 길가메쉬는 소중한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는 죽음이 두려워졌다. 자신도 엔키두의 운명처럼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차가운 땅 속에 묻힐 것인가? 그는 필멸의 운명을 거부하며 대초원에서 방황한다.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영생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나이가 들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아진다. 이것은 필멸의 운명 앞에 무릎 꿇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일까? 아니면 죽음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뿌린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현명한 노인의 모습일까? 운명을 거스르려는 길가메쉬는 현명한 것인가? 우둔한 것인가? 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답을 내리지 못한 지금은 영생을 추구하겠다.
길가메쉬는 죽음의 산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 인간 중 영생을 얻은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산의 입구에서 전갈 부부를 만난다. 전갈 부부는 필멸의 존재는 한 번도 이 산을 건넌 적이 없다며 길가메쉬를 만류한다. 영생을 위해 어둠 속에 몸을 내던지지 말고 목숨을 보전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길가메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우트나피쉬팀에게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며 비키라 한다. 결국 전갈 부부는 길을 비켜준다. 결국 문제는 삶과 죽음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는 햄릿의 명대사처럼 말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가장 먼저 삶과 죽음에서 찾는 것이다.
길가메쉬는 여정을 계속하다가 바닷가에서 ‘씨두리’라는 여인을 만난다. 이 여자는 바닷가 여인숙의 주인이다. 이 여자도 길가메쉬를 만류한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영생을 가질 수 없다면서, 돌아가서 배부르게 먹고, 춤추며 놀라고 한다. 아내와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라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한다. 여자는 얼마나 현명한가! 남자들이 망상 속에 있을 때 여자들은 현실을 이야기한다. 즐겁게 살고 가족들을 잘 챙기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잘 산 인생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길가메쉬는 영생을 찾아떠나겠다고 한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영생 같은 거 찾지 말고, 돌아가 남은 인생을 즐기고, 많은 아이를 낳고, 아내와 행복하게 지내라는 씨두리. 길가메쉬가 훔바바에게 갈 때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데, 왜 죽음을 자처하냐며 말린 길가메쉬의 어머니 닌순. 모두 여인들이다. 여자들은 현명하고 현실적이다. 남자들은 현명한 여자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명성, 영생 등의 것을 찾아나선다. 즐겁게 먹고 마시며, 아이들을 잘 길러내고, 아내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 모든 행복이 여기에 있는데 왜 그것을 버리고 고통의 길을 나설까? 절충이 필요하다. 현실만 따지면 미래가 없다. 미래만 따지면 현실이 없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함께 살아야 하나 보다. 남자의 야망과 여자의 현명함이 줄다리기처럼 끌어당겨 크게 엇나가는 일이 없도록. 영생을 추구하는 것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잘 사는 삶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답은 알겠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좁은 스펙트럼이다. 여자가 남성성을, 남자가 여성성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야망을 가진 사람과 현실을 따질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함께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이다.
우트나피쉬팀을 만난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법을 달라고 부탁한다. 우트나피쉬팀은 7일간 잠을 안 자면 그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길가메쉬는 졸음을 못 참고 잔다. 7일 내내 잔다. 고작 잠도 거스르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영원한 잠인 죽음을 거스르겠는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육체에 갇혀있는 인간은 생리적 현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책이 마치 영생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에게 말하는 것 같다. 잠도 어찌 못하는 네가 무슨 수로 영생을 추구하려고 하느냐?
지금까지 2주 이상 잠을 안 자고 버틴 사람은 없었다. 이 이상 잠을 안 자면 죽는다. 잠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대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잠 조금만 자고 더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시중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남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쓴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미라클 모닝이랍시고 함께 새벽에 일어나는 모임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살면 일찍 죽는다. 어쩌면 이것은 유한한 인생을 어떻게든 늘려보려는 인간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영생을 가질 수 없다면 유한한 삶 내에서 어떻게 삶의 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잠을 덜 자면 되겠군! 이 결론 역시 우둔한 결정이다. 잠을 줄이면 죽음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생을 추구하는 것도 우둔한 결정일까…? 그런 것 같다…
우트나피쉬팀은 잠도 이기지 못하는 길가메쉬를 그냥 돌려보내려 하지만, 우트나피쉬팀의 아내의 자비로 그는 영생을 얻는 불로초의 위치를 길가메쉬에게 알려준다. 여자는 자비롭다. 남자의 자비는 계산적이지만, 여자의 자비는 공감에서 비롯된다. 길가메쉬를 딱하게 여긴 것이다. 길가메쉬는 덕분에 불로초를 찾지만, 그가 잠깐 목욕하는 사이 뱀이 불로초를 낚아채 도망간다. 영생이 얼마나 신기루 같은가? 불로초를 얻고 나서 몇 행도 안 지났는데 바로 뱀이 낚아채가버린다. 영생이 주어져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고, 늙음이 있기에 젊음이 있다. 유한성이 인간의 삶에 주는 선물은 삶을 더 소중히 하라는 것일 것이다. 길가메쉬는 영생을 찾아 방황하고, 여정을 할 때 거지 꼴이 된다. 만나는 존재마다 어떻게 모든 영광을 가진 길가메쉬가 이런 거지꼴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지 묻는다. 길가메쉬는 자신이라고 이런 거지꼴이 되지 말란 법이 있냐고 반문한다. 이것은 마치 책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모든 영광을 가진 자라도, 거지 꼴이 되지 말란 법 있나? 하물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아무리 모든 영광을 가진 자라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결국 다 인간일 뿐이다. 삶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잘 사는 삶도 ‘인간’이라는 경계 안에 묶여있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잘 사는 삶에 부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엇이고, 자신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다 잘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한계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노력도 인간성이 아닌가? 필멸이 인간의 특성이지만, 죽음을 뛰어넘으려는 말도 안 되는 시도를 계속 하는 것도 인간의 특성이다. 인간성을 잃지 않으며 인간성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것. 거기에 잘 사는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
책 자체에 대한 평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번역을 한국어로 볼 수 있다니 세상이 정말 좋아졌다 느꼈다. 그래서 저자에게 정말 감사하다. 이런 신화 책 같은 고서를 읽을 때면 항상 고민이 된다. 읽기 쉽게 풀어써져 있는 버전을 볼까? 원문의 운율을 최대한 그대로 살린 책을 볼까? 이 책은 읽기 쉽게 풀어쓴 형태에 가깝지만 원문의 운율도 느낄 수 있었다.
고전 신화들에 대한 탐독을 하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 켠에 있었지만, 막상 책을 집어들지 않았는데 술술 읽히는 이 책이 마중물이 되었다. 웬만한 소설보다 쉽게 읽히기 때문에 정말 재밌고 생각을 많이 하며 읽을 수 있다. 저자의 배려에 정말 감사함을 느꼈다.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조금 흠이긴 하지만, 그만큼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느껴져서 좋기도 했다. 주석에서 조금 더 주관적인 의견과 객관적인 해석을 구분해서 써주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작은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