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의 집필 목적은 좋은 삶을 정의하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적 지혜와, 해야 할 것들을 모두 나열하는 것이다. 즉,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당위까지 다루는 것이 목표이다.
잘못되거나 입증 불가능한 사실로부터 출발한 논의는, 논리적 과정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논리의 출발은 올바른 사실로부터 이뤄져야 한다. 올바른 사실은 믿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나 집단의 믿음은 진리와 멀 수 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기 위해 비논리적으로 근거를 끼워맞추는 여러 가지 편향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히려 믿음의 반대인 의심에 의해 만들어진다. 수많은 의심을 견디고 살아남은 주장이 진리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즉 사실은 반증 가능해야 한다. 반복적인 검증을 통해서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혹은 발견되는 증거들이 모두 귀납적으로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런 영역의 학문은 무엇인가? 바로 자연과학이다. 이런 논리 전개를 과학적 방법이라고 하며, 과학적 방법이 가장 활발하게 쓰이는 영역은 자연과학이다.
사실을 다루는 학문은 과학이다. 과학은 특히 당위를 배제하려고 한다. 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의지가 없고, 의지가 있다는 주장이 있더라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주장에 당위가 들어간다면 그것은 오류로 여겨진다. ‘—이 자연스러우므로 —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자연주의 오류이고, 이는 과학에서는 논리 비약이다. 자연 세계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 판단의 영역은 다른 학문적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논의의 출발점은 과학적 진실로 삼되, 이후에 당위에 대한 논의를 할 때까지 계속 과학적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윤리학이나 정치학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나 정치학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후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해야 한다.‘라는 주장도 사용한다. 윤리학이나 정치학은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는가? 철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철학적 방법은 과학적 방법을 포괄하며, 과학적 방법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인간의 욕망과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학문에는 일반적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후생 감소가 없는 한 전체 후생을 증대시키는 것이 옳다는 데에는 합의가 되어있다. 후생이 무엇이고, 후생의 측정이나, 비교에 대한 것은 논의 대상이다. 심리학이나 경제학은 과학적 사실과 당위의 연결 고리에 있는 학문이다. 이런 학문들이 과학적 방법을 택하고, 과학적 사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은 뒤로 혁명적인 발전이 이뤄진 데에는 우리 논의의 출발점도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런데 당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때에는 당위를 다루는 데에 적합한 학문적 방법만을 써야 한다. 특히 사실과 당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에서 당위로 넘어갈 때에는 특별히 우리가 앞으로 합의할 근거만을 통해 넘어가야 하며, 당위의 논리를 전개할 때에는 당위만을 다뤄야 한다. 당위에서 거꾸로 사실을 추론하면 논리적 오류로 여겨진다. ‘—하는 것이 옳으므로 —이 자연스럽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덕주의 오류이고, 이런 경우 특히 과학적 진실을 부정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오로지 성별로만 인한 임금 차별은 없는 것이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업의 특정 영역들에서 성별로 인한 성향이나 기질에 차이가 없다는 내용을 추론해서는 안 된다. 후자는 사실에 관한 과학적 영역이므로 과학적 방법을 통해 추론해야 한다.
이쯤하면 사실과 당위에 관한 구분을 명확히 한 것 같다.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쓰게 될 논의의 방법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과 도덕은 가리키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해서,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옳은 경우도 있으며, 그런 경우는 매우 많다. 어떤 사회 구조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사실에서 당위로 넘어갈 수 없듯이 말이다. 특정 사회 구조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가치에 따라 사회 구조를 개혁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당위에서 출발해 당위로 넘어갈 수 있듯이 말이다.
당위가 당위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몇 가지 당위에 관해 합의를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실에서 당위로 넘어가는 데에 기준이 없다면, 논리적 오류로 넘쳐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당위, 특정 진실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고통스럽게 한다고 해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을 대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논의는 진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당위는 우리의 논의 방법에 일종의 신성함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게 해줄 수 있는데, 특히 도덕주의 오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두 번째 당위, 어떤것이 사실로 밝혀져도 우리는 그 사실이나, 그 사실로부터 도출된 당위에 대해서는 특히 ‘의심해봐야 한다.’ 이는 과학적 방법의 핵심이자, 우리를 자연주의 오류로부터 지켜줄 당위이다. 진리는 의심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봤듯이 우리는 사실에서 도출한 당위가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실에서 당위로 넘어갈 때에는 무분별한 논리를 사용하지 말고 특정한 기준에 의해서만 넘어가야 한다.
세 번째 당위, 우리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할 ‘의무가 있다.’ 사실 위의 두 가지 당위는 논리적 방법에 대한 당위이지, 사실에서 당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합의해야 하는 당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로 합의해야 하는, 합의하는 당위는 이 한 가지이다. 좋은 삶이 정의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좋은 삶을 완벽하게 영위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강한 당위를 표시하기 위해 ‘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되, 좋은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아니라,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할’ 의무라고 표현했다.
세 번째 당위에 대한 합의가 되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이 책은 사람들을 위해 쓰기도 하지만, 특히 나의 자녀들을 위해 쓰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꼭 합의를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이런 당위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당연히 우리 대부분은 좋은 삶을 살고 싶으니 말이다. 그러나 삶이 고통 가운데 있는 내 자녀들 중 한 명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삶에서 무수히 많은 상황들을 겪는다. 어떤 상황들은 행복이나 그와 비슷한 감정을 유발한다. 어떤 상황들은 아무런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들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들은 그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특정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 고통에 적절한 대처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에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상황을 종결 짓지 못하면 우리는 때때로 지치게 된다. 그래서 좌절감이나 열등감 등은 비자발적인 것이다. 삶이 권태롭거나 지루하다면 즐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적절한 대처 방법만 안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생각 없이 살거나, 기준 없이 살면 이런 시행착오는 의미가 없어진다. 똑같은 고통에 다시 또 고민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때때로 이런 고통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해결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고통이나 고민들은 위대한 우리가 해결하기에 벅찬 것들이 많지만, 사실 이미 다른 사람도 겪었던 고통이자 고민들이자 시행착오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좋은 대처 방법을 깨달았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우리를 위해 해결책을 책에 적어놓았다. 그들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가? 누군가는 과학적 사실을 탐구하며, 누군가는 당위를 도출했다. 최고의 해결책이 도처에 널려있지만, 정보가 너무 많아 어디있는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런 기준을 통합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좋은 삶에 대한 의무를 합의하자고 하는 것은 부담을 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세 번째 당위를 살펴보자. 우리의 존재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 나의 유전자는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어떤 유전자는 환경에 의해 발현될지 말지 결정된다. 과거로 혹은 미래로 돌아가 살아본다면 어떨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환생설을 믿는다면 자신은 전생에, 조선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조선 시대에 있는 상황과 똑같다. 혹은 미래의 다음 생에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 이것은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미래에 태어난 것과 똑같다.
이렇게 똑같은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대신 기억을 지우고 태어나야 한다. 그런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런 존재가 바로 자녀이다! 자녀가 한 명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자녀 유전자의 절반은 자신과 똑같다. 자녀는 나의 절반의 환생인 것이다. 심지어 나머지 절반은 사랑하는 배우자의 환생이다. 거꾸로 나는 아버지의 절반의 환생이고, 어머니의 절반의 환생이다. 내가 삶을 아무 생각 없이 무기력하거나, 난잡하거나, 파괴적으로 산다면 아버지의 절반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고, 어머지의 절반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고, 내 자녀 각각의 절반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절반의 환생이자, 당신 어머니의 절반의 환생이자, 지금까지 낳은, 혹은 앞으로 낳을 자녀들 각각의 절반의 환생이다.
이 내용은 뒤의 ‘통합’의 장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이렇게 유전자 공유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결국 다 같은 조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같은 국가의 국민이라면 수백 년 안에,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불과 3천 년 안에 같은 조상을 찾을 수 있다. 수학적으로도 100촌 이내에 반드시 우리의 공통 조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는 가족의 대표이자, 국가의 대표이고, 인류의 대표이다. 우리는 가족 구성원의 일부가 아니라, 가족 그 자체이다. 민족 구성원의 일부가 아니라 민족 그 자체이다. 인류 구성원의 일부가 아니라 인류 그 자체이다. 모든 의무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도, 대부분 남에게 피해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할 의무는 분명하지 않은가?
무기력하게 있지 말아라.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서라. 삶에 책임지는 태도를 가져라. 좋은 삶을 살고자 분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가족의 대표이자 민족의 대표, 인류의 대표로서 지는 책임이다. 우리는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며, 좋은 삶을 살 권리가 있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할 의무가 있다.
만약 세 번째 당위에 대한 합의가 되었다면 이제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자.